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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기우진 May 12. 2021

살생과 단식 사이 어느 지점

인도의 자이나교(Jainism)는 모든 형태의 살생을 금한다. 벌레나 미생물조차도 죽여서는 안된다. 고의든 미고의든. 자이나교의 수행자들은 길을 걸을때 벌레를 밟지 않기 위해 부드러운 비로 쓸면서 다닌다. 물론 그들은 철저한 채식주의자들이다. 자이나교에서 최고 경지의 수행은 식물을 포함하여 아무런 생명도 해치지 않기 위해 일체의 음식을 끊고 단식하다가 굶어죽는 것이라한다. 매우 극단적인 불살생의 삶의 형태다.


한국 소설에도 그러한 인물이 그려졌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주인공 영혜가 그 인물이다. 소설은 영혜의 평범한 가정생활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영혜는 보통의 샐러리맨과 결혼을 하였다. 자식이 없는 그 부부에게는 영혜가 고기를 요리하고 같이 먹는 것이 거의 유일한 일상의 즐거움이다. 한국에서, 아니 세상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가정이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영혜는 더이상 고기를 요리하거나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반복된 악몽때문이었다. 도축되는 동물들이 자꾸 꿈에 나타났다. 하루는 꿈에서 영혜 자신이 동물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이 그 무고한 동물의 공포에 젖은 슬픈 눈과 마주쳤다. 그 꿈을 꾼 이후, 영혜는 비건을 선언한다. 그리고, 남편을 위해 고기를 요리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영혜가 택한 불살생의 삶은 그녀의 평범한 가족들과 충돌하게 된다. 남편과 다른 가족들은 하나 둘 영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관계를 단절한다. 유일하게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언니 인혜. 그러나 인혜와의 관계조차 인혜의 남편이 영혜와 육체 관계를 맺으며 일그러진다. 인혜는 영혜를 정신병원에 보낸다. 그곳에서, 영혜는 불살생의 극단적 형태의 삶을 택한다. 스스로 나무가 되는 것이다. 물과 태양 빛 만으로 살 수 있는 식물. 어떠한 생명체를 섭취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식물. 어떠한 생명체에게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는 나무. 그런 나무의 삶을 택하고 말라간다. 자이나교의 최고경지의 수행처럼.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난다.


살생이 없는 삶이란 가능한가.


내 뒷마당 정원에 이웃 고양이들이 가끔 온다. 그 이유는 정원 풀밭에 새들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새들은 풀밭에 있는 벌레들을 잡아 먹으러 온다. 고양이는 그 새를 잡아 먹으러 온다. 벌레는 풀을 먹고, 새는 벌레를 잡아먹고, 고양이는 새를 잡아먹는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서. 동물에게 산다는 건 살생을 필연적으로 유발한다. 살아가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에너지원을 섭취해야한다. 에너지원을 구하려면 살생이 필연적이다. 새를 나쁘게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벌레를 동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테니까. 그러나 고양이를 나쁘게 보는 사람은 좀 있을 수가 있겠다. 예쁜 새가 잡혀먹히는 것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좀 있을테니까.


나도 고양이가 새를 잡아먹는 것을 보면 불편하다. 어떤 때는 그 약육강식의 모습이 보기 싫어, 고양이가 오면 쫓아내기도 한다. 새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새 한마리는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고양이는 굶주림을 겪어야 했다. 과연 나의 행위는 선인가. 사실 고양이가 새를 잡아먹는 것은 우리 인간이 만든 선악이란 개념 밖의 행위다. 새는 고양이에게 그저 먹잇감에 불과하다. 고양이는 새와 공감을 하는 능력이 없다. 고양이는 그저 배고픔을 느끼고, 먹잇감을 찾아 나의 정원에 오고, 그리고 먹잇감인 새를 잡아먹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인간은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 공감능력(Empathy)이 그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생명의 관점에서 사물이나 사건을 볼 수 있다. 새에게 감정이입을 하여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동물과는 다르게 단순한 생존이 아닌 식탐이란 혀의 쾌락을 위해서도 살생을 서슴치않는다.  


살생 없는 삶이란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살생을 최소화하는 삶은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한 삶은 어떤 삶일까.


나의 요가모임의 멤버 중에 20대 후반인 여성이 있었다. 아쉬탕가 요가를 5년반 정도 수련하고 있는 친구였다. 고급시리즈의 고난도 아사나들을 수행하고 있었다. 어렸을때 체조를 하여, 요가에 빠른 진전을 보았을 거라 했다. 버지니아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그당시에는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위한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이는 눈이 있는 생물은 먹지 못한다고 했다. 14살때 부터. 영혜로 하여금 육식을 더이상 하지 못하게 한 그 눈. 그이는 계란과 우유는 먹는다. 그러니까 그이는 vegan 이 아닌 vegetarian 이다. 자신의 삶으로 인한 동물살생을 피하기 위한 그이의 선택이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선택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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