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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기우진 Jun 19. 2021

초기와 고전 요가

육체적에서 형이상학적까지

요가수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현재 파키스탄과 인도의 접경지역인 인두스밸리에서 4000여년 전의 청동기시대에 점토로 만들어진 도장이 여러개 발견되었는데, 한 도장에 여러 동물에 둘러싸여 있는 남자가 요가자세 비슷하게 무릎을 양쪽으로 벌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 자세가 요가자세인지 아닌지에 대한 학계의 합의는 없다. 2500여전에 부처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잠시 시도를 한 기존의 여러가지 수행법 중에 육체적 요가도 하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왕이 북부 인도에 까지 침범했을때, 이상한 자세들을 하고 있는 요기들을 목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 예로, 알렉산더를 찾아온 한 요기는 양쪽 다리를 번갈아 가며 다리 하나로만 하루종일 서 있었다고 한다. 시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있으나, 인도 북부에서 고행자들이 요가수행을 시작했다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2500여년 전부터, 요가의 의미가 육체적 수행 뿐만 아니라 윤회의 사슬과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러가지 수행 방식을 은유하기 시작하였다. 요가의 의미가 육체적에서 좀더 형이상학적이 되어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카르마 (Karma, 업)을 쌓는다. 인도 종교들에 따르면, 어떤 업을 쌓았느냐에 따라, 다음 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환생할지가 결정이 된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 다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으며 업을 쌓고, 또 다음 생으로 환생하는 것을 영원히 반복하게 된다. 헤어날 길 없는 삼사라(Samsara, 윤회)의 올가미다. 삼사라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고행자들은 여러가지 수행방식을 시도했다. 한예로, 자이나교도 (Jain)들은 쌓이는 카르마를 최소화하는 수행법을 썼다. 우리의 몸을 움직이면 불가피하게 업은 쌓인다. 그래서 자이나교도들은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취했다. 앉아서 하는 명상이 그들의 주된 수행방법이다. 대표적인 자이니교의 영적 지도자는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마하비라 (Mahavira)다. 그는 12년 동안이나 앉아서 명상을 한 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현재에도, 자이나교의 수행자들은 걸을때, 부드러운 빗자루로 땅바닥을 쓸며 걷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벌레들을 밣아 죽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식음까지 전폐하고 굶어 죽는 것을 최상의 수행이라고 여긴다.


부처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카르마를 최소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욕망으로부터 초월하고 좋은 카르마를 쌓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팔정도 수행법이 그것이다: 정견 (바르게 보기), 정사유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 (바르게 말하기), 정업 (바르게 행동하기), 정명 (바르게 생활하기), 정념 (바르게 깨어 있기), 정정진 (바르게 정진하기), 정정 (바르게 삼매하기). 이 팔정도는 순차적 단계가 아니다. 한 가지를 수행하면 다른 일곱가지도 동시에 수행하게 되는 서로 맞물려 있는 관계다. 그래서, 팔정도의 심볼은 여덟개의 살이 방사형으로 연결된 Dharma Wheel 이라 불리는 수레바퀴다. 이 팔정도를 실천하며 좋은 업을 쌓아가면 깨달음이 성취되어 쌓이고, 최상으로 열반(nirvana)에까지 이르게 되면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 방법은 탐욕과 고행이라는 우리의 삶의 두 극단에서 벗어난 중도의 수행법이라 하겠다. 일반 대중도 할 수 있는 수행법이다. 부처의 팔정도 수행법은 나중에 요가에 대한 고전을 쓴 파탄잘리에게 영향을 끼쳤다.


아르주나와 크리쉬나

2000여년 전 쯤, 요가의 형이상학적 의미에 대해 기술한 고전이 나왔다. <바거바드 기타>가 그것이다. 이 책은 인도의 고전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Mahabharata) 에서 아르주나 (Arjuna)라는 전사와 그의 전차를 모는 마부 크리쉬나 (Krishna)로 대변되는 신성 혹은 절대현인과의 대화록 부분만을 따로 떼어낸 책이다. 요가에 대한 지혜를 아르주나에게 알려주는 신 크리쉬나가 마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가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가 말을 마구로 마차에 맨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0여년 전에 인도 북부의 쿠루크쉐트라라는 지방에서 벌어진 전설적인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은 사촌들간의 싸움이었다. 형제였던 판두스(Pandus)와 두리오다나(Duryodhana) 라는 두 왕의 자식들이 양 진영의 장수가 되어 서로 싸우는 전쟁이었다. 아르주나는 판두스진영의 왕자였다. 전쟁을 앞두고, 아르주나는 고민에 휩싸인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사촌들에 대한 살생에 대해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그 전쟁을 회피하려한다. 크리쉬나는 혼돈에 빠진 아르주나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요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설파한다. 크리쉬나는 아르주나에게 그에게 주어진 권리는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밖에 없고, 행위로 인해 얻어질 열매가 동기가 되거나, 어떤 애착으로 인해 무위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말해준다. 그러면서, 요가를 언급한다. ‘행동하라, 요가에 기반을 두고, 모든 애착을 버리고 실패하든 성공하든 평정심을 잃지말라. 그 평정심이 요가다.’ 그리고, 그 유명한 잠언을 말한다; ‘요가는 행위에 있어서의 숙련이다 (Yoga is skill in action).’  


요기들이 요가에 대한 책 한권을 소지하고 있다면, 바로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일 것이다. 파탄잘리라는 현인이 썼다는 책인데, 그가 누구였는지, 언제 살았고, 언제 죽었는지,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 책이 정확히 언제 쓰여졌는지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어느 설에 의하면, 대략 기원후 2세기경이라고 하고, 다른 설에 의하면, 4세기경이라고도 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했다. 'Yogas cita vrtti nirodhah.' 직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요가란 마음의 물결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를 소멸시키려는 수행이 요가라는 말이다. 파탄잘리가 요가의 목적이라고 기술한, 마음의 물결이 소멸된 상태,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상태와 같다. 그러나 방법론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파탄잘리는 열반의 상태에 이르도록하는 수행에는 여덟가지 단계가 있다고 기술한다; 야마 (Yama, 금계, 도덕적 규칙), 니야마 (Niyama, 권계, 윤리적 삶을 통한 스스로의 정화), 아사나 (Asana, 자세, 몸의 정화), 프라나야마 (Pranayama, 호흡조절), 프라티야하라 (Pratyahara, 감각조절), 다라나 (Dharana, 집중), 디야나 (Dhyana, 명상), 사마디 (Samadhi, 깨달음). 여기에서, 야마 는 비폭력, 진실함, 모든 탐욕의 절제이고, 니야마 는 청결함, 자아만족, 검소함, 그리고 지적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음이다. 즉, 이 첫 두단계(야마 와 니야마)는 요기들이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고 자신의 삶속에서 절제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조화로움을 이루어내는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인 아사나 는 다음단계들에서 필요한 긴시간의 명상을 할 수 있도록 몸을 준비하는 단계다. 다음 단계들을 수행하려면, 몸의 자세가 편안하고 안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이 준비가 되면, 다음 두 단계 프라나야마 와 프라티야하라 를 본격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이 두 단계는 호흡과 감각을 조절하는 수행으로 마음을 집중하고 번뇌의 조절을 시작하게 되는 단계다. 이 마음의 집중과 번뇌의 조절이 심화되고 완숙해지면, 다음 단계인 집중(다라마)과 명상(디야나)의 상태를 통해 진정한 자아의 깨달음(사마디)이란 최상의 요가상태에 이르게 된다. 결국 파탄잘리가 말한 요가수행의 8단계는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덕목들과 자기수행의 방법론이다. 불교의 팔정도와 비슷하다.  파탄잘리의 요가수행법의 특이한 점은, 육체적 자세훈련(아사나)이 세번째 단계로 중요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가 현재 요기들에게 요가에 대한 고전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번뇌로부터 벗어난 깨달음이라는 해탈의 상태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과정과 그 상태가 요가다.


<바거바드 기타>와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 의하면, 우리는 욕망과 삶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요가는 우리의 삶의 패턴을 바꾸어, 우리 자아와 육체적 고통 그리고 정신적 고뇌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와 세상과 우주의 본질과 연결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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