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악기를 배우면, 악기마다 교과서가 있다. 저난도부터 고난도의 음악들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하는 교과서말이다. 나중에 커서 그 악기의 프로 연주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 예를 들면, 피아노는 체르니, 바이올린은 스즈키. 그 교과서들에서 처음 배우는 곡들은 대부분 동요들이다. 트윙클 트윙클 리틀 스타 (Twinkle twinkle little star) 같은. 나같은 어른들에게는 지루한 곡이다. 나처럼 중년이 되어서 악기를 배우는 것은, 프로가 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물론 프로연주가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여야한다. 행복해지려면. 다른 일상에서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악기를 배우며 또 스트레스를 받으려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저, 즐기려고 배우는 거다. 일상에 소소한 즐거움 하나 더하려고. 이런 경우에는, 시작부터 바로 좋아하는 대중가요로 연습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빛바랜 기억 속 한귀퉁이에서 끄집어 낸 노래를 부르면, 옛 추억도 생각난다. 동요보다는 훨씬 동기부여가 잘된다.
대부분의 대중가요의 음역은 두 옥타브 안팎이다. 그정도의 음역은 일반인들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으니까. 한 옥타브에는 열두개의 음들이 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대중가요를 악기로 연주하려면, 그 악기로 24개 안팎의 음을 낼 수 있으면 된다.
피아노는 다른 음을 내는 건반들이 퍼져있다. 한 음을 내려면, 그 음에 해당하는 건반을 누르면 된다. 24개 안팎의 음에 해당하는 건반들의 위치를 손이 기억을 하면, 피아노로 대중가요를 연주할 수가 있다. 나에겐 좀 복잡하다. 손가락이 외워야하는 건반의 위치가 너무 많다. 어떤 손가락으로 어떤 건반을 눌러야하는지를. 손가락에게만 이 임무를 부여하기에는 내 손에겐 좀 벅차다. 물론 부단한 노력을 하면 될 것이다.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내가 게으르다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에겐 트럼펫이 이상적인 악기다. 24개 안팎의 음을 내는데 손가락만이 아닌 입술도 역할을 하기때문이다. 그래서 손가락이 기억해야할 경우의 수가 대폭 줄어든다. 내 몸의 한 기관이 아닌, 두 기관이 힘을 합치니, 게을러도 익숙해지는 게 피아노보다는 훨씬 쉽다. 물론, 피아노는 그냥 건반을 치면 음이 나온다. 트럼펫은 처음엔 불어도 음이 안나온다. 입술 주위의 근육이 발달이 되어서 불었을때 입술이 떨어주고 (버징이라고 한다) 그 입술에서 나온 떨린 공기가 트럼펫 관 안에서 공명현상을 일으켜야 음이 제대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계만 지나면, 즐길만하다. 적어도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나의 연주, 아니 연습을 즐기는지는 다른 문제지만. 한달이면 이 단계를 지난다. 두달이면, 대중가요를 어색하게나마 부르기 시작한다. 60일이다. 중요한 첫 이정표가. 첫 60일만 꾸준히 하면, 이 악기는 자신의 일부가 되어간다. 아직은 어색할 수도 있지만. 석달이면, '들을만 하네' 란 말을 지인에게서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악기는 앞으로의 삶을 동반하는, 뗄레야 뗄 수가 없는 친구가 된다. 세월이 갈수록, 관계는 무르익고, 좋은 와인처럼 맛 혹은 재미는 점점 농염해질 것이다. 희망사항이다.
트럼펫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데 공명현상이 핵심이다. 이 공명현상에는 조화 진동(Harmonic vibration)이라는 간단한 물리법칙이 작동한다. 직업병이다. 이런 문제를 접하면 디테일까지 생각해서 과학적으로 이해를 해야만 하는 것이. 트럼펫에는 누르는 버튼이 3개 뿐이다. 3개의 버튼을 누르거나 안 누르거나의 경우의 조합 수는 2^3 = 8가지다. 그러니, 트럼펫으로 24개 안팎의 음들을 내려면, 한가지의 버튼 조합으로 2-4가지 정도의 다른 음을 낼 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소리는 공기의 진동현상이다. 공기가 반복적으로 압축되고 팽창되는 현상이다. 이 공기의 진동현상은 눈에는 보이지 않고 우리의 귀가 소리라는 현상으로 듣게 된다. 자연에는 여러가지 다른 형태의 진동현상들이 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진동현상은 물의 파동이다. 잔잔한 물에 돌맹이를 빠뜨리면 돌맹이가 떨어진 지점을 중심으로 동그란 형태의 물결이 생겨 퍼진다. 동그란 원에 있는 물이 같이 반복적으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며 퍼져나간다. 물결파다.
모든 진동의 특성 중에는 파장이라는 것이 있다. 물결파에서는 원점으로부터 물이 최대로 올라간 원들의 반경을 측정하면, 인접한 두 원의 반경의 차이가 그 물결파의 파장이다. 물결파가 퍼지면서 그 파장이 반복되는 것이다. 파장의 역을 주파수라 하고, 물결파의 에너지는 주파수에 비례한다.
공기의 진동현상인 소리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소리는 고유의 파장이 있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주파수가 있다. 파장이 길면 주파수가 낮고, 파장이 짧으면 주파수가 높다. 따라서, 파장이 음을 결정한다. 파장이 길면 음이 낮고, 파장이 짧으면 음이 높다.
자, 이제 트럼펫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과학적 준비가 되었다. 트럼펫의 관은 구부러져 있지만, 쭉 펴져서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관의 전체 길이가 L 이라고 하자. 그림처럼. 트럼펫에서 나오는 음은 입술에서 나온 떨리는 공기 (버징)가 트럼펫 관 안에서 공명현상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공명현상이란 입술에서 나온 떨리는 공기의 파장 ( 그림에서 lambda 로 표기됨)이 트럼펫 관 길이 L 와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될때 일어난다, L = n x (lambda /2). 여기에서 n = 1,2,3,4,5,6... 자연수다. n 은 마디 수와 같다. 공명현상은 진동의 마디의 수가 달라도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트럼펫의 비밀이다.
그림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공명진동의 마디의 수가 늘어나면, 파장은 줄어든다. 따라서 주파수는 즉 음은 높아진다. 트럼펫에서 공기가 통과하는 관의 길이 L 이 정해지면, 낼수 있는 음들이 여러개인 것이다. 이 음들을 배음이라 부른다. 자, 이제 트럼펫에 달려있는 3개의 버튼이 왜 필요한지를 살펴보자. 각각의 버튼은 다른 길이의 관에 연결되어있다. 이 버튼을 버튼 1, 버튼 2, 버튼 3으로 부른다. 버튼을 누르면 해당되는 관이 열려서, 공기가 그 관도 통과를 하게 되어 공기가 통과해야하는 전체 관의 길이 L 이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이 3개의 추과된 관의 길이의 비율은 2:1:3이다. 가장 짧은 관의 길이가 0.5음에 해당한다. 즉 이 3개의 버튼을 하나씩 누르면, 1음, 0.5음, 1.5음을 내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버튼을 동시에 한개 이상 누르면, 그만큼 추과되는 관의 길이가 길어져, 한 버튼만 누를때보다 음을 더 낮출 수가 있다. 버튼을 누르는 방식의 수는 총 7가지다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데, 첫 두 버튼을 누르면 1.5음이 낮아져서 세번째 버튼 하나를 눌렀을 때와 같은 효과를 본다. 따라서, 7가지의 경우의 수 중에서 다른 음으로 낮출 수 있는 경우의 수는 6가지다.
아무런 버튼을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 낼 수 있는 배음들을 자연배음이라한다. 트럼펫의 자연배음은, C, G, C+, E+, G+ 등이다. C와 G 사이에는 6개의 음들이 반음씩 떨어져있다: C, C# (또는 Db), D, D# (Eb), E, F, F# (Gb), G. 따라서, 3개의 버튼을 다른 조합으로 눌러서, C와 G 사이의 음들을 모두 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먼저 자연음 G를 내고, 버튼을 눌러주며 반음씩 낮추어 주면 C#까지 내려올 수가 있게 된다.
G와 C+사이에는 4개의 음들이 반음씩 떨어져 있다: G, G# (Ab), A, A# (Bb). B, C. 따라서, 7가지의 버튼의 경우의 수 중에서 4가지만 이용하면 그 두 자연음 사이를 커버할 수가 있다. 더 높은 자연음들 사이에도 똑같은 원리로 모든 음을 커버할 수가 있다.
여러 버튼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손가락의 움직임이다. 피아노와는 다르게, 트럼펫의 경우에는 한 버튼상태에서 낼 수 있는 배음들이 여러개다. 따라서 손가락이 기억해야할 경우의 수가 대폭 줄어드는 것이다. 같은 버튼상태에서, 입술의 버징을 통해 나오는 공기의 파장을 다르게 함으로써 여러 음을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손가락과 입이라는 두 기관이 일을 한다. 게을러도 익숙해지는 게 피아노보다는 훨씬 쉬운 이유다. 적어도 나에겐.
얼마나 높은 음을 낼 수 있느냐는 연주자들의 역량에 달려있다. 재즈 트럼펫 연주자로 유명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고음을 매우 잘 냈다. 그러니까, 마디수가 많은 자연음들을 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쳇 베이커는 마일스에 비해서 고음을 커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쳇 베이커의 연주는 멜로디가 매우 감미로웠다.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한지 9개월이 지난 지금, 웬만한 대중가요는 연주할 수가 있게 되었다. 아직 아름답지는 않지만, 들을만하게 흉내는 낼 수가 있다. 꾸준히 하면, 음색도 좋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