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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령 Oct 13. 2023

너와  나의  색

말이  품은  마음 5

 “야, 이기영 너, 오늘 소개팅할 때 종교 얘긴 절대 네버 꺼내지 마! 죽여 버린다.”

   “그래, 너 오늘 분위기 깨면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천국으로 보내 버린다.”

   “제발, 우리도 올 해는 여자랑 크리스마스 좀 보내자. 우리 서로 제발 그런  거룩한 날은 좀 보지 말자.”

   “기영이만 조심하면 돼. 야, 기영. 듣고 있냐.”

   “응. 듣고 있어. 다 듣고 있어. 너희들 할 말 다 했지? 내 손 잡아. 기도하자. 우리의 소개팅이 잘 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자. 도와 주 실 거야.”

   “너, 진짜 죽여 버린다.”


   진희와 친구들은 소개팅 약속 장소에 들어가기 전에 모두들 거울을 꺼내 얼굴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진희야, 너 오늘 전생 얘기하면, 이제 우리 얼굴 못 보는 거야.”

   “그래, 진희야 오늘 소개팅에서 종교 질문 좀 하지 마. 제발. 분위기 찐으로 망하는 거야.”

   “우리 이번 연말엔 제발 각자 남친 손잡고 제야의 종소리도 좀 듣자. 내가 너희들 손잡고 작년에 제야의 종소리 듣고 집에 가다가 똥 밟은 거 알지? 한 번씩 걸리던 복권 5등도 작년엔 한 번도 안 걸렸어.”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고.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야, 박진희 너 오늘 소개팅에서  확  빼버린다.”


   조명이 화려한 파스타 집에서 기영이는 친구들과 함께 소개팅 녀들을 기다리고 있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단체 소개팅이 방송된 후 요즘은 일대일 소개팅보다 세 네 명의 단체 소개팅이 유행이다. 친구 중 가장 사랑꾼이던 현우는 각고의 노력으로 운명의 짝을 찾아 최근  급격히 녹아내리고 있다. 현우는 2주 전 우리에게 진심으로 충고했다.

   “나의 부끄러운 싱글 친구들아, 진심으로 여친은 있어야 해.”

   “왜?”

   “야, 밥은 왜 먹냐? 사랑은 인류 역사적으로 볼 때 본능 적인 거야. 월요일은 원래 여친이 있어야 하고, 화요일은 여친이 없어서 화가 나니까 있어야 하고, 수요일은 여친 없는 내 모습이 쑥쑥 하니까 있어야 하고, 목요일은 못 견디게 옆구리가 시려 우니까 있어야 하고, 금요일은 불타는 금요일이니까 여친이 있어야 하고, 토요일은 주말이니까 여친이 있어야 하고, 일요일은 일주일 내내 데이트 한 번 안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여친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럼, 네가 한 번 주선해 봐라. 의리 있게.”

4명의 시선은 일제히 현우에게 쏠린다. 현우는 침을 크게 삼키고, 미소 띤 얼굴로 진짜 사귀는 단계까지 성공하면 각자 3만 원의 주선료를 자기한테 내야 한다고 했다. 현우를 뺀 27살의 남자 솔로들. 편하게 친구들과 먹는 삼겹살에 소주도 좋지만, 이젠 여자 친구와 포크 돌려가며 서양국수 파스타도 가끔은 먹고 싶은 그런 나이다. 삼만 원이면 3시간의 노동이 필요한 초록 잎 3장. 우리는 빠른 두뇌 회전으로 사랑의 확률을 생각해 봤다. 현우에게 삼만 원을 납입할 경우의 수는 얼마나 될까? 일곱 명의 솔로들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다.

   ‘설마 내가 저 자식한테 삼만 원을 낼 일이 생기겠어? 일단 준다고 하고 안 줘도 되지. 뭐. 우린 친구니까. 으흐흐’

여기저기서

   “콜, 콜, 콜, 콜.”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현우는

   ‘설마 이 중에 한 명은 되겠지. 한 명은 될 거야. 저것들 모두 27년을 살아 냈는데, 일곱 명이 다 바보일 순 없잖아. 사귀다 여자한테 까이더라도. 한 명은…. ’

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오늘.  운명의 파스타 집. 기영은 진심을 담아 친구들과 의자에 앉아 여자들이 오기 전에 염원을 담아 기도를 하고 싶다. 친구들도 구박하던 기영의 손을 식탁 밑으로 줄줄이 꼭 붙잡고 자연스레 눈을 감는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곱게 차려입은 네 명의 여인들이 맞은편에 앉는다. 8명의 솔로들은 한 번에 서로의 이름을 다 외울 수 없어서, 상대의 이름을 생략한 각자의 스타일로 대화를 이어 나가기로 하고, 어느 정도의 대화가 오고 간 후 서로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이름을 물어보자고 합의한다.

기영은 자신의 여자 친구가 될 이성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인 종교를 물어봐야 하는데, 친구들과 약속한 게 있어서 차마 공개적인 질문을 할 수가 없어 답답하다. 기영에겐 세상의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이분화되어 나뉜다. 하느님 아래에선 이 세상 모든 남자는 형제고, 여자는 자매다. 기영에게 제일 중요한 첫 번째 조건을 물을 수 없으니 모든 여성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기로 한다. 여성들의 옷 색깔, 머리카락 길이, 말투 하나하나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진 여인을 찾아내려고 기영은 초집중한다. ‘반짝’ 어깨 길이 정도의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여성의 귀걸이가 십자가 디자인이다.

기영은 이제 다른 여성들에게 향한 관심과 호감을 십자가 귀걸이를 한 여성에게만 집중시킨다. 딱히 흠잡을 만한 말이나 행동이 없고, 밝아 보이는 첫인상을 가지고 있는 무난한 아가씨다. 웃을 때 들어가는 보조개가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귀여움 폭발이다.

   ‘오케이. 합격. 사랑은 선착순이지.’

기영은 공개적으로 훅하고 공기 중으로 말을 시원스레 내뱉는다.

   “저… 초록색 옷 입으신 여성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네? 저요? 저는 박진희입니다.”

기영의 질문으로 갑자기 분위기는 남자들이 관심이 가는 이성에게 이름을 묻는 시간으로 진행  될 것같다.  4명의 남자들은 선착순 커플 미션이라도 된 듯 갑자기 맘이 급하다. 갑작스러운 사태를 수습하고자 기영이 나선다.

   “저 제가 갑자기 먼저 질문을 시작해서 사태를 수습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제 자리부터 시작해서 남자 한 명이 여자 한 분에게 성함을 물으면, 질문을 받은 여성이 맘에 드시면 대답하시고 아니다 싶으시면 ‘패스’라고 말하는 건 어떨까요?”

진희가 질문한다.

   “그렇게 하면 남자분들의 마음을 다 드러나는데, 괜찮으세요?”

기영과 친구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모두가 동의한다.

   “저는 무심코 이름을 말했지만, 대답으로 인정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호호”

진희의 귀엽고 밝은 미소는 기영의 맘에 고속질주하며 박힌다.

   “오, 주여 저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기영은 식탁아래 두 손을 모아 잠깐 눈을 감고 감사의 기도를 한다.        


   진희는 소개팅 장소로 이동 중 손목에 찬 염주를 돌리며

   ‘저의 소리를 들어주세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저와 친구들을 솔로에서 구제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며 파스타 가게로 들어선다. 친구들의 구박 속에 염주를 가방 안에 넣고 자리에 앉는다. 진희는 남자들에게 종교가 어떻게 되냐고 묻고 싶었으나,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어 기독교인 분위기가 있는 남자만 피하자고 생각한다. 진희는 음식을 앞에 두고 눈 감고, 손 모아서 기도하는 남자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8인분의 파스타와 피자가 탁자 위로 세팅된다. 싱싱한 야채와 과일이 담긴 샐러드와 크고 화려한 접시에 풍성하고 먹음직스럽게 담긴 파스타, 알록달록한 토핑과 고소한 치즈가 노랑노랑 하게 굽힌 화덕피자에 시선이 빼앗겨 진희는 자신의 앞 접시에 음식을 가져다 놓기가 바쁘다. 로제 파스타를 포크에 감아 입 속에 넣고 행복을 느끼는 그 순간 진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었다는 게 생각이 난다.

   ‘몰라. 몰라. 우와 우와 ~무 맛있다.’

진희는 자기 앞에 놓인 피자를 좀 더 편하게 먹기 위해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입 속 파스타를 오물거리며 피자를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삼각 스패치를 잡은 손목에서 잠깐 보이던 염주 같아 보이던 팔찌가 옷 속으로 들어간다. 염주 같던  물건이 빛의  속도로 사라진 한 남자의 손목에 시선이 머문 뒤 그의 팔을 따라 얼굴로 시선이 옮겨진다. 남자의 얼굴은 한눈에 반할 미남은 아니지만, 착해 보이는 호감형이다.

   '목소리도 좋은 남자네.  합격.

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묻는다.

   ‘야호, 일단 오늘은 솔로 탈출이다. 만세. 만세.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앗싸.’


   2차는 모두들 노래방으로 향한다. 커플이 된 사람끼리 같이 노래도 불러보고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다 보니 진중한 대화보다는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쿵작 쿵작 라랄라 즐겁다. 기영과 진희는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진다. 기영이는 친구들과 3차를 향해 달릴까 갈등하기도 했지만, 내일이 주일이라 게 생각이 난다. 올망 똘망한 초등학생 어린이반 선생님인 기영은 친구들과 3차를 즐기면, 다음날 숙취로 인해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괴로울 것 같아 포기한다.

   “난 그만 갈게. 내일은 일요일이야. 성당 가야 해. 혹시 내일 나랑 같이 갑자기 성당 가고 싶으면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연락 해.”

   “야, 야, 너는 아직도 우리를 포기 못 했어? 벌써 10년째 전도다. 우릴 제발 포기해. 우린 사악해.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하하하. 절대 포기 안 하지.”

   “기영아, 너는 다음에 애인 생기면 주말에 성당이야, 애인이야?”

   “여친 데리고 같이 성당 가야지. 난 종교가 다르면 안 사귀지.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함께 해야지.

   “미친놈. 조심해서 가.”

   “응. 너희들도 조심히 들어가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기영은 감사의 찬송가가 콧노래로 흥얼거려진다.  27살 인생에 기영은 사랑을 몇 번 해 봤다. 고등학교가 종교 재단이라서 재학생들 모두가 천주교 신자라고 생각했었다. 기영은 열린 마음으로 학교 안 자매들에게 친절했다. 특별히 더 친절하고 싶었던 자매가 있었고, 그녀와 같이 성당에 가는 상상도 하며 천국과 학교가 동일시되어 즐겁게 학교에 다녔다. 그 자매는 사귀고 보니 무신론자였다.

   “무신론 자면서 왜 우리 학교에 다녀?”

   “기영아, 종교랑 학교는 상관없지. 집이랑 가까워서 지원한 거야. 우리나라는 개인의 종교가 보장되는 나라야. 학교도 마찬가지고.”

   “그럼, 나랑 같이 성당 다닐래?”

   “아니, 귀찮아.”

기영은 일요일에 성당에 가는 게 귀찮다는 여자 친구의 말이 서운했다. 자신의 종교가 거절당한 기분은 기영 자신이 거절당한 느낌이었고, 그 아이에 대한 뜨거운 감정을 서서히 사라지게 했다.


  진희는 음식 냄새에 잠이 깬다. 오늘은 친할아버지의 기일이다. 침대에서 서둘러 일어난다. 엄마와 언니는 싱크대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아버지도 제기를 닦고 계신다.

   “엄마, 나도 깨우지.”

   “이것만 볶고 깨우려고 했는데, 마침 일어났네.”

   “뭐 할까? 고구마 씻을까?”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세요. 언니, 수고 많으시죠? 저희 왔어요.”

   “오셨어요. 고모.”

   “그래, 잘들 지냈지? 언니, 저 뭐 할까요?”

아버지와 고모부가 나란히 앉아 켜진 향 위로 술잔을 왼쪽으로 돌려 할아버지의 제사상에 올려놓는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제사다. 장남인 진희의 아버지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의 기일을 지내신다. 제사를 정성으로 모시는 부모님은 조상을 잘 모셔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신다. 제사가 끝나고 준비한 음식들을 정리해서 식탁에 둘러앉는다.

   “오빠, 이 사람 내년에 홍콩 지점으로  발령 났어요. 이제 부모님 기일에 같이 절 할 사람이 없는데… 허전해서 어떡해요? 오빠 큰 딸은 아직 결혼 소식 없어요?”

   “만나는 사람은 있는데, 결혼까진 잘 모르겠다.”

   “막내 진희는요?”

   “진희는 아직 사귀는 사람도 없지. 하하.”

   “오빠 집에 아들이 있어야 하는데, 어쩜 이렇게 아들 복이 없는지.”

   “어허, 너는 올케 언니를 앞에 두고 그게 할 소리냐? 넌 다 큰 아들 군대 보내고도 철이 안 들어서 큰일이다. 나이를 어디로 먹는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오빠는 맨 날 나만 구박하네.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하는 말인데.”

   “다 때가 있고 자식도 정해진 운명이다. 밥이나 먹어라. 여보, 얘 음식 아무것도 싸주지 마.”

   “오빠, 왜 그래요? 언니 나물 좀 싸줘요. 남편이 언니 나물 잘 먹어요.”

   “알았어요. 고모. 많이 넣어 드릴게요.호호.

엄마를 늘 아껴주시는 아버지를 진희는 좋아한다. 돌아가신 할머니도 가끔 집안에 대가 끊긴다며 푸념을 하셨는데, 그때마다 아빠는 친할머니께,

   “어머니, 제가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이 사람 집안엔 남자들이 많잖아요. 처제들도 다 아들만 낳았고요.”

그러면 할머니께서는 더는 말씀을 못 하셨다.

그래도 진희는 아버지와 나란히 제사 때 절을 할 수 있는 형부가 생기고, 자신도 그런 남편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진희는 어제 소개받은 기영이 생각나서 자신의 휴대폰을 괜히 열어본다. 부재중 전화도 메시지도 없다. 진희는 밥을 힘주어 비벼 먹는다.


   기영은 동료와 점심을 먹기 위해 나온 거리를 둘러본다.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주변이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다. 건물들은 반짝이는 색 전구들이 달려있고, 크리스마스 특별 할인이라는 문구가 여기저기 붙어있다. 며칠 전 같이 소개팅한 친구들과 하는 단체 채팅 방이 요란스럽다. 점심을 먹으며 잠깐 열어본 채팅 방엔 연말을 결코 혼자 보낼 수 없다는 늑대들의 절규와 소망이 간절하다. 기영은 저장해 둔 진희의 번호를 검색한다.

   “안녕하세요. 이기영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 시간 어떠세요?”

라고 글자를 입력 해 놓고 전송버튼을 누르지 않고 휴대폰을 그대로 닫는다. 몇번이나 반복되는 행동. 기영은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면 '막연한 기다림'이 시작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진희의 감정에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기다림은 가슴 뛰는 설렘보다 초조함이 앞선다. 또다시 휴대폰을 열어 잠금 모드를 해제하고, 진희에게 망설이던 문자를 전송한다.    

    ‘뜨악, 보냈다. 보냈어.’


    진희는 친구들의 채팅 방에서 할 말이 없다. 애프터 신청받은 애들은 이러쿵저러쿵 할 말이 많다.

   "무슨 옷을 입을까?부터 시작해서 뭘 먹을까? 왕 뽕 브라 캡을 사야겠다고 하고, 키스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까?"

 까지 채팅 방이 불난 호떡집이다. 진희는 기영의 전화번호를 검색한다.

   ‘먼저 연락하면 좀 그런데. 오늘까지만 기다려 보자.’

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유난히 점심시간도 길고 하루가 느리다. 휴대폰 진동이 느껴진다. 메시지가 왔다. 빛의 속도로 잠금 모드를 해제한다. 화장품 할인 행사 광고다. 신고하기 버튼과 나가기 차단 버튼까지 깔끔하게 누른다. 진희는 괜히 화장실에 가고 싶다. 화장실에서 단정한 머리를 괜히 한 번 더 정리한 후 휴게실에 들러 커피를 한 잔 내려 자리로 돌아온다. 업무 지시가 전달되어 처리할 일이 갑자기 많아진다. 몇 시간이 그냥 지나간다. 진희는 휴대폰을 열어 본다. 웃음이 나온다. 기영에게 연락이 와 있다.


   기영과 만나기로 한 태국음식점은 인테리어가 화려하다. 동남아 특유의 색채감이 느껴지는 감각적인 타일이 예쁘다. 직원의 안내로 2층으로 올라와 앉은 기영과 진희는 메뉴판을 살핀다. 기영이 묻는다.

   “뭐 먹을까요?”

   “어... 2인 세트가 저렴한 것 같으니까 이거 먹어요. 우리 부담 없이 더치 해요.”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안 그러셔도 돼요. 우리 아직 그런 사이도 아닌데, 오늘은 더치가 좋을 것 같아요.”

   “하하. 그럼 2인 세트 먹을게요.”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정말로 어색하다. 진희는 태국의 인구 95프로가 불교 신자라는 사실이 생각이 난다.

   “기영 씨는 태국 여행 가보셨어요?”

   “아니요. 진희 씨는요?”

   “전 가족들이랑 한 번 다녀왔는데, 어릴 때 다녀와서 기억이 잘 안 나죠. 그런데 태국 국민의 95프로가 불교래요.”
    “그래요? 그럼 기독교나 천주교는요?”

   “1프로요.”

   “아.. 너무 낮네요. 진희 씨는 종교가 뭐예요?”

   “전 불교예요. 저희 가족들 모두 불교고요. 모태 종교예요.”

기영은 콜라를 찾아 마신다.

   “기영 씨는요?”

   “전, 천주교입니다. 가족 모두 천주교로 저 역시 모태신앙입니다.”

진희도 콜라를 마신다. 음식이 식탁 위로 올려지고, 기영이 조용하고 짧게 기도하는 모습을 진희가 바라본다.

   “벌써 끝났어요? 생각보다 엄청 짧네요.”

   “네, 종교가 다른 분과 식사  할  땐  기도를  짧게  합니다.  식사 때마다 하는 감사기도를 오래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기도하는 상대를 두고 그분들도 먼저 드시지  않으셔서요. 하하.

   “아, 네. 그렇긴 하네요. 이건 모닝글로리라는 야채 요리 고요. 공심채 볶음이라고도 불러요. 줄기에 난 구멍 때문에 볶아도 아삭하니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짭조름하고 매콤하니 맛있네요.”

   “네, 동남아에선 가장 싼 메뉴지만, 한국에선 메인 메뉴랑 가격이 비슷하죠. 호호”

   “태국음식에 대해 잘 아시네요.”

   “아니에요. 기영 씨랑 여기 온다고 해서 잠깐 검색해 봤어요. 잘 몰라요. 천주교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기도 할 때 여자들이 쓰는 미사포는 예뻐 보였어요.”

   “아, 그거요. 여자들만 쓰죠. 기도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쓴다는 말도 있고, 머리카락이 성적 욕망을 나타내기 때문에 히잡같이 예전부터 썼다는 말도 있어요. 미사포나 결혼식 때 신부가 쓰는 면사포도 같은 맥락이에요.”

   “진짜요? 웨딩드레스의 면사포와 미사포가 같은 맥락인지는 몰랐어요. 재미있네요. 곧 성탄절이 다가오니 종교 활동으로 많이 바쁘시겠어요?”

   “네, 좀 바쁘죠. 불교도 석가탄신일엔 바쁘죠?”

   “그렇죠. 특별히 의미가 있는 날이니까요.”


  진희는 기영과의 두 번째 만남 후 친구들의 채팅 방에 글을 올린다.

   - 내 소개팅 남 천주교래.

   - 넌, 불교잖아. 그래서 다시 안 보기로 했어? 사귀면 안 되는 거야?

   - 종교가 다르면 좀 힘들지 않을까?

   - 기독교는 몰라도 천주교는 불교랑 괜찮아. 텔레비전에 스님이랑 신부님이랑 친하던데? 너희 둘도 친하게 지내. 너흰 더 친할 수 있겠다. 스님이랑 신부님은 둘 다 남자고 각자의 신과 결혼했지만, 너흰 스님도 신부님 아니니까 결혼도 해도 돼. 너무 심각하게 걱정하지 마.

   - 그래, 사랑하게 되면 종교가 바뀔 수도 있지. 너무 괜찮은 사람이라면 아깝잖아.    

   - 일단은 만나봐. 진희야, 사람 인연은 모르는 거다. 만나보고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면 되지.

  - 나는 일단 기영 씨, 키가 커서 좋아. 나는 나랑 종교가 다른 것보다 키 작은 남자가 더 싫어.

   - 야, 너도 작잖아.

   - 그러니까, 한 명이라도 커야 내 자식이 키가 클 가망성이 있잖아. 얼굴은 수술로 해결해도, 키는 아직 현대 과학으로 방법이 없어. 뼈가 고무줄도 아니고 말이야.

   - 푸하하. 너 진짜 웃김.

   - 그래서 너, 그날 키 제일 큰 남자로 선택한 거야? 지지배.

진희는 기영과 종교가 다르다는 사실이 너무 큰 사건처럼 느껴져서 친구들과 하는 채팅 방에 메시지를 올렸는데, 돌아오는 친구들의 반응이 예상보다 가벼워서 놀랬다.  진희의 친구들은 대부분이 무신론자다. 진희는 친구들의 메시지를 보며

   ‘종교 밖에서 종교를 보는 시선은 이토록 가벼울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기영의 카톡 프사를 구경해 본다. 특별할 것 없는 사진들. 그가 말하지 않았으면 천주교 신자인지 몰랐을 법한 꽃, 바다. 하늘, 가족들의 사진이다. 진희 프사에도 가득한 꽃, 바다, 하늘, 가족의 평범한  이미들 이다.


   기영은 커피를 마시며 회사 담벼락에 핀 나팔꽃을 바라본다.

   '모닝글로리. 이곳에 원래 나팔꽃이 이렇게 펴 있었던가? 나팔꽃의 꽃말은 기쁜 소식 이라는데.'

 회사  담벼락에 핀 모닝그로리를  보고  있으니 진희와 먹은 태국음식, 공심채볶음이라는 짭조름하고 아삭했던 중독성 있던 음식의 맛, 그녀의 종교는 불교, 진희의 환한 웃음등이 생각난다.

   “이주임, 뭐 해?”

   “네, 나팔꽃을 보고 있습니다."

   " 오호~,  올 해 모닝글로리는  유난히 탐스럽네."

   "저 선배님, 만약 종교가 다른 여자와 사귀어도 될까요?”

   “그럼, 안 돼? 나는 결혼도 했는데.”

   “네? 형수님이랑 종교가 달라요?”

   “어, 나는 무신론자고 와이프는 기독교야. 그것도 모태신앙. 장모님께서 권사님셔.”

   “그럼, 지금은 선배님도 교회 다니세요?”

   “아니, 와이프만 가끔 교회에 가지. 처음엔 좀 힘들었는데, 와이프가 양보 한 거지. 어쩌겠어. 나는 교회 다니기 싫더라고. 인생이 다 그래. 다 사람 마음인 거지. 만나봐. 인연이면 결혼하는 거고 아님 어쩔 수 없고. 그 아가씨 종교가 뭐야?”

   “불교요.”

   “너는?”

   “천주교요.”

   “마음에 들면, 일단 몇 번 더 만나 봐. 나중에 후회 말고.”

기영의 휴대폰에 알림이 울린다.

   “바빠요? 우리 토요일에 커피 한 잔 할까요?”

진희다. 기영은 바로 답장을 보낸다.

   “네, 마셔요. 나팔꽃의 꽃말이 기쁜 소식이래요. 저는 달달한 캐러멜 마키아또 좋아합니다.”


   진희는 오랜만에 지수를 만나 쇼핑을 한다.

   “진희야, 나 어때?”

   “응, 잘 어울려. 좀 전에 입었던 검은색 보다 갈색이 나은 것 같아.”

   “너도 열심히 입어 봐. 너도 옷 사러 나온 거잖아.”

친구 지수는 주말에 남자친구와 동해로 1박 2일 바다 여행을 간다. 아름다운 겨울 바다를 보러 간다며 들떠서 방긋방긋 미소가 얼굴에 한가득이다. 진희도 옷을 몇 개 골라 피팅룸에서 갈아입고 나온다. 진희는 옷을 새로 살 때마다 결정이  쉽지  않다. 옷은 너무 다양해서 도대체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옷의 종류가 많아서 어렵기도 하지만, 하나의 옷을 선택할 때 미리 생각해봐야 하는 조건도 다양하다. 우선은 옷과 자신의 몸이 맞아야 하고, 가격도 적당해야 하며, 집에 자신이 가진 옷들과의 조합도 생각해 효율성도 따져 봐야 한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고른 옷을 사서 종이가방에 담아 지수와 나온다. 오랜만에 만난 지수는 남자 친구 이야기로 행복해한다.

   “진희야, 너는 사귀는 사람 없어?”

   “없어. 만나 볼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는데, 종교가 달라서 고민이야.”

   “그 남자 종교가 뭔데?”

   “천주교. 성당 다녀. 모태종교래.”

   “그럼, 오케이. 이해 안 되는 종교도 아니네. 너는 불교지. 너도 모태종교라고 하지 않았어?”

   “응, 엄마랑 아빠도 불교시지. 나는 뱃속에서부터 절에 다녔어.”

   “그런데, 진희야, 한두 번 입고 버리는 옷이나 한 계절을 입거나 아님 몇 년을 입는 옷도 선택하려면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평생 믿고 의지한다는 종교는 왜 이것저것 따져 보지 않고 부모님의 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니? 불교가 진짜 네가 원하고 너에게 맞는 종교야?”

   “글쎄,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 본 적이 없어. 다른 종교를 궁금해 본 적도 없고.”

   “내가 읽은 어느 책에 지금은 책 제목도 생각이 안 나는데, 인도 힌두교 어느 신은 자신이눈을 한 번 깜빡이는 시간이 지구 같은 별이 하나 생겼다 사라지는 시간이래. 스케일이 장난 아니지? 인도 신 스케일은 어마 무시 상상초월이지?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렇지? 그래도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신화와 신적 존재를 믿고 따르는 너도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는 데, 무신론자인 나는 어떻겠니? 나는 신적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야. 대신 나는 돈을 믿어. 배고프면 음식을 사고, 아프면 병원 가서 치료받고, 옷을 사고, 집을 사고, 나의 삶이  안전하게 존재하고 현실화하는 데 꼭 필요한 건 돈이야. 신은 너의 믿음이 만든 관념이잖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때문에 눈에 보이고 존재하는 대상의 소중함을 지우는 건 너무 슬픈 일 아닐까? 종교도 너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해. 나의 입장은 그래.”

   “불교는 내 삶의 뿌리와도 같아. 나의 이성과 양심을 이루는 뿌리 말이야.”

   “그럼, 네가 만나고 싶은 사람의 종교가 다르다면 넌 당장 불교를 버려야 하는 거니?”

   “그런 건 아니지.”

   “그럼, 된 거지. 옷을 고르거나 음식을 선택할 때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잖아. 새 옷을 샀다고 헌 옷을 당장 버리지도 않아. 인간관계는 더 시간이 필요하지. 결정을 위한 시간이 좀 더 길게 걸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일단 마음에 들면 만나 봐. 만나다 보면 헤어질 수도 있고, 그 사람 만나는 동안 부처님이랑 좀 안 친하게 지내더라도 이해해 주실 거야. 긴 시간 부처님이랑 친했잖아. 그리고 부처님 입장에선 그 사람이랑 사귀면서 네가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이 완전 껌일걸? 신은 죽지 않으니 얼마나 시간이 길겠니? 그리고 부처님을 사랑하는 여자들이 많아서 너 하나쯤 잠깐 바람 펴도 몰라. 하하하.”

   “야, 너 완전 괴변이지만, 영 틀린 말은 또 아닌 것 같다. 근데 웃기긴 하다.”

진희는 지수와의 만남이 좋다. 지수는 복잡한 상황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는 그 녀만의 괴변 노하우가 있다. 너무 대책 없는 기준도 아니라 납득이 가는 경우가 많다.

   “지수야, 네 남자친구는 종교가 뭐니?”

   “교회 다녀.”

   “뭐? 그럼 너 기독교인 할 거야? 교회 다닐 거야?”

   “몰라. 아직 결정 안 했어. 나도 마지막 선택을 위한 시간을 아직 지나고 있는 중이지. 급 할 건 없어. 속도위반으로 애가 생긴 것도 아니고. 낼 당장 결혼해야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니까. 호호호.”

   “여행 잘 다녀와. 예쁜 사진 보내주고. 좋은 곳도 공유하고. 즐겁게 잘 다녀와.”

   “응, 겨울바다랑 갈매기 잘 있는지 보고 올게.”

지수와 이야기하면서 마음속 무거움을 좀 덜어 냈더니, 한 결 마음이 가볍다. 아직 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 지수의 말처럼 종교가 달라도 생각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진희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답 없는 걱정을 잠시 내려놓기로 한다.  


   “여보세요. 진희 씨? 예요. 이기영.”

   “네. 기영 씨 무슨 일 있으세요?”

   “저기, 다른 게 아니고요. 그때 소개팅 같이 했던 친구들이 다 같이 한 번 보자고 하는데. 소식 들으셨어요?”

   “아니요, 알림이 여러 번 오던데, 회사에 일이 많아 아직 보지 못했어요. 이제 확인해 보려고요.”

   “아, 네. 진희 씨랑 선약이 되어 있는 날이랑 모임 날짜가 겹쳐서 진희씨 의견을 물어보려고 급한 마음에 전화드렸어요. 원래 계획대로 따로 볼까요. 아님 같이 볼까요? 전 진희 씨 편한 대로 할게요.”

   “잠깐만요. 채팅 방 확인 좀 해 볼게요. 아, 빠지기가 곤란하게 친구들이 톡을 올렸네요. 같이 만나야겠어요. 우선 같이 만났다가 상황 보고 조절해도 될 것 같아요.”

   “네. 그럼 저도 참석으로 채팅 방에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낮출까요? 동갑인데. 어떠세요?”

   “그래요. 그럼. 그 날 봐. 기영아. 호호”

   “응, 하하하. 훨씬 편하네. 토요일에 보자. 끊을게.”

기영은 전화를 끊고 진희의 카톡 프사 사진을 넘겨본다. 실물이 더 예쁘다는 생각을 한다.


   토요일 저녁 맥주잔에 가득한 하얀 거품은 볼록하고, 가게 안은 시끌벅적 소란스럽다. 맥주잔이 비워지고 채워지고를 반복할수록 서로가 편해진 8명의 남자와 여자들은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웃음소리도 잦아진다.

   “자, 자, 우리 이쯤에서 진실 게임 한 번 해야지? 어때”

여자들은 조용히 웃고 남자들은 탁자를 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누구 먼저 할까? 지금 맥주잔에 맥주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사람기준으로 돌아가자. 어때?”

   “콜. 콜. 콜.”

   “정은아, 너 나랑 사귈 거니?”

   “우~~~~. 대답해. 대답해.”

   “그래, 가보자. 한 번.”

   “와~~~.”

분위기는 대학 엠티로 돌아 간 듯 화기애애하다. 그중 선규가 평소와 달리 술을 많이 마시는 듯해서 기영이와 친구들이 실수할 것 같다며, 이제 그만 마시라고 선규에게 얘기한다. 그런 선규에게 진실게임 순서가 돌아온다.

   “얘들아, 내가 용기가 없어서 말을 못 할 까봐 술을 좀 많이 마셨어. 이해해 줘. 나 딱 한 번만 말할게. 진희야, 너 기영이랑 사귈 거니? 종교가 다른데? 나는 너랑 사귀면 불교 믿을게. 난 진희가 손잡고 절에 다니자고 하면 갈 거야. 가서 시주도 하고 향도 켜고 108배도 천배도 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기영인 진희를 쳐다본다. 진희는 선규와 기영을 번가라 쳐다본다. 기영은 선규를 향해 말한다.

   “선규야, 술 많이 마셨네. 농담이지? 집에 데려다줄까? 택시 불러줘?”

   “야, 야, 나 진심이야. 진심이라고. 나 그날 소개팅하는 첫 날부터 진희 딱 찍었다고. 난 종교 없어. 여자 친구가 믿는 거 그냥 따라 믿을 거야. 얼마나 좋냐. 깔끔하게. 진희야, 어때?”

   “선규야, 진희는 나랑 벌써 사귀고 있어. 인마. 그만해. 친구들 앞에서 부끄럽잖아.”

기영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진희를 바라본다.

   “진희야, 너도 대답해. 우리 3일 차잖아? 부끄러워할 거 없어.”

기영은 이판사판이라는 마음에 아무 말이나 막 나왔다. 예쁜 미소의 진희를 빼 길 판에 이것저것 생각할 틈이 없다.

   “응. 미안해. 선규야. 나 기영이랑 사귀어.”

진희는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고백을 받게 될지 몰랐다. 선규는 호프집을 나갔고, 기영을 포함한 몇몇 남자들이 선규를 따라 나갔다. 진희는 기영이 나간 출입문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잠시 후 나갔던 남자들이 돌아오고 기영도 진희의 맞은편으로 다시 자리를 잡고 앉는다. 기영은 맥주잔을 빠르게 비운다.

   ‘큰일이네. 엄청 쪽팔리네. 선규 이 녀석. 그런 폭탄 발언을 예고도 없이 하고.’

기영은 진희에게 시선을 옮겼다. 진희는 웃고 있다.

   ‘저, 미소. 저 미소를 좀 더 보고 싶었다.’

기영은 진희를 마주 보며 빨게 진 얼굴로 쑥스럽게 따라 웃는다.


   기영은 일요일 미사를 마치고, 진희와 약속된 장소로 급히 나간다. 어제 너무 경황없이 상황을 몰고 가서 진희를 만나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급히 연락해 잡은 약속이다. 진희와 카페에서 가깝게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은 너무 어색할 것 같아서, 실내 식물원에서 보자고 했다. 카페 의자에 앉아 시선을 마주한 진희에게 까이는 건 전쟁터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싱그러운 초록 식물이 가득하고, 각자 앞을 보며 걸으면서, 거절할지도 모르는 진희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다. 실내 식물원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미리 준비한 우산 같은 든든함이 있다. 기영은 입장권을 구매한 후 진희와 식물원 앞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하나씩 주문한다. “입구”라고 적혀있는 화살표 방향을 따라 둘은 나란히 천천히 걷는다. 식물원 밖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내어놓고 다시 풍성해질 시간을 기다리는 겨울을 이겨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겨울의 차가움과 세찬 바람이 머물지 않는다. 모든 식물들이 푸르고 풍성하다. 기영은 자신과 나란히 발맞춰 걷는 진희의 하얀 운동화를 내려다보며 말을 한다.  

   “어제 많이 놀랐지? 너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내 맘대로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가서 미안해.”

진희는 자신의 발걸음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걷는 기영의 갈색 스니커즈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너 때문이 아니라 선규 때문에 많이 놀랐어. 그런데 너 내가 불교라는 거 알지?”

   “응, 알아. 너도 내가 천주교라는 거 알잖아.”

   “우리 괜찮을까?”

   “나는 아직은 괜찮고, 앞으로도 괜찮을 것 같아. 나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 하느님께 의지한 거야. 내가 너로 인해 더 행복하다면 너에게 갈 거야. 너의 부처님이 아니라 너에게 말이야. 너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내가 꼭 하느님을 저버려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너는 어때?”

   “나도 그래.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하게 된다고 부처님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 너랑 좀 더 자주 걷고 싶어.”


   “출구”라는 푯말이 보인다. 실내 정원을 나오니 추운 한기가 느껴진다. 실내가 따뜻해 열어놓았던 진희의 코트 단추를 기영이 두 손으로 여민다.

   “진희야, 나로 인해 너의 겨울이 따뜻하고 앞으로 다가올 모든 계절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면 좋겠어. 우린 믿음의 대상이 다른 거지, 서로의 종교가 윤리적으로 틀린 건 아니잖아.”

   “맞아. 모든 색깔이 같을 순 없지만, 모든 색깔이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지. 너와 나의 색이 다르지만, 서로 잘 어울리는 색일 수도 있어.”


진희는 휴대폰 프로필 사진을 바꾸고 있다. 석가탄신일에 기영과 함께 소원을 적어 매단 노란색 연등 사진을 자신의 프로필 사진으로 정한다.

기영은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본다. 미사포를 쓴 진희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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