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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령 Oct 12. 2023

세하마음

말이  품은  마음 4

.   “우리 세하 아직 출근 전?”

   “응, 거의 다 왔어. 자긴?”

   “난, 출근해서 모닝커피 마시고 있지.”

진규는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9시 17분. 세하는 어제 보다 출근이 5분 늦다. 손목을 천천히 둥글게 움직이며 컵 안에든 까만 커피를 무심히 바라본다.

   “야, 멍하니 뭐 하냐? 낼 동기회 정기모임인 거 알지?”

   “어. 왔어. 알지. 그런데 내일은 새로 사귄 여자 친구랑 30일 되는 날이라서 동기회에 갈까 말까 고민 중이야.”

   “벌써 30일? 간단하게 해. 거창하게 하긴 사귄 기간이 좀 짧잖아. 이제 시작인데. 설마 낼 모임에 빠질 건 아니지? 여자 친구랑은 주말에 보자고 해. 그 정도는 괜찮아, 인마. 이 형이 된다면 되는 거야. 너 빠지면 죽는다.”

   “알았어.”

진규는 빠지겠다는 말을 못 한다. 세하와 내일 선약을 해 놓았는데, 어떻게 말을 꺼낼지 걱정이다. 점심으로 팀원들과 부대찌개 식당에 왔다. 넓은 냄비에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신입사원이 라면사리를 넣자고 해서 진규는 고개를 끄덕인다. 진규는 부대찌개에 라면 사리를 넣으면 국물 맛이 탁해져서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사리를 넣는다면 당면사리를 넣는 편이다. 그러나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먹는다.

   “조 주임님, 이 집 부대찌개 맛있죠?”

   “어. 맛이 괜찮네.”

진규는 콜라를 한 목음 마신다.


   세하는 진규의 전화를 끊고,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9시 17분.

   ‘어제보다 5분 늦게 전화가 왔네. 내일이 만난 지 30일이구나.’

세하는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 달력에 핑크색 형광펜으로 가득 칠해놓은 날짜 칸을 바라본다.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무슨 날인데 이렇게 표시를 확실하게 해 뒀냐고 물었지만, 세하는 웃기만 했다.

   “세하야, 그 남자 하곤 잘 돼 가?”

동기 은정이가 김밥과 떡볶이를 먹으며 묻는다.

   “아직은, 어, 잠깐만.”

세하는 휴대폰을 열어 진규가 보낸 부대찌개 사진을 본다. 맞은편에 안은 사람의 넥타이가 조금 찍혀있다.

   ‘남자랑 먹었네. 여자 동료는 없었구나. 여자와 함께 먹었다면 여사원이 맞은편에 앉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잠시 한다.

   “세하야, 뭔데?”

   “응, 남자친구가 점심때 부대찌개 먹었다고 사진 보냈어.”

   “뭘 그런 것까지 사진을 보내니? 매일 먹는 밥인데, 시작하는 연인들 티 내는구나. 먹던 김밥이 목에 걸리려고 함.”

   “은정아, 심통 부리지 말고 어묵 국물 마셔. 너 그런 소리하면 오래된 연인 티나.”

   “야, 정세하. 진짜.”

   “은정아, 너희 사귄 지 몇 년째야?”

   “이제 1년 좀 넘었나? 1년 지나고부터는 날짜도 잘 안 세지. 우리가 무슨 십 대 교복 사랑 아니고, 늙어서 만났으니 서로 좀 편하게 만나야지. 내가 연애 좀 해 봤잖아. 목줄 팽팽히 단단하게 쥔다고 안 떠나는 거 아니야. 새로운 여자 생기면 끊고 가더라. 한방에 끊는 놈이 나은지, 천천히 끊는 놈이 나은지가 중요하지 않더라고. 두 가지 다 기분 더럽고 쌍 욕 나오더라.”

   “잘 사귀어 봐. 남자 친구 기분도 잘 맞춰주고. 이제 우리도 삼십 대가 눈에서 콘택트렌즈 거리만큼 가깝잖아. 남자 삼십이랑 여자 삼십은 결이 다르지. 수컷들은 삼십 이면 아직 꽃띠지. 하하”

은정이의 푸념 섞인 설교에 세하는 자신의 나이가 새삼스레 많다는 생각이 든다. 세하는 먹고 있던 김밥과 떡볶이 그릇의 깨끗한 부분을 찾아 찍어서 진규에게 전송한다.

   ‘맛점 해~♡♡’

에서 다시

   ‘맛점 해 ~ ^^’

으로 바꾼다.


   진규는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방을 왔다 갔다 한다.

   ‘세하에게 전화해야 할 시간인데, 낼 약속을 미루자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자기 아직 퇴근 안 했어? 오늘 야근이야?”

   “아니, 안 그래도 막 전화 하려고 했어. 세하야, 미안한데 낼 우리 약속 미뤄도 될까? 내가 깜빡 잊었는데, 내일이 동기회 정기 모임이야.”

   “매달 모이는 동기회면, 내일은 30일 기념일이라고 말하고 빠져도 될 것 같은데?”

   “응, 그렇긴 한데, 내가 그런 말을 잘 못해. 거절하는 말이 너무 힘들어. 아니면 동기회 갔다가 밥만 먹고 나올게. 살짝 도망 나오면 돼.”

   “자기, 도망은 나올  있겠어?”

   “….”

   “그냥, 주말에 만나.”

   “어. 고마워. 그런데 세하야, 화난 건 아니지?”

   “아니야, 괜찮아. 내일은 맘 편하게 놀고 주말에 봐. 있잖아… 진규야, 물어보기 좀 그렇긴 한데, 동기 중에 여자도 있어?”

   “응, 모임 하는 애들 10명 중에 3명은 여자야. 왜?”

   “그냥. 잘 자고 낼 다시 통화해.”

   “응. 낼 전화하자.”


   세하는 진규와 전화 통화를 끝내고 시간을 확인한다. 9시. 어제와 같은 시간이라는 생각을 한 후 회사 동기 은정이 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세하야, 왜?”

   “자니? 통화가능 해?”

   “어. 안 자. 얘기해.”

   “은정아 회사에서 여자 동기랑 사귈 수도 있지?”

   “당연하지. 전쟁 중에도 남녀는 사귈 수 있어. 아기도  낳지. 둘러서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뭐가 문제야? 뭐가 궁금한데?”

   “문제는 아니고, 새로 사귄 남친이 낼 동기회가 있는데, 여자 동기 3명도 있다고 해서 신경이  좀 쓰여. 술 먹으면 어떤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새로 만나는 남친 음주 스타일이 개가 될 때까지 먹는 스타일이야? 술  들어가면  막 네 발로 길거리를 기어 다니고 아무 데나 오줌 싸고 모르는 사람한테 막 짖고 싸우고  그래?”

   “야, 장난치지 말고. 난 심각해.”

   “세하야, 너도 생각을 좀 해봐라. 아무리 술에 취하더라도 동기랑 막 안자. 회사에 망신스러워서 어떻게 다니겠어? 남자보다 여자가 더 조심할걸? 예전에 사귀었을 수는 있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너도 어쩔 수 없지. 너 만나기 전 일 이니까. 너 그렇게 안 보이던데  좀 예민하구나? 정 불안하면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동기회 사람들이랑 안면 트고 지내. 너의 존재를 알리는 거야. 아이고, 우리  세하 드디어 눈 뒤집어지는 사랑이 시작되었네. 축하해. 원래 사랑이 그래. 힘들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이제 마음이 좀 시원 해 지니? 잠잘 수 있겠어.”

   “응, 낼 출근해서 보자. 고마워.”

   “그래, 내일 모닝커피 사. 낼 봐.”

세하는 은정과 전화를 끊고도 마음이 시원해지지 않는다. 몇 마디 말로 시원해질 마음이었다면 굳지 은정이 에게 전화할 필요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진규의 동기회가 있는 오늘, 계속 진규의 모임에 신경이 쓰이는 세하는 퇴근 후 침대에 앉아 옷을 갈아입지도 씻지도 않고 있다.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진규와의 채팅 방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다.

   “자기야, 동기 모임 1차 끝났어? 재미있어?”

세하는 자신의 메시지에 ‘1’이 사라지길 기다린다. 사라졌다.

   “늘 그렇지 뭐. 세하는 뭐 해?”

   “오늘 다른 곳에 잠깐 갔다가 이제 집에 들어가고 있어.”

   “그래? 나는 맥스 타워 근처에 있어.”

   “진짜? 가까운 거리네. 나는 좌동 시장 근처. 내가 그리로 갈까?”

   “어색하지 않겠어?”

   “아니, 괜찮아. 잠깐 인사만 하고 오지 뭐.”

   “인사만 할 건데 뭐 하러 힘들게 와. 다음에 정식으로 같이 오자. 조심해서 들어가고 집에 도착하면 톡 해.”

   “어…. 그래. 자기도 술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자기 전에 다시 연락할게.”

세하는 휴대폰을 침대 이불 위로 던진다.

   ‘뭔가 숨기는 게 있어. 들키고 싶지 않은 게 있는 거야.’

세하는 외투를 벗어 침대 위를 몇 번 쳐댄다. 밤 11시 30분. 세하는 아직도 외출복 그 상태 그대로다. 씻지도 않고, 밥을 챙겨 먹지도 않고 있다. 휴대폰을 찾아 지문을 인식을 시켜 대기화면을 해제시킨다. 몇 시간 전 진규와 했던 채팅창을 열어 메서지를 보낸다.

   “어디야? 집에 들어갔어? 나는 이제 씻고 자려고. 아, 피곤해.”

또다시 숫자‘1’이 사라지길 기다린다. 사라지지 않는 숫자‘1’. 세하는 입술 껍질을 손톱과 이빨로 뜯는다.

   ‘아야, 에이씨’

입술에 피가 보인다.

   ‘진규는 도대체 뭘 하고 있어서 메시지를 못 보는 거야. 진규야, 너 지금 어디서 뭐 하니?’

그때 ‘숫자 1’이 사라지고 휴대폰이 울린다. 세하는 일부러 전화벨이 몇 번 울리게 내버려 두다가 통화 버튼을 누른다.

   “세하야, 자? 세하 잘 까봐 전화 안 했는데, 톡이 와 있어서 전화해 봤어. 나 집에 도착해서 이제 씻고 자려고. 오랜만에 술을 좀 마셨더니, 잠이 너무 오네.”

   “아~, 집에 무사히 왔구나. 자기한테 전화가 안 와서, 술에 취해서 무슨 일 생겼나 싶어서 걱정했지. 잘 자.”

   “응, 낼 아침에 전화할게. 잘 자”

세하는 그제 서야 어두워진 거실로 나와 욕실에 불을 켜고 씻을 준비를 한다. 샤워 후 덜 말린 머리카락이 축축하다. 맥주를 한 모금 삼키며

   “진규야, 너 확실히 집에서 자고 있는 거 맞지?”

세하는 혼자서 몇 번을 반복해 말 해 본다.


   어제 동기회 모임으로 숙취 때문에 평소보다 피곤한 진규는 너구리 박 대리의 부탁을 또 거절하지 못해 야근이다.  

   “진규야, 나 좀 살려줘. 오늘 처갓집 제사야. 그런데 과장님이 갑자기 어제 올린 보고서 고치라고 던져주고 퇴근하셨어. 고쳐야 할 부분에 체크는 다 해 놨어. 정리해서 프린트만 좀 해줘. 내가 학교 후배 조주임 말고 누구한테 부탁하겠니?”

   “네, 오늘은 특별한 일 없으니까 제가 마무리해서 대리님 책상 위에 올려 두고 퇴근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역시 넌 좋은 후배야. 네가 내 밑이라 진짜 좋다. 내가 우리 부서에서 너 하나 믿고 일하잖아. 알지? 너도 빨리 마무리하고 퇴근해. 나 그럼 갈게. 파이팅. 낼 봐.”

진규는 박 대리에게 웃음을 보이며 꾸벅 인사한다. 또 당한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박 대리의 부탁을 거절하면 혹시나 박 대리가

   ‘자신을 험담하고 다니는 건 아닐까?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겠지?’

라는 막연한 걱정 때문에 박 대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부탁도 거절하기가 힘들다. 진규는 그런 불안감이 일을 조금 더 하는 불편함보다 견디기 힘들다.

   “진규야, 또 야근이야? 쯧쯧 순해 빠져서. 박 대리 그 뺀질이 새끼가 너한테 일거리 던지고 자기는 퇴근했지? 내가 몇 번을 말해. 그놈은 의리가 없어. 너만 손해라니까. 마음 좋은 조진규 주임님. 웃지 마. 자 따라 해 봐. 대리님, 안 돼요. 못 해요. 저 약속 있어요.”

   “하하, 그만해.”

   “웃지 마. 짜샤. 정들어. 나도 너 진짜 도와주고 싶은데, 너 알지? 나 바쁜 거. 형님은 딱 월급만큼만 일한다. 갈게. 수고해.”

   “너, 진짜 그냥 가는 거야?”

   “그래. 인마.”

출입문 쪽으로 손을 높이 들어 흔드는 민철의 뒷모습을 진규는 웃으며 바라본다.        

   ‘그래, 나도 마음속으로는 늘 그렇게 말해. 안 된다고. 그런데 그 말이 내 입 밖을 못 나와. 내가 착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인마.’

진규는 꺼진 컴퓨터를 다시 켠다. 휴대폰이 울린다. 세하다.

   “자기야, 어디야? 나 지금 막 퇴근했어.”

   “응, 세하야. 나 야근이야. 아직 회사야.”

   “뭐? 갑자기? 누구랑? 부서 전체?”

   “아니, 나 혼자. 마무리할 서류가 좀 있어. 얼마 걸리진 않을 거야. 집에 가면 전화할게.”

   “자기 밥은? 아직 안 먹었으면, 혼자 있으니까 내가 맛난 거 포장해서 갈게.”

   “진짜? 그럼 치킨이랑 김밥 사서 같이 먹고 퇴근하자. 갈 땐 내가 데려다줄게. 오늘은 외근 때문에 차 가지고 출근했어.”

   “응, 조금 이따 봐.”

   “내가 회사에 여자 친구 데려오긴 처음이네. 우리 사무실 어때?”

   “사무실이 다 비슷하긴 한데, 우리 사무실보다 더 넓긴 하다.”

   “치킨 맛있네. 다 되어 가니까 조금만 기다려.”

   “나, 신경 쓰지 마. 마무리 잘하고.”

세하는 치킨 한 덩이를 들고 사무실을 산책하듯 천천히 둘러본다. 여직원 자리인 듯이 보이는 곳에 잠깐씩 걸음을 멈춰 서서 책상 위를 찬찬히 둘러본다. 핑크 바탕에 알록달록한 꽃이 가득한 텀블러 하나가 세하의 눈에 확 들어온다. 세하는 감각적인 텀블러를 보며 이런 걸 들고 다니는 여직원이 궁금하다. 세련되고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들고 있던 치킨의 튀김 끝 부분을 떼어내어 엄지와 검지로 힘주어 꾹 누른다. 기름이 손가락으로 쭉 배어 나온다. 세하는 번질거리는 기름진 손가락 두 개를 눈으로 확인하고 진규 쪽을 힐끔 쳐다본다.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진규의 얼굴이 컴퓨터 모니터 쪽으로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쳐다보며 화려한 텀블러가 올려진 여직원의 의자 등받이에 치킨 기름이 배어 나온 손가락을 비빈다. 두 번 더 그 동작을 반복할 동안 진규는 세하 쪽으로 고개를 들지 않는다. 천천히 다른 책상으로 이동한다. 세하가 진규의 자리로 되돌아와 진규의 뒤쪽 테이블 위에 올려진 포장 음식들을 치운다.

   “세하야, 거의 다 했어. 이제 출력만 하면 돼.”

   “응. 나도 음식 다 치웠어. 물티슈 어디 있어?”

   “거기 테이블 옆에 있는 서랍 열면 있을 거야.”

   "세하야, 안전벨트는 맺어? 음악  들을까?"

   “음악은  별로. 그런데  자기야, 차 안에서 좋은 냄새가 나네?”

   “응, 차량용 방향제 냄새야. 선물로 받았어. 동기 중에 여자 애가 한 명 있는데, 손으로 뭘 만드는 걸 좋아 한데. 다른 애들이 그러는데 걔가 손재주가 좋데.”

   “방향제 자기한테만 줬어?”

   “아니, 동기들 다 받았지.”

   “자기야, 이 방향제 나 주면 안 돼? 향이 진해서 집 거실에 놔두면 좋을 것 같아.”

   “세하가 가져도 되는데, 내가 더 좋은 거 사줄까?”

   “아니, 이 정도가 딱 좋을 것 같아. 차보다 좀 더 넓은 집에 두면 은은하게 향이 날 것 같아.”

세하는 진규와 헤어지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차량용 방향제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버린다.


   진규는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만지작하던 상자를 꺼낸다.

   “세하야, 우리의 30일 축하해”

   “어머, 진구야. 귀걸이 너무 예쁘다. 고마워. 아무 옷에나 어울리는 것으로 달라고 했더니 이게 제일 낫다며 직원이 권해 줬어. 맘에 든다니 다행이야.”

   “나도 자기 넥타이핀 샀어. 여기. 어때? 맘에 들어?”

   “와, 좋은데. 딱 내 스타일이야.”

   “자기야, 우리 30일 기념으로 친구 앱 깔까? 그럼 서로가 대충 어디에 있는지 아니까 약속 잡기도 편할 거야.”

   “그래, 그러자.”

둘은 맥주잔을 건배하며 마신다. 세하는 무척 만족스럽다. 거품 가득한 맥주와 안주가 시원스럽게 목으로 넘어가고 힘든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처럼 승리감에 취한다. 어렸을 때 키웠던 고양이 목에 걸어주었던 방울이 생각난다.

   ‘고양이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네.’


   세하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한다.

   “얘들아 난 이제 일어날게. 진규가 이 근처에 있어. 늦어서 혼자 가면 위험하니까 집에 데려다준 데.”

   “아이고, 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쟤들은 맨날 근처에 있데. 세하, 너 처음부터 우리 모임 장소 정할 때 진규 씨 일정에 맞춘 거 아니야?”

  “아니야, 진짜야. 담에 또 보자. 안녕. 미안. 미안.”

세하는 진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세하는 손바닥을 쫙 폈다. 손가락에 끼워진 커플링. 곧 결혼반지가 끼워질 자신의 손을 상상하며 진규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여기야, 세하야. 저번에도 봤지?”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봬요.”

   “매번 우리 모임 장소와 아주 가까운 곳에 모임이 있으시네요.”

   “아, 그런가요? 근처에 유명한 맛집이 많다 보니 자꾸 겹치네요.”

세하는 직설적인 민철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 인간은 저러니 이혼을 하지.’

싶은 생각이 든다. 진규의 친구 중에서 가장 눈치가 없다는 말은 들었지만, 싸가지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착한 진규는 세하 씨 오셨으니, 또 빨리 가야겠네요.”

   ‘저 인간 밉다 밉다 하니 자꾸 미운 말만 골라서 하네.’

   “아니에요. 오늘은 진짜 얼굴만 보고 가려고 잠깐 온 거예요. 진규 씨는 있어. 오늘은 나만 갈게. 얼굴 봤으니까 됐어. 술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조심해서 집에 들어가고 나중에 톡 해. 계세요. 어머, 찬우 씨도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담에 따로 진규 씨랑 세 명 이서 맥주 한잔해요.”

세하는 서둘러 자리에서 나 온다. 진규가 따라 나오며 진짜 이대로 혼자 가도 되겠냐고 물었지만 빨리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며 가까운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다. 진규는 다시 술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야, 진규야, 세하 씨 좀 이상하지 않아. 너무 자주 친구들 모임에 오잖아. 다른 여자들은 안 그래. 너 저런 스타일 여자랑 결혼하면 피곤하다. 딱 의부증 걸릴 스타일이지. 촉이 온다고. 내가 결혼했다가 돌아와 봐서 아는데, 형님 말 들어. 나는 이 결혼 결사반대임.”

주변 친구들이 민철이의 말을 막는다.

   “아니야, 세하는 그런 여자 아니야. 그냥 나한테 의지를 많이 하는 편이야. 아빠 없이 자랐잖아. 날 보면 아빠처럼 좋데. 나도 그런 걸 알아서 그런지 더 챙겨 주고 싶어.”

  “얼씨구, 이 자식 콩깍지 콘크리트네. 천생연분이다. 인마. 꼭 잘 살아. 나처럼 이혼하지 말고.     


  집에 도착하고도 세하는 콧노래가 나온다.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리며 휴대폰 화면을 쳐다본다. 진규는 아직 그 식당에서 이동하지 않았고, 그곳엔 여자가 없었다


   세하와 진규와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세하는 진규가 일어나기 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옷장 문을 열어 진규의 옷 냄새를 맡아본다. 일부러 냄새가 진하고 오래가는 섬유유연제 제품은 쓰지 않는다. 그런 제품을 쓰면 진규의 옷에서 나는 낯선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다른 여자의 섬유유연제 냄새나 향수 냄새 같은 걸 찾아낼 수가 없다. 타인의 화장품 냄새마저도 쉽게 베일 수 있도록 철저히 무향의 제품으로만 세탁한다. 오늘도 마음이 편안하다. 진규의 옷에선 새로운 냄새가 나지 않는다. 세하는 진규가 입고 들어 옷, 아직 입지 않은 옷의 냄새에 예민하다. 새로운 냄새가 난다는 건 진규가 세하가 모르는 곳에 갔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곳에 여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세하는 미쳐 버릴 것만 같다.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는 진규의 얼굴을 천천히 내려다본다. 불안한 표정 없이 아기처럼 깊이 잠들어 있는 진규. 자신에게 숨기는 게 없다고 말하듯 자고 있는 진규를 보며 세하는 미소 짓는다. 그제 서야 세하는 씻으려고 욕실에 불을 켰다. 다 씻고 나온 세하는 얼굴에 로션을 바르며 진규를 깨운다.

   “자기야, 일어나. 출근해야지. 속옷이랑 양복 챙겨 놨어. 얼른 씻고 입어.”

   “응. 일어났어. 매일 옷도 챙겨 주는 와이프도 있고. 결혼하니 좋아. 직원들이 총각 때 보다 나 옷 입는 게 멋져졌데.”

   “당연하지. 나 의류회사 다니는 와이프야.”

세하는 매일 아침 진규의 속옷과 겉옷을 챙긴다. 결혼 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요일별 속옷과 겉옷 넥타이, 양말까지 세하가 정한 순서에 맞게 진규는 입고 출근한다. 진규는 신경 쓰지 않아 옷들의 규칙성을 모른다. 둘은 아침을 간단히 먹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항상 16층에선 출근하는 남자가 , 15층에선 아가씨가 탄다. 오늘은 16층 남자만 보이고 15층 아가씨가 보이지 않는다. 우연히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세하는 그녀의 시선에 집중한다. 혹시나 진규를 쳐다보지는 않는지, 진규와 둘이 다정하게 눈인사라도 하는 건 아닌지 싶어 자세히 살핀다. 늘 휴대폰을 보며 타던 그녀는 지금껏 진규 에게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다. 세하는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늘 신경에 거슬려서 불안한 마음에 늘 진규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다. 15층에서 지하 주자 층까지 두 남녀만 있다면, 지하까진 꽤 긴 시간이라고 세하는 생각한다. 오늘은 15층 아가씨가 타지 않아 세하는 긴장도가 떨어져 얼굴에 살짝 미소가 생긴다.

   “세하야, 오늘 회사에서 좋은 일 있어?”

   “아니, 왜?”

   “오늘은 표정이 평소보다 좋은 것 같아.”

   “그래? 그럴 땐 예뻐 보인다고 말해줄래?”

   “하하. 그래. 오늘 우리 세하 예뻐 보이네.”

남편에게 예쁘게 보인 다는 것. 세하의 엄마는 어린 세하에게 말했었다.

   “남편에게 예뻐 보이는 여자가 생기면, 그 남자는 바람이 났거나, 멀지 않아 바람이 날 남자야.

라고 했다. 남자들은 자기 눈에 예뻐 보이지 않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엄마를 보러 오는 남자들은 자신들의 아내가 더 이상 예뻐 보이지는 않지만 그냥 산다고 말한다고 했다. 엄마는 늘 자신과 살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세하 에게 말했다. 그러나 엄마와 결혼해서 같은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같은 침대에 자는 남자는 없었다. 엄마는 남자들의 아내가 자신의 존재를 알고 그 남자가 부부싸움 후 이혼하길 바라서 엄마는 일부러 짙은 향수를 뿌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늘 그늘에서 존재하는 여자였다. 이젠 엄마는 세하의 그늘이 되었다. 세하의 서늘한 그늘. 엄마의 그늘에서 결코 쉬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떠 난지, 15년이 넘었다. 세하는 타 지역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자신이 만든 빛으로 스스로의 양지를 만들고 살았다. 세하의 양지를 더 빛나게 해주는 진규는 그 누구에게도 내어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남편 진규를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세하는 늘 다짐한다. 진규 에게 자신이 예뻐 보이는지. 다른 예쁜 존재가 생겼는지 살피는 것에 세하는 늘 집중한다.


   세하는 회사에서 은정이와 점심을 먹으면서도 식탁 위로 휴대폰을 올려놓고, 식사 중에도 진규로부터 온 메시지가 있는지 늘 체크한다. 진규는 습관처럼 점심에 먹은 메뉴를 찍어 보낸다. 하트도 함께. 오늘은 간 짜장 사진이 세하에게 전송된다.

   “세하야, 밥 먹어. 너희 부부도 참 대단하다. 매일 남편 점심메뉴 사진을 아직도 기다리는 부인이라니. 내 참. 할 말 없다. 나는 연애할 때도 그 짓거리 2주 채우기가 힘들던데. 깨가 쏟아지는 걸 넘어서 너희들은 매일 쏟아져 흐르는 참기름에 숨은 쉬고 사니?”

   “은정아, 넌 남편을 믿을 수 있어? 넌 퇴근할 때까지 종일 연락도 잘 안 하더라. 너흰 위치 앱도 안 깔았잖아.”

   “하하, 남편에 대한 믿음이라. 글쎄. 바람피울 거라는 의심을 해 본 적은 없어. 내 남편은 남들이 탐 낼만큼 멋지지 않잖아. 너도 우리 남편 알지? 30대에 벌써 배 나와 있지. 키 작지. 능력이 눈부시게 특출한 것도 아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뭘 불안 해 하니? 아마 우리 남편도 마음 진짜 편 할걸? 나도 정말 진실 되게 평범하잖아. 우리 부부는 연애할 때도 편했어. 서로에 대한사랑으로  불처럼 뜨겁거나 하진 않았는데, 이상하게 편하더라고.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나의 행동이 정해지잖아. 바람피울 놈이라고 생각했으면 사귀지도 결혼하지도 않았을 거야. 믿는 거지. 너도 맘 편히 먹고 밥이나 맛있게 먹어. 진규 씨도 착해 보이더라. 진규 씨도 물려받을 건물이나 땅 같은 거  없잖아. 호호.”

세하는 비빔밥 위에 계란 프라이를 예쁘게 놓고 사진을 찍어 진규 에게 보낸다.

   ‘맛점’

이라는 글자와 함께.


   진규는 세하에게 간 짜장 사진을 보낸 후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다 짜장 소스 그릇 위로 휴대폰을 떨어뜨린다. 

바지 위로 소스가 우르르 왕창 쏟아진다. 물수건으로 급히 닦아 냈지만, 얇은 여름 바지 속으로  속옷까지 짜장 소스가 배어든다. 진규는 점심시간 이후 있을 부서 프레젠테이션이 걱정이다. 각 부서 부장님이랑 이사님까지 참석하시는데, 이 상태로 회의실에 들어가면 냄새가 날 것이다. 같이 점심을 먹던 신입사원이 자신의 바지를 잠깐 빌려 준다고 해서 바지는 해결이 되었지만, 팬티가 문제다. 진규는 점심을 먹고 나와 가까운 상점에 가서 팬티를 구입해 남자 사원 휴게실에서 바지를 벗어 물에 대충 씻는다. 휴게실에 비치되어 있는 드라이기로 바지를 발린다. 짜장 소스가 뭍은 팬티는 쓰레기통에 버린다. 신임사원을 불러 바지를 바꿔 입고, 회의실로 들어간다.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 휴대폰의 전원을 끊다. 회의는 예상보다 오래 진행된다. 회의가 끝난 후 돌려받은 바지엔 아직 짜장 냄새가 난다. 휴게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탈취제를 바지 위로 가득 뿌린다. 진규는 탈취제 포장지에 적힌 빨간 글자를 읽어 본다. 퍼퓸 성분 함유 ‘강력 탈취’라고 쓰여 있다. 향이 진해 짜장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냄새 때문에 계속 짜장을 먹고 있는 기분이 들고 헛배가 부른 느낌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회의 중 보고서는 보완과 수정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오늘 야근을 하며 마무리해 팀장님께 보고 하기로 한다. 여름휴가철이라 자리를 비운 직원이 많고, 내일 휴가 갈 직원도 있어서 진규 혼자 남아 일을 해야 할 상황이다. 저녁을 먹으며 세하에게 야근한다고 연락을 해야 해서 휴대폰을 꺼냈더니, 오후에 회의 들어간다고 전원을 꺼놓고 그 뒤로 켜질 않은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진규는 휴대폰 부재중 전화 횟수를 다시 체크한다. 세하에게 20통의 전화가 와 있다. 전화 통화음이 들리기도 전에 세하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세하야,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전화를 엄청 많이 했네?”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디야? 누구랑 있어?”

세하가 큰 목소리로 너무 빨리 말해서 무엇을 묻는지 정확하게 알아듣기 힘들다.

   “세하야, 진정하고 목소리 좀 낮춰. 너무 크고 빨라서 무슨 말이지 모르겠어. 나 회사야.”

   “진규 씨. 진짜 회사야?”

   “응”

   “영상통화로 바꿔봐.”

   “어, 잠깐만, 자장 소스가 카메라에 묻어있네. 이제 잘 보이지?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전활 왜 이렇게 많이 했어.”

   “나는 아무 일 없어. 자기가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야근하는 거 말고는 아무 일 없는데?”

   “누구랑 하는데?”

   “혼자 해. 보고서 작성이 좀 급한데 휴가 간 직원도 많고 낼 휴가인 직원도 많아서 내가 혼자 하기로 했어. 조금만 마무리하면 되는 보고서라서 마무리하려고. 나도 다음 주 목요일부터 여름휴가니까 일을 마무리해 놓고 휴가 가는 게 마음이 편하기도 해서 말이야.”

   “혼자라고? 그럼 나도 오늘은 일이 많아서 야근하니까 그리로 넘어갈게. 같이 퇴근해. 나도 너무 늦게 까지 야근할 건 아니니까 출발하기 전에 전화할게.”

   “응. 피곤할 텐데. 집에 가서 먼저 쉬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내일도 출근하는데?”

   “왜,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 내가 가면 안 돼?”

   “아니, 네가 피곤할 까봐 그런 거야.”

   “난 괜찮아. 좀 이따 봐.”

   “응.”


   진규는 날카로운 세하의 말에 기분이 좀 상했지만, 참고 넘긴다. 진규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늘 조심스럽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면 자신에게 돌아 올 원망이나 비판, 평판에 신경이 곤두선다. 거절과 불평은 상대와의 불화를 더 크게 할 뿐이라고 진규는 늘 생각한다. 언제나 조용한 어머니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셨던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과 환경에 늘 불만이 많아 동네 싸움꾼이었다. 진규가 지나가면

   “제가 싸움닭  씨 아들이래. 쟤는 지아비랑 다르다고 우리 아들이 말하던데. 믿을 수 없지. 그 아비에 그 아들이지. 어디가 얼마큼 다르겠어. ”

라고 쑥덕쑥덕 거리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던 진규는 늘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듣는 것에 노력하고 집중했다. 어머니도 아들은 반듯하니 잘 키웠다는 이웃 아줌마들의 말에 많이 기뻐하셨고, 진규를 자랑스러워하셨다. 아버지는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크게 소리를 지르셨고, 결국 혈압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누나는 아버지의 성향을 진규 보다 더 았지만, 천성이 여자고 어머니의 훈육 아래 다듬어져 주변 사람들과 눈에 띄는 마찰은 흔하지 않았다. 좀 전의 세하는 그런 아버지를 잠깐 떠오르게 하는 말투였다. 자기 화를 참지 못해 내 지르는 언어들의 경박함. 어머니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조용하고 세심한 세하가 예뻐 결혼한 진규였다.       


   또각또각 여자 하이힐 소리가 들린다. 진규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 말고, 세한가 싶어 여자 구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옆 부서 정 대리님이다. 진규는 일어나 인사를 하고 다시 제자리에 앉는다. 세하가 오기로 했으니 빨리 일을 끝내고 싶었다.

   “ 주임님, 아직 퇴근 안 했네요?”

정대리가 다가와 인사를 한다. 진규는 다시 일어난다.

   “아, 네. 대리님은 왜 아직 퇴근 안 하시고 사무실에 계세요?”

   “집에서 좀 편하게 회사 일을 처리하려고 일찍 퇴근했는데, 집 가까이 가서 가방을 뒤져보니 USB를 안 가지고 퇴근한 거예요. 저장하고 가져가려고 컴퓨터에 꽂아 두고 저장만 하고선 그냥 퇴근해 버린 거죠. 내참, 어이없죠? 어쩌겠어요? 다시 와야죠. 내일 결재 올려야 하니까.”

정 대리는 진규와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가려고 하고, 진규는 정대리를 배웅하려고 의자를 뒤로 뺄 때 의자 다리에 정 대리의 다시가 걸려 진규 쪽으로 그녀가 휘청거린다. 진규는 정 대리를 부축하며 일어선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네. 의자 다리에 신발이 걸려서….”

세하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세하의 목소리가 차분히 깔려있고 떨린다.

   “어, 세하야, 인사해. 옆 부서 정 대리님이야. 내 의자에 대리님의 발이 걸렸어. 대리님 이쪽은 제 아내입니다. 제가 혼자 있다고 해서 퇴근길에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부인이 미인이네요. 전 이만 갈게요.  주임님도 빨리 퇴근하세요.”

세하는 정 대리가 들고 있는 텀블러를 본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오래전 진규의 사무실에서 봤던,

   ‘그 텀블러의 주인이 이 여자였구나. 생각보다 늙고 못 생기고 뚱뚱하네.’

라고 생각한다.     

   “자기야, 혼자라고 안 했어?”

   “저 늙은 여자랑 같이 일한 거야?”

   “아니, 나 혼자 일 하고 있을 때, 대리님은 사무실에 놔두고 간 USB를 찾으러 왔다가 야근하는 직원이 있으니까, 잠깐 인사 한 거지. 그런데 세하야, 전화했으면 마중 나갔을 텐데. 회사가 어두워서 안 무서웠어?”

   “아니야, 처음도 아니고. 혼자 찾아올 수 있어서, 전화 안 했어. 그런데 진짜 인사만 한 거였어? 나한테 숨기는 거 없지? 사실대로 말해.”

   “무슨 소리야. 그리고 정 대리님은 기혼자야. 이제 보고서도 다 마무리했어. 우리도 집에 가자.”

   “응.”

   “자기야, 이거 무슨 냄새야?”

   “아직 냄새나? 물로 씻고 섬유탈취제도 뿌리긴 했는데, 세탁을 안 하니 계속 냄새가 나긴 나네. 점심에 먹던 간 짜장 소스를 바지 위로 다 쏟았잖아. 자장면에 비벼서 한 젓가락 먹기도 전에 다 쏟았어.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바지도 후배 사원이랑 바꿔 입고, 난리였지. 짜장 냄새 많이 나?”

   “아니, 짜장 소스 냄새는 자기가 말하니까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좋은 향기가 나서 물은 거였지.”

세하는 오후에 진규가 보낸 사진이 생각났고, 냄새에 집중하니 짜장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긴다. 진규는 소스 냄새 때문에 자기가 먼저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간다. 벗어놓은 진규의 옷을 세하가 다가와 살펴본다. 팬티가 달라져 있다. 세하는 멍하니 움직일 수가 없다.

   '이. 게, 뭐. 야?'

세하는 욕실 문을 열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는 진규 에게 그가  벗어 놓은 새 팬티를 내민다.

   “이게 뭐야? 너 무슨 짓하고 다니는 거냐고?”

세하는 악을 쓰며 말을 한다. 욕실 가득 울리는 세하의 큰 목소리, 눅눅한 수증기, 출근 복장 그대로 욕실화도 신지 않고 맨발로 물이 가득한 욕실로 들어와 분노하는 눈으로 자신의 속옷을 들고 서 있는 세하. 절대 예뻐 보이지 않은 내 아내의 모습. 진규는 잠시 세하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며, 다시 수건을 움직이면서 물이 묻어있는 자신의 몸을 닦아가며 차분히 말한다.

   “짜장 소스가 팬티까지 스며들어 회사 근처 속옷 상점에서 하나 사서 입고 기존에 입고 있던 건, 회사에서 보관하기 불편하고 낡아 보여서 남자 사원 휴게실 휴지통에 버렸어.”

   “그걸 나 보고 믿으라고? 그걸 어떻게 믿어?”

세하는 두통이 느껴진다. 어느 날 시작된 편두통이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있을 때 귀 뒤쪽 머리가 갑자기 찌근거리는 편두통이 생긴다. 병원에서는 신경 쪽 문제이고 지금 처방해 주는 약이 효과가 있다면 가벼운 증상이니 상비약으로 두고 먹으라고 했었다. 한 번 두통이 시작되면 일반 의약품으로는 효과가 없어 병원에서 처방받은 두통약 한 봉지는 늘 가방에 넣어 두고 다닌다. 세하는 진규와 이야기 도중 느껴지는 두통이 고통스러워 컵에 물을 담아 약 한 봉지를 뜯어 삼킨다. 두통이 시작되면 꽤나 거슬리고, 두통은 세하의 자가 스트레스의 지표 같은 역할을 한다. 세하는 목소리와 거친 억양으로 아직 옷을 챙겨 입지 못 해 벌거벗고 있는 진규를 몰아붙인다.  

   “빨리 옷 입고 나와. 자기 회사 남자 사원 휴게실로 당장 가서 휴지통을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자기 말이 사실이라면 아침에 입었던 자기 팬티는 휴지통에 있겠지. 또 자기가 말 한 퍼퓸 탈취제도 그곳에 있겠지. 사실인지 아닌지 지금 당장 확인 해 봐야겠어.”

   “꼭 그래야겠어.”

   “응, 지금 꼭 확인해야 너에 대한 나의 혼란과 분노가 끝나지. 난 진실에 대한 빠른 확인이 필요해. 만약 확인을 거부한다면,  자기가 나에게 떳떳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 들어. 나를 속인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야.”

   “그래, 가자. 세하야. 가 그렇게 해야 나를 믿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일 하시는 분이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았어야 할 텐데 말이야.”


   진규는 어두운 도로를 운전해 달린다. 둘은 아무 말이 없다. 세하는 창밖을 스치는 상가들의 불빛이 눈물 때문에 펴져 보인다. 분노로 고인 눈물인지, 자신이 바라지 않는 현실을 대면하게 될 두려움의 눈물인지, 도대체 자신이 느끼는 감정 중 무엇이 눈물을 만들어 내는 건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진규의 말에 대한 진실성은 지금  당장  꼭 확인해야 한다고 세하는 생각한다. 세하가 선택한 행동의 방향이 옳다는 것이 흔들리지 않게 자신의 독단적 논리성을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들은 이성적인 거야. 누구든 남편의 팬티가 달라져 있다면 나와 똑같이 행동할걸? 나중을 위해서라도 진실을 밝혀내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 사실을  확인해야  믿음이  생기는  거잖아.

자신의 추측이 거짓임이 밝혀지고 진규의 말이 사실이라면, 세하가 진규에게 보여줘야 하는 다음 행동은 사과와 뉘우침이다. 사과와 뉘우침이 많은 아내와 예쁘게 보이지 않은 아내 중 남편이 더 사랑하는 아내는 어떤 아내인지에 대해 세하의 엄마는 세하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다. 세하는 엄마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엄마는 한 번도 아내가 되어 보질 못 한 여자다. 세하는 처음 해 보는 아내 역할의 기준이 없다. 자신이 바라는 남편상의 기준만이 뚜렷할 뿐이다.


   진규의 회사로 들어온 세하는 남자 휴게실 휴지통 뚜껑을 열고 휴지통을 거꾸로 세워 들고 바닥에 내용물들을 쏟아낸다. 진규의 녹색 팬티가 짜장 냄새를 풍기며 한 여름 바닥에 배 터져 죽은 개구리처럼 철퍼덕 펼쳐진다. 바닥에 흩어진 휴지들을 다시 휴지통으로 담아 넣는다. 세하는 탁자를 살핀다. 탈취제를 찾아 허공에 분무해 본다. 진규의 바지에 짜장 소스 냄새와 섞여 탁하게 나던 꽃냄새가 좀 더 깔끔한 향기가 되어 세하의  코 끝에  맡아진다. 세하가 의심하던 모든 상황은 진규의  말이 사실이라는  진실성을  가지며 마무리된다. 세하가 진규를 바라보니, 진규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있다.

   “자기야, 나 확인 다 했어.”

   “그래? 이제 다 끝났지. 가자.”     


   진규는 바닥에 뒹굴던 자신의 팬티가 자꾸 생각난다.

   ‘만약 팬티가 없었다면 나는 어떤 기분으로 운전하고 있을까? 세하의 의심과 분노는 어디까지 향했을까?’

어릴 적 아버지의 화를 늘 진정시키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진규는 이런 익숙한 긴장감이 반갑지 않다. 운전 중 무심코 지나온 어린이 보호 구역에서 진규는 자신이 신호와 속도는 지켰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진규는 모든 사람은 생각과 행동에 지켜야 사회적 기준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세하의 행동은 아내로서 얼마큼  선을  넘은 걸까? 또한 나는 남편으로써 얼마큼 세하에게 닿지 않은 걸까? 부부가 서로에게 적당한 정지선은 어느 만큼 일까? 누구의 기준에 맞추어야 더욱 보편화된 표본일까?’

진규는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  자신의 아버진 좋은 남편과 존경스러운 아버지의 표본에 닿지 않은 사람이라고 늘 생각해 온 진규다. 진규는 자신이 가진 남편으로써의  기준이  옳다는 확신이  없다고  생각한다. 진규에게  또렷한 기준은 자신이 바라는 아내상에 대한 옳음의 기준치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라고? 갑자기? 2박 3일로 대구에 간다고? 세하 부서 사람들 다 대구로 출장 가는  거야?”

   “응, 대구에서 일주일 동안 패션 위크가 진행되는데, 우리 회사가 이번행사에 투자금액을 상향 조절하면서 행사참여 일정이 길어졌어. 행사규모가 커서 인원 충원이 필요하데. 우리 부서  전체가 지원 나가기로 결정된 나 봐.”

   “그래? 나중에 퇴근하고 집에서 다시 얘기해. 이제 나 회의 들어가. 전화  못  받아.

   “응. 오늘 스키나베 해 놓을게. 빨리 와.”

세하는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할인하는 ‘소고기 스키나베 밀키드'를 구입한다. 세하와 진규는  가끔 집에서 해 먹는 식사에 모든 재료를 준비하는 것은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세하는 주로 밀키드를 구입해 먹는다. 진규가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보글거리는 따뜻한 음식과 간단한 밑반찬으로 준비한 식사다. 부부는 결혼이라는 형식을 거처 식사를 함께 하는 사이가 된다. 자신의 것을 나눠먹는 사람, 자신의 것을 내게 나눠 주는 사람. 같이 먹는 것이 언제나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관계는 오직 부부뿐이라고 세하는 생각했다.

   “세하야, 출장 가서 잠은 어디서 자?”

   “회사에서 예약한다던데? 가까운 모텔이나 비즈니스호텔 아닐까? 아직 잘 몰라. 자세한 건 며칠 후에 전달될 거래.”

   “그래? 일정표 나오면 나도 복사해서 한 장 줘. 다른 지역으로 가는데,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찾아갈 수 있게.”

   “응. 그럴게. 그런 일이 일어나긴 어렵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출장 가면 연락 자주 하고. 대구 내려갔으니 가볍게 관광이라도 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네.”

   “아마 그럴 시간은 없을 거야. 직원들이랑 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보고서 작성해야 할 것 같아.”


   정신없는 패션 위크 파견지원을 마무리하고 세하는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집에 도착한다. 집에 가서 당장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번호 키를 눌러 눈을 열고 현관문을 여는데 낯선 여자의 신발이 놓여 있다. 세하는 순간 온몸이 굳어 버린다.

   “진규야, 벌써 왔어?”

마치 자기 집처럼 자연스레 나오는 시누이의 모습에 세하의 눈이 커진다. 세하가 생각하는 그런 낯선 여자가 아니라 진규의 누나여서 다행이긴 하지만, 불쾌감 여전하다.

   “어머, 형님. 연락도 없이 저희 집에 무슨 일이세요? 언제  오신 거예요? 그리고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남편도 있어요?”

   “어머, 올케 오랜만이야. 호호. 진규가 오늘 저녁쯤 온다더니 빨리 왔네. 피곤하지?”

   “형님, 언제 오셨냐고요?”

   “오늘 3일째야.  서울에 애 데리고 엄마 집에 놀러 올까 싶었는데, 때마침  올케가 출장 가서 진규가 혼자 며칠 있다고 하길래, 내가 밥이라도 챙겨줘야 할 것 같아서 왔지. 동생얼굴도 보고 말이야.”

띠. 띠. 띠. 띠. 띠. 띠. 집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 진규다.

   “어, 세하야, 빨리 왔구나. 일은 안 힘들었어.”

   “힘들었어. 그래서 집에서 좀 쉬었다가 내일 일찍 출근하려고 집으로 바로 왔어. 그런데 진규 씨 왜 나한테 아무 말 안 했어? 상의를 왜 안 했냐고? 여긴 진규 씨 혼자 사는 집이 아니잖아.”

세하는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상대에게 불편한 말들을 참지 않고 내뱉는다.

   “올케, 내가 진규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어. 올케 일하는데, 내가 와 있다고 하면 괜히 신경 쓰이고, 집에 올 때 선물이라도 하나 사서 와야 되니까 부담 없이 그냥 맘 편히 오게 내버려 두라고. 연락하지 마라고 했어. 다 올케 생각해서 내가…”

   “잠깐만요. 형님, 저를 생각해 주신다는 결과가 이런 거 에요? 아내 없는 집에 누나와 결혼한 남동생이 같이 지낸다는 거요?”

   “올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형님 같으시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제가 형님 없는 집에 고모부님 밥 챙겨 드린다고 형님께  아무 말 안 하고  며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최소한 저에게 연락은 하셨어야죠? 진규 씨도 나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진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놀이터에 다녀온 조카 승수가 벨을 누른다. 숙모를 본 승수는 꾸벅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 승수 많이 컸네.”

남편의 큰 조카 승수는 머리색, 눈, 호리호리한 체형까지 진규와 많이 닮았다. 시누와 진규가 서로 많이 닮기도 했지만, 오늘따라 진규와 닮은 조카의 모습이 세하의 눈에 심하게 거슬린다. 시누는 불쾌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며 시어머니 댁에 간다며 세하의 집을 나간다.

   “도대체 왜 나한테 전화 안 했어? 이게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해?”  

   “누나가 그러는 게 세하에게 좋겠다고 얘기해서 나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싶어 서 얘기 안 했어. 얘기하나 안 하나 별로 달라질 것도 없는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누나가 온다는데 오지 말라고 얘기할 수도 없잖아. 안 그래?”

   “왜, 말 못 해? 누나가 기분 상할 거라는 건만 생각하고, 내가 불편하거나 기분 상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둘이 뭐 숨기는 거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거야?”

   “세하야, 진정해. 그냥 단순하게 연락을 안 하는 게 널 더 배려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세하는 진규의 대답이 알맹이 없는 껍데기 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진실이 있을 거라고, 자신에게 숨기고 싶은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세하의 머릿속에서 멈춰지지 않는다. 조카 승수의 얼굴. 진규와 닮은 조카. 유난히 조카를 아끼는 진규. 결혼 전부터 특별히 사이가 좋던 시누이와 진규의 유대관계. 세하의 친구들은 자신의 오빠나 남동생과 애틋하지 않아 보였는데, 진규는 누나와 사이가 너무 좋아 보였다. 시누는 진규의 차에 보조석에 앉아 진규를 향해 걸어오는 자신을 보고도 조수석에서 내리지 않던 누나였다. 애인인 세하가 늘 뒷 자석에 앉아 가던 일이 지금 이 순간 생각이 난다. 가끔은 평범히 지나간 일들이 평범을 떼어내고 특별한 일로 회상되기도 한다. 잊고 있던 것들이 특별한 순간이 되는 순간 그 이후 일어난 일들도 평범하지 않는 결과로 재해석되며, 지나간 모든 일들이 의심스럽게 꼬이기 시작한다.

   “자기와 닮은 승수, 혹시 진규 씨 아이 아니야?”

   “세하야, 너 무슨 상상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몰라,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 나는 확인해야겠어. 사실과 진실을 알아야겠어. 지금 당장”

   “너 지금 승수랑 나랑 유전자 검사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 너와 누나가 내게 당당하다면, 숨길 게 없으면, 할 수 있는 일 아니야?”

   “나는 너에게 숨기는 거 없어. 나는 유전자 검사 하면 돼. 그러나 그런 말을 누나가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 누나가 가만있을 거라고 생각해? 누나가 널 어떻게 생각하고, 나는 뭐가 돼? 그게 남매끼리 할 수 있는 대화라고 생각해?”

   “그럼, 아내가 없는 집에서 누나와 같이 지낸 건 평범하고 모범적인 일이야? 그 둘이 뭐가 다르다는 거야?”

   “세하야, 그 둘은 달라.”

   “야, 조진규. 다르다, 다르다, 다르다.라고 말 하지 마! 네 생각은 평범이고, 내 생각은 상식을 벗어난 생각이고, 네 행동은 정상이고, 내 행동은 미친 짓이라는 거야? 너만 옳다는 거야? 너만 옳아? 이 모든 게 너희 남매의 행동으로 시작된 거라고. 알겠어? 내 말 못 알아듣겠어? 나는 네가 불결해. 네가 말할 수 없다면 내가 직접 누나한테 전화할 거야. 나에게 뭔가를 숨기는 것 같다고. 나는 밝혀내고 말 거야. 너희 둘 도대체 뭘 숨기는 거야.”

   “세하야, 너 진짜. 제발 진정해. 이건 선 넘는 거야. 이렇게 까지 할 일이 아니야. 정신 차려.”

세하는 휴대폰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시누이에게 전화를 건다. 세하는 모든 것이 떨린다. 몸도 마음도 손도 발도 모든 것이. 세하는 떨리는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싶다. 자신의 삶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의심하는 것이 밝혀져야 이 떨림이 멈출 거라고 생각한다.

   “형님, 승수의 아빠가 누구예요? 혹시 내 남편이에요?”

전화기에선 아무 말이 없다.

   “여보세요? 형님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으세요?”

   “올케, 너 미친 거 아니야?”

   “떳떳하시면 유전자 검사 하시면 되죠. 숨길 게 없으면 하는 거죠. 힘든 일 아니잖아요.”

   “야, 너는 자식이 없어서 그런 미친 짓을 생각할 수 있구나. 너 지금 제정신이라고 생각해?”

   “네, 아내 없는 집에 동생과 함께 생활한 누나의 행동은 퍽이나 정상적인 행동이군요.”

   “그거랑 이거랑 같아? 같냐고? 너 완전 맛이 갔구나?”

   “뭐가 다르죠? 왜 너희 남매는 너희들이 한 행동은 옳고, 내가 하는 행동은 다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 건 개인의 생각차이 아니야? 숨기는 게 없다면 검사받을 수 있어. 받을 수 있다고.”

세하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 지르고 울부짖는다.


   진규는 세하가 누나에게 전화를 걸 때, 이제 자신의 통제 범위를 넘어갔다는 생각을 한다. 소리를 질러대는 세하의 목소리. 세하의 눈에 고인 눈물은 슬퍼서 고인 것이 아니다. 분노의 찌꺼기다. 세하는 말을 오물처럼 내뱉고 있었다. 타인의 분노를 사는 말들은 진규 에겐 말이 아니다. 진규의 머릿속이 복잡하다.

   ‘누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머니는? 앞으로 검사를 의뢰하게 된다면 그 담당자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회사에 소문이라도 난다면 직장상사나 동료들은 나를 어떤 인간으로 취급할까? 내가 쌓아 올리고 유지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다. 세하는 그런 일을 하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고 지켜줘야 하는 아내라는 사람이 나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진규는 세하와 같이 사는 게 힘겹다. 세하의 분노를 진규는 종잡을 수가 없다. 세하와 함께 있으면 진규는 나쁜 놈이 된다. 다른 사람과 있으면 진규는 좋은 사람이다. 진규는 자신이 좋은 사람일 수 있는 공간에서 쉬고 싶다. 전화벨이 울린다. 진규의 누나다.

   “여보세요. 진규야, 너는 어쩌자고 저런 애랑 결혼했니?”

   “우리 승수나 내 남편한테 내가 뭐가 되겠니?”

   “진규야, 이혼해. 너 미친 애랑 그러고 계속 어떻게 살겠어?”

   “돌아가신 아버지 같잖아. 너도 생각나지? 아버지도 어머니를 늘 의심해서 소리 지르고 술 먹고 온 동네방네 다니면서 엄마가 다른 남자랑 같이 다니는 거 봤냐고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다녔잖아. 엄마가 무척 고우셨지만, 그런 저급한 분이 아닌데, 아버지는 항상 의심하고 욕하셨지. 엄마는 우릴 위해 참고 아버지랑 이혼하지 않으신 건데, 행복해야 할 우리가 그 여자애 하나로 이게 뭐니?”

   “미안해 누나.”

   “너는 그렇게 순해서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내가 살다 살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누나 검사 해 줄 수 있어? 세하가 나랑 누나가 유전자 검사 안 받으면 우리 회사에 찾아와서 따지는 일이 생길 것 같아. 일이 내가 당 안 될 만큼 커질 것 같아서 나는 무서워. 원하는 대로 해 주고 회사에 소문 안 나게 조용히 이혼하고 싶어.”

   “그래, 원래 미친개랑 똥은 피해야 해. 매형은 네 처가 의부증이라고 설명하면 이해하겠지만, 승수가 걱정이다. 이 상황을 걔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가 진짜 살다 살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너 진짜 이혼하는 거지? 이혼한다는 약속을 해야 검사해 줄 거다. 진규야, 이혼서류 작성해서 누나한테 사진 찍어서 보내라. 알았지? 너 그냥 참고 살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그건 미친 짓이다.”

   “알았어.”

   “너 오늘은 어디서 잘거니? 설마 다시 집에 가서 잘 건 아니지?”

   “집 근처 모텔에서 자고 출근할 거야.”

   “그래. 엄마한테는 내가 잘 얘기해 놓을 테니까 짐 챙겨서 낼은 엄마 집으로 와. 당분간 여기서 지내. 나는 내일 우리 집으로 갈 거야.”


   진규가 누나와 통화를 하고 있을 때, 세하에게서 계속 전화가 들어온다. 진규는 세하가 이제 좀 멈춰 줬으면 하고 바란다. 진규는 가까운 모텔로 들어가 침대에 앉는다. 침대 위에 올려둔 전화기에서 세하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쌓인다. 숨이 막힌다. 전화기 전원을 끈다.     


   세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진규 에게 전화한다.

   ‘한 번은 받겠지. 진규가 한 번은 받을 거야. 메시지도 한 번은 보겠지.’

진규가 전화를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겠다는 계획도 없이 세하는 진규에게 전화를 한다. 세하는 여전히 진규와 끊어지지 않았다는 확신이 필요할 뿐이다. 아직은 나의 남편이고, 아직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한 번의 통화연결과 한 번의 메시지 확인이면 될 것 같았다. 휴대폰을 보며 손톱을 뜯는 세하는 손톱에서 피가 나는지도 모른다. 진규의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음성메시지가 들린다. 세하는 눈물이 터져 나온다. 조금 전까지 많은 말을 했던 입에선 아무런 말도 소리도 나오지 않고, 말보다 더 큰 분노가 눈물로만 계속해 흐른다.


   진규와 세하가 오랜만에 자신들의 집에서 마주 앉는다.

   “세하야, 내가 너에게 원하는 건 이혼뿐이야. 그것만 해 주면 돼.”

   “진규 씨, 내가 자기에게 원하는 건 믿음이야. 지금이라도 우리 사이에 신뢰만 회복되면 우린 이혼 같은 거 할 필요 없잖아.”

   “세하야, 내가 어떻게 너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지 모르겠어. 나는 지금도 너에게 숨기는 거 없어.”

   “거짓말, 나랑 이혼하고 다른 여자랑 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내가 모르는 것 같아?”

   “세하야, 네가 의심한 모든 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야. 모르겠어? 네 생각 속엔 내가 아닌 다른 남자가 진규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어. 그 남자는 바람피우는 나쁜 인간이야. 너는 다른 남자에게 집착하는 거랑 같은 거야. 너는 바람피우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는 나를 보지 못해. 네 머릿속에 있는 나와 같은 모습을 한 그 남자만 생각하며, 그 남자에게 분노하고 슬퍼하고 집착하고 사랑하는 거야. 세하야, 너는 나와 살지 않고, 네 생각 속 또 다른 진규와 사는 거야.”

   “아니야, 아니야, 진규 씨 지금이라도 나한테 진실을 얘기해 주면 돼. 진실을 얘기하면 다 용서해 줄게. 우리가 다시 서로를 믿고, 깨끗하게 시작하려면 서로에게 솔직해야지. 안 그래? 그렇잖아? 내가 모든 걸 없었던 것처럼 잊어줄게. 제발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해. 말하라고. 진실하게  다  얘기하면 우린 안 어져도 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  내가 다  용서해  줄게.

세하는 소리 지르며 울음을 터뜨리고 진규는 이혼서류를 탁자에 놓고 나온다. 이혼서류 아래엔 유전자검사 서류가 있다. 진규가 보여준 결과지에 대해 세하는 검사결과가 잘못되었다고, 담당자와 시누가 짜고 진실을 왜곡했다고 말했다. 진규는 세하가

   ‘믿음이라는 건 상대성이 아닌 주관성이라 걸 이해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세하야, 사실이라서 믿는 게 아니고, 믿으니까 사실이 되는 거야.’

진규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낯선 남자와 오랜 시간 다정히 얘기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 진규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저 남자와 바람이 난 게 아니고, 상냥한 어머니가 이웃사람과 인사를 나눌 뿐이라고. 서로에 대한 인사가 조금 길어진 것뿐’

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런 여자가 아니니라고 믿었다.

   ‘나의 어머니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지.’

라고 생각하며 진규는 어머니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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