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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령 Dec 18. 2023

중년의  계절

낼모레  오십  시즌 1

   “안 더워요? 나 요즘 갑자기 이렇게 확 더워요.”

몸의 상체만 덥다. 등과 목 얼굴 전체에 땀이 맺힐 만큼 열감이 있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땀이  식는 과정에서 서늘함이  느껴진다. 이런 현상이 하루에 몇 차례씩 반복되어 모임이나 일 할 때 곤란한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내 맘대로 이름 붙여 ‘3차 성징, 갱년기’의 시작이다. 청소년 시절 2차 성징도 어느 날 예고 없이 시작되더니, 갱년기의 시작도 뜬금없이 왔다. 나의 2차 성징을 목격한 엄마는 내게,

   “길거리에 나뭇잎만 굴러가도 웃는 사춘기가 시작되었구나.” 하셨다. 이젠 길거리에서  웃기보단 화가 난다. ‘거리의 흡연자들 그들의 담배연기를  피해  빠르게 앞서 걷는다.  아들만 둘 키우며 고인 화와 큰 목청, 분노가 섞인 서운함이  가득하다. 나의 우울감이나 화는‘있다가  사라지는  나의  모든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일까? 작별인사 일까?


  몇 달 전 운전 중 우연히 들은 가수 ‘마야의 나를 외치다’의 가사에 울컥 해 눈물이 볼을 타고 쭈르륵 흐른다. 아주 오래전  나의  20대  마지막 순간쯤 발표된 곡이다. 그 당시 육아로 바쁜 나날들이어서 ‘노래 좋네. 역시 가창력이 장난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들었던 곡이다.

   20년이  지난  오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의 울림은  등 토닥, 마음  따뜻 위로였다.


   “(생략) 힘을 내야지 절대 쓰러질 순 없어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꿈도 꾸었었지 뜨거웠던 가슴으로 하지만 시간이 나를 버린 걸까 두근거리는 나의 심장은 아직도 이렇게 뛰는데 절대로 약해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지금 이 순간 끝이 아니라 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외치면 돼 지쳐버린 어깨 거울 속에 비친 내가 어쩌면 이렇게 초라해 보일까 똑같은 시간 똑같은 공간에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끝은 있는 걸까 시작뿐인 내 인생에 걱정이 앞서는 건 또 왜일까 강해지자고 뒤돌아보지 말자고 앞만 보고 달려가자고 절대로 약해지면(반복)”     


   구구절절 딱 내 마음이다. 절대로 쓰러질 수 없는 중년. 조금 더 지켜야 할 자식과 앞으로 계속 지켜드려야 할 부모님과 나의  남은 삶이  숙제 같다. 

싹을 틔워낸 봄을 닮은 유년기와 화려하고 뜨거운 여름의 20대~30대를 지나, 열매를 맺어 풍성해진 것들을 걷어들어야 하는 가을 같은 중년의  나.  삶의  가을에 선 나는 보기 좋게 풍성하지 않고,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인 것들은   잘 익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나이쯤 가져야 한다는 것들은 내 것이 아니고, 없어도 되는 대출금은 내 것이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내게 행운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이 귀했다. 어느 날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나 싶은 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곤  했다.


   지인들은 내가 걸을 때 어깨를 구부정하게 앞으로 숙여 걷는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럼 나는 “오늘 중력이 좀 세.”라고 말하며 웃는다. 생각해 보면 내가 당당하게 걷는 곳은 정해져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미고서, 명절 선물로 들어온 백화점  상품권과  카드를 가지고, '펑카'가  아닌  '당당함' 가득한 날 백화점에 입성한다. 반짝이고 깨끗한 타일과 밝은 조명아래 가지런히 진열된 상품들이 계절 꽃처럼 풍성하고 화려하다. 물론 내가 카드로 긁을 수 있는 금액엔 한계가 있으니 세일이라는 글자를 따라 동선이 정해진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당당한 날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까?


  10대나 20대에 하던 ‘나 뭐 하지? 내가 잘하는 게 뭐지?’하던 고민은 지금도  여전하고, 점점 더 심각해진다. 직장에서 정년퇴사를 앞둔 지인들의 걱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회사 그만두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앞으로 뭐 해 먹고살아야 하지?”라는 넋두리 끝에  미지근해진 까만  커피   모금이 넘어간다.

학교급식이  없었고, 스타벅스가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으며, 커피숍엔 커피와 파르페, 오렌지 주스 말고는 특별한 음료가 없던 시절에 나의 고민은 차라리 희망적이었다. 아직 인생에 남은 시간이 많았고, '이거 하다 안 되면, 저거 하면 지.'라는 의욕과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중년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엔 남은 시간은 짧고, 기회는 적다. 지나 온  삶 속에  개미가 먹이를 나르듯, 조금씩 애써 갖추어 놓은 것들은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하고, 실수로 잃게 된다면 그다음은 기약할 수 없다.


   늦은  퇴근길에 종이박스를 울타리처럼 쌓아놓고, 나이 많은 어머니와 30대 청년이 거리에서 노숙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처음엔 그분들의 행색이 거리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생각과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  그분들을 다시  보았을 땐, 아직도 안정된 곳에 자리를 잡지 못했네. '비가 오는 날은 어쩌지? 날이 추워서 거리에서 지내는 건  고통일 텐데.' 하는 염려를 했다. 그분들과 멀어지는 나의 발걸음 속에, 나와 가족이 안전하고 깨끗하게 누울 수 있는 집이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감사함이  깊어졌다.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 동안 내가 또렷이 잘하는 것을 모르고, 잘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늘  하고 싶은 것에 마음을 두며 노력했다.  많은 시간 여기저기를 헤매고 헉헉거렸다. 우당탕탕 실수하며, 허우적거리다 해야만 하는 것을 겨우겨우 해내며 지금 여기 도착했고 머물고 있다. 

산속 이름 모를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열매 같은 작은 약들을  규칙적으로 챙겨 먹어야 하는, 내 나이 낼모레 오십이다. 이제 잃어야 하는 것들을 보살피며 살아내야 한다. 사라지고 내어 놓아야 하는 것들의 시간을 최대한 늦춰 볼 욕심으로 안 먹던 종합 비타민에 식품 보조제까지 챙겨 먹는다. 내 것이었던 것들을  아주 천천히 내어 놓고 싶다. 신년이 되면 용 하다는  점집도 가고,  봄이 오면 꽃구경도 하면서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 시간 맞춰 약 챙겨 먹으며 어깨 펴고 당당하게 노년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뒤돌아 본 내 인생에 대한 후회보다, 앞날에 대한 감사함이 가득한 날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년의 풍성한 가을이 짧아도 노년의 희고 고운 겨울은 따뜻하겠지.   마시멜로가  녹아  부드럽고 달콤한 핫초코가 어울리는  계절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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