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오버 -한스 페터 마르틴-
신자유주의는 다수가 치른 대가를 소수가 누리는 프로젝트이다.
-제임스 몬티어-
1944년 미국의 주도로 협의된 브레튼우즈 체제가 1971년 미국 대통령 닉슨에 의해서 종료됨에 따라 새로운 경제체제의 서막이 올랐다.
대공황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됐던 케인스주의 경제 모델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의 정부는 시카고학파가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유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정부의 규제는 완화되고, 정부의 지출 또한 줄어들었다. 공기업의 민영화와 노동조합의 약화도 동시에 시작됐다.
1970년대에 태동해 1980년에 싹을 틔우고 1990년 세계화에 함께 신자유주의는 시대를 대표하는 경제의 세계관으로 자리 잡았다.
1991년은 중국의 WTO 가입, 그리고 소련의 붕괴가 일어난 해다. 이 두 격변은 세계를 세계화라는 덫에 빠지게 만들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가장 큰 정적인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붕괴로 최고의 정치, 경제 체제라는 자만에 빠지게 된다.
서구세계는 자신들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중국을 서서히 잠식해, 중국 역시 열린 사회로 만들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중국은 스스로 약소국의 이미지를 가지고 WTO에 가입했고, 값싸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노동력을 서구세계에 제공했다.
전 세계의 기업들은 앞다퉈 중국으로 진출했다. 중국에 공장을 짓고, 값싼 노동력을 마음껏 부리며 원가를 절감했다.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일단 부작용은 차치하고 당장 경제 수준만 놓고 보자면 분명 그 이전과 다른 질적으로 나은 삶을 제공했다. 이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것은 서구 자본주의의 최상위 계층이다. 이들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지역,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 쏟아져 들어오는 동구권의 노동력을 값싸게 부리며 원가를 절감했다.
이 시기의 특징을 보자면 값싼 노동력 덕에 인플레이션은 억제되었지만, 브레튼우즈 협정의 종료로 금본위제가 철폐되자 시중에 통화량이 급증했고,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의 소비가 늘어났다.
물가는 안정되고, 임금은 제한되었기 때문에 최상위 계층의 자본가들은 이 시기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물가와 임금은 낮았지만 자산(부동산, 주식 등등)은 크게 상승했다. 각국의 정부와 중앙은행은 소비자 물가만 신경 쓰고 자산 가치의 상승은 인플레이션 지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산을 많이 소유한 최상위 계층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에 정부 개입을 막고, 규제를 최소로 하기에 자본가들은 이를 이용해 큰돈을 번 것이다.
다음으로 수혜를 입은 것은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도 양극화에 피해자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아시아 사람들, 특히 동아시아 사람들의 삶의 질을 크게 높여주었다.
그럼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어떤 계층일까? 바로 서구의 선진국 중산층이다. 이들은 중국과 아시아, 그리고 동구권 노동자에게 직업을 뺏겼다. 게다가 임금 협상력이 낮아져 제한된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부동산이나 주식과 같은 자산을 갖지도 못했다.
소비자 물가는 제한됐지만 자산가치 인플레이션은 진행 중이었기에 이들처럼 자산을 소유하지 못하고, 현금밖에 없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손해가 누적됐다.
자영업이나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가격경쟁에서 뒤처져 공장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지역사회를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다.
중산층의 몰락은 서구 선진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수혜를 입은 아시아 국가의 사람들도 분명 삶의 질은 이전보다 나아졌지만, 자산가치의 상승과 임금제한으로 양극화에 시달리게 됐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가져다줄 장밋빛 미래는 어느새 어두운 먹구름으로 바뀌었다. 서구사회는 자신들의 기대처럼 중국의 정치체제를 열린 사회로 만드는데 실패했다. 중국은 언더독의 이미지를 가지고 서구사회를 받아들이는 동안 철저하게 유리한 조건을 내세웠다. 그들은 제조업을 받아들였지만, 외국계 기업의 중국 사업은 방해했다.
국가적으로 산업스파이를 양성해 기술을 빼내었고, 중국 특유의 국가 운영방식이 이를 보호했다. 특히 그들이 지금까지도 서구사회에 오픈하지 않은 것이 금융시스템이다. 철저하게 자국의 금융시스템을 보호했다.
이런 불평등한 구조는 중국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을 줬다. 자본주의는 반드시 민주주의여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중국은 답을 했다.
덩샤오핑은 신자유주의자인 하이에크에게 경제 조언을 받았고, 선부론과 흑묘백묘론을 내세워 자국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이는 중국의 양극화를 부추겼지만 엄청난 성장률로 이를 달래 줄 수 있었다.
중국은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정부정책을 편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중국 국민들이 억압되고 제한된 환경에서 살면서 봉기하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다. 억압은 혁명을 부르는 법인데 중국에서는 1976년 천안문 사태를 마지막으로 자유를 향한 봉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중국은 천안문 사태 이후 특별한 전략을 사용한다. 그것은 중국의 사회 신용 제도인데 개인과 기업의 행동을 전반적으로 감시하고 평가하며, 개인 금융에 대한 신용평가를 한다.
우리나라의 신용등급과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그 개념에서 큰 차이가 있는데, 우리나라 신용등급은 대출 여부나, 대출 금리에 영향을 주지만, 이를 평가의 지표로 보지 계층 이동의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신용평가는 높은 점수를 받을수록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계층을 이동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기대한다.
단순히 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법을 잘 지키고, 국가에 순응할수록 사회적, 경제적으로 더 높은 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는다는 의미다. 즉 중국은 국가적으로 상, 벌점 제도를 운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람들 스스로에게 기대를 심어줘서 국가에 대항하지 못하게 만든 시스템이다.
이는 사람의 본성을 잘 이용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성장에 대한 기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중국에는 바오빠, 바오치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경제성장률의 마지노선이 7%~8%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중국은 매년 수많은 취업준비생이 사회로 진출한다.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높은 경제성장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단순히 국가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성장률 부진은 중국의 국가 사회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불평등 속에 살면서도 국민 대다수가 다음 세대에 더 나은 경제적 기회를 제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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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불러온 양극화가 선진국의 중산층을 무너뜨렸듯이, 이제 세계화의 수혜를 입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에게 그 여파가 돌아오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성장이 위해 시장경쟁을 촉진한다. 부의 분배보다는 성장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정부는 시장에 최소한으로 개입하고 규제를 철폐하고, 법인세를 감면한다. 이때 시장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자본이 많은 쪽이 유리하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면에서 부유층과 대기업이 먼저 성장하고, 이후 부는 자연스럽게 아래 계층으로 확산된다는 낙수효과는 중국의 선부론과 다르지 않다.
부유층이 더 많은 돈을 벌 때 다수의 개인은 희생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노동자가 버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성장의 대한 기대다. 경제학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이 기대는 국가가 경제 발전으로 풍요로워지면 자식들은 그 효과를 볼 수 있기에 개인이 희생의 평가에 대한 가치가 달라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국가의 경제는 발전했고, 세상은 풍요로워졌지만 양극화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분명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고, 명목 임금은 더 많이 받지만, 계층에 대한 이동, 성장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니 개인의 희생의 평가 가치가 절하된다.
부모님의 희생을 보고 자랐고, 그들의 희생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 이상 희생을 원하지 않는 세대가 등장했다. 평생 일만 해온 부모가 노후를 포기해 가며 자식을 양육했지만, 그렇게 자란 자식은 부모를 부양할 만큼 성장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월급은 올랐지만 그만큼 물가, 세금, 자산가치, 기타 지출 비용이 올라 양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질적으로는 부족한 삶이 계속되는 것이다.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식을 낳지 않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거대한 세계관의 부작용 탓이다.
누가 돈을 벌었는가? 누가 무너졌는가? 앞으로 누가 더 돈을 벌 것이고 누가 더 무너질 것인가?
"임금과 집값의 격차도 엄청나게 커졌다. 이제 평균소득 생활자에게, 즉 열심히 일하는 중산층에게 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꿈은 환상이 됐다."
나는 전업투자자로서 돈을 벌기 위해 돈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다닌다. 그것이 나의 직업이다. 표면적으로 돈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다니면 이것이 음식점인지, 쓰레기통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조금 귀찮고, 어렵고, 복잡하고, 힘들지만 세계가 굴러가는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세계관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초월하고자 노력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거대한 세계관에 의해서 움직인다. 한 개인은 거대한 역사의 파도 속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자신이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그 세상은 그 사람의 전부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라는 것은 결국 세계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국가, 인종, 유전자, 사회, 문화, 역사, 경제, 과학, 철학, 정치, 부모님, 주변 사람, 스승, 학교, 등등 우리는 수많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수많은 것에 영향을 주고 살기 때문이다.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도, 결국 그 방식은 수많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방식이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세계관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초월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 개인은 거대한 세계관 앞에서 한낱 작은 존재일 뿐이지만, 결국 세계관을 깨뜨리는 것도 한 개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지지하는 정치 성향이나 경제 원리, 투자 철학, 삶의 가치관은 분명 존재하지만 이 또한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어떤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내가 원하지 않는 흐름 속에서 살 수 있다고 이해하고, 인정하는 편이다.
앞서 살펴본 신자유주의나 세계화를 거부하거나 부작용만을 알리고 싶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폴리비우스의 정체 순환론을 지지하는 편이다.
어떤 정치나 경제도 하나의 체제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폴리비우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국가의 정치 체제가 일정한 주기를 거쳐 순환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치 형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나퀵클로시스(정체 순환론)" 개념을 제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력한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는 군주의 힘으로 처음에는 질서가 잘 유지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군주제[는 권력을 남용하고, 사치하고, 국정에 소홀한 폭군을 등장시킨다. 폭군으로 변질된 군주제는 귀족들에 의해서 무너지고, 엘리트들이 직접 통치하는 귀족주의가 이를 대신한다. 하지만 귀족주의 역시 시간이 지나면 부패한다. 소수 기득권만 이점을 누리는 귀족제는 곧 과두제로 타락한다. 압제는 혁명을 부른다. 과두제는 곧 민중의 봉기를 부르고, 시민들에 의해서 무너진다.
혁명은 민주주의를 만들고 발전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민주주의도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의 자유에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정치는 인기투표로 변질되어 포퓰리즘이 극심해지고, 중우정치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상황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의 힘을 원하게 되고, 다시 군주제(독재)로 회귀한다는 이론이다.
폴리비우스의 순환론에 따르면 어떤 한 체제는 변질되기 마련이다. 즉 우리가 현재 지지하는 어떤 체제는 결국 우리의 손자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우리가 우리의 윗세대를 비난하듯이 말이다.
결국 내가 투자자로서 해야 할 일은 현재의 세계관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매몰되지 않으면서 이 세계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해야 된다.
세계화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끝이 도래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던 국가들이 여러 가지 이유(정치, 지정학, 경제 등)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값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기 어려워진다.
성장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자 선진국의 청년들은 결혼하지 않고, 출산을 하지 않아 인구가 줄어든다.
반대로 노령인구는 많아지고,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노인 부양비가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비정상적으로 낮은 금리 체제를 유지했다. 1960~1970년대를 강타한 인플레이션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가라앉았고, 오히려 디플레이션의 공포에 시달렸다. 이는 결국 2000년대 낮은 금리정책으로 이어졌고, 이제 세계화가 끝나는 시점이 오면 인플레이션 공포는 다시 세계를 뒤덮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극심한 양극화를 불러왔는데, 세계화의 종말로 인한 인플레이션마저 양극화를 더 심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럼 이런 세계관을 이해했다면, 인정한다면 최소한으로 자산을 지키고, 자산을 증식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왜 세계화는 최상위 계층의 부를 크게 늘렸고, 인플레이션은 왜 그들의 부를 또 늘려준다는 말일까?
멱함수 법칙은 이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
멱함수 법칙(Power Law)은 특정 현상에서 큰 값들이 작은 값들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나타나는 패턴을 설명하는 수학적 법칙이다. 일반적인 확률분포와 달리, 일부 극단적인 값이 전체 분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쉽게 말해 멱함수의 법칙은 에너지가 2배가 되면 그 빈도가 4배 줄어든다. 이를 경제에 대입하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한 비율임을 알 수 있다.
자산이 2배가 많으면 그만큼 인구비중이 4배 줄어든다. 이를 반대로 설명하면 이렇다.
100억을 가진 사람이 2명 있다면, 50억을 가진 사람은 8명, 25억을 가진 사람은 32명, 12.5억을 가진 사람은 128명, 6.25억을 가진 사람은 512명, 3.1억을 가진 사람은 2,048명, 이런 식으로 쭉 이어가면 480만 원을 가진 사람은 830만 명, 120만 원을 가진 사람은 1억 3천만이 넘는다.
그러니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벌어들이는 실질적인 임금, 절대금액은 늘어났을지 몰라도, 최상위 계층과 격차는 좁힐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 속도는 더 가파르게 진행 중이며, 앞으로 더 심해질 예정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최상위 계층은 단순히 일정 비율로 더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더 부자가 된다. 예를 들어, 하위계층의 소득이 2배(150만 원 → 300만 원) 증가한다고 해도, 상위계층의 부는 2배가 아니라 10배 혹은 그 이상으로 증가할 수 있다.
명목임금은 올랐지만, 다른 비용이 더 많이 올랐고, 가장 크게 오른 것은 자산의 가치다. 임금은 자산의 가치를 따라갈 수 없는 구조다. 은행과 기업들은 성장에 투자하기보다 자산에 투자하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은 화폐가치 하락을 의미한다. 화폐가치의 하락은 자산가치의 상승과 반비례한다. 최상위 계층은 자산이 많다. 중산층 이하는 대부분 노동소득이 전부이기에 자산보다는 현금이 많다. 인플레이션은 중산층 이하가 가진 현금의 가치를 낮추고, 최상이 계층이 가진 자산의 가치를 상승시킨다.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세계화는 양극화를 불러오고, 그런 세계화가 끝나고 인플레이션이 찾아오면 양극화를 더 극단적으로 만든다.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양극화를 개인의 태만과, 적응성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정말 그런가? 쏟아져 나오는 자기 계발 서적처럼 열심히 하지 않아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최상위 계층과 격차가 벌어지는 것인가? 그들의 설명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게으르고, 태만하고, 열정이 없는가?
나는 나의 어머니를 대단히 존경한다. 그분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을 다하는 분이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가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가난은 결코 어머니의 잘못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막연하게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한탕주의에 빠졌고, 도박, 극단적 투자, 선물 옵션과 같은 것만 손댔다.
물론 나의 이런 행동까지 세계관을 탓하고 싶지 않다. 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세계관의 영향일 전혀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구원한 것은 책이었다. 나를 바꾼 단 한 권의 책은 없다. 그런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어쩌면 투자보다 더 지독한 복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효과 없고, 지루한 시간을 견뎌냈을 때 희미하게 어떤 것이 보인다.
나는 책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들을 배웠다. 그래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나는 똑똑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 덕분에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고, 내가 지금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알게 됐다.
누군가를 가르칠 만큼은 안되지만 적어도 내 앞가림은 하게 됐고, 투자에 눈을 떴다. 투자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노이즈에 노출됐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지금 누군가로부터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는다. 전문 용어로 백수다. 하지만 내가 살았던 삶 중에서 가장 풍족하고, 여유롭게 살고 있다. 책 덕분이다.
나는 내 이름으로 된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아내와 아이도 있다.
어려웠던 내가 지금의 부를 만든 것은 8할이 운이었고, 2할이 세계관 덕이다. 운을 만난 것은 내가 세계관을 이해하고, 인정했고, 초월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양극화는 토마스 쿤이 말하는 혁명이 일어나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세계관은 양극화를 부추길 뿐이다. 이제 선택은 세 가지다.
1. 양극화를 만든 세계관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서기
2. 이대로 양극화를 인정하고 그대로 살기
3. 양극화를 만든 세계관을 이해하고 편승하기.
나는 겁이 많고 비겁하기 때문에 3번을 선택했다. 누군가는 2번을, 누군가는 1번을 선택할 것이다. 그냥 지켜볼 수도, 혹은 체게바라가 될 수도 없다면 투자자가 돼야한다.
양극화의 문제는 최상위 계층에 있는 부자들도 알고 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계층의 혁명이다. 그래서 그들은 안전을 위해 담을 쌓고(실제 담이다.) 그들만의 안전지대(뉴질랜드)를 찾아 떠나고 있다. 그들은 폴리비우스의 순환론을 잘 이해하고 행동하고 있다.
트럼프는 세계화가 미국의 국익을 헤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는 세계화를 끝내고 보호무역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동반할 것이다. 물론 단기간의 정세일 수도 있다.
브레튼우즈 협약에 경제적인 측면은 1971년 닉슨쇼크로 끝이 났다. 하지만 브레튼우즈 협약의 또 다른 보장 내용이었던 해상무역의 안전보장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 트럼프는 이마저도 끝내고자 한다.
양극화의 추세는 더 가파르게 진행될 것이다. 이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 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지하는 입장도 아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가 신자유주의 때문도 아니다. 나는 신자유주의가 필요한 시기에 대두되어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에는 반드시 필요했던 적절한 대체제였다. 대공황시기에는 케인스주의가 맞았다. 그때 미국 정보가 케인스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장기침체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을 것이다.(대공황의 여파가 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으니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사실이다)
각 시기에 필요한 체제가 대안으로 등장하고, 그것이 문제를 해결한다. 물론 어떤 한 체제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애덤스미스와 고전학파의 자유방임주의는 대공황을 해결하지 못했고, 케인스주의가 이를 대체했으며, 케인스주의는 인플레이션을 감당하지 못해 신자유주의로 대체됐다. 신자유주의는 중산층의 몰락과 양극화를 불러왔고, 이는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이끈 가장 큰 힘이 됐다.
어떤 시기에 꼭 필요한 대안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영원히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를 욕할 필요도 없다. 그땐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지 모르니 말이다.
나는 그저 투자자로서 이 세계관을 이해하고 내가 할 일을 찾고, 최대한 부의 흐름에 편승하고자 할 뿐이다.
게임 오버 -한스 페터 마르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