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시기에 인연이 몰려올 때가 있다. 나는 그 시기를 '밀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시기에 반드시 내 짝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물이 빠져나간 후 내 손에 빈 조개껍데기가 아닌 진주 박힌 조개가 쥐어져 있길 바라면서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2년 전 가장 힘들었던 이별을 겪고 나서 그해 연말 소개팅을 두어 번 했다. 나는 가끔 인생이 짜인 각본 같다고 생각을 하는 게 당시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들의 나이가 신기하게도 스물아홉, 서른넷, 서른아홉이었다.
스물아홉 살은 포장마차에서 만났다.
3년 만에 소개팅을 받았는데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친구들에게 한탄을 하고 있었다. 내 한탄을 듣던 친구가 말했다.
"요즘은 개찰구 소개팅도 있대."
"응?"
"개찰구에서 얼굴을 보고 마음에 들면 만나는 거고, 아니면 다시 뒤돌아 가는 거야."
친구의 우스꽝스러운 소리에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났을까? 마음에 드는 이상형이 포장마차에 들어왔다. 개찰구 소개팅을 했더라면 당장 카드를 찍고 나갈 정도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외모였다.
내 시선을 의식해서였는지 그도 계속 나를 쳐다봤다.
눈치 없는 친구들은 너무 취했으니 자리를 이만 뜨자고 했고, 나는 한 병만 더 먹자며 졸랐지만 통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오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계속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웬걸? 그가 문을 열고 따라 나왔다. 그러고서는 핸드폰을 건네며 내 연락처를 물어봤다.
우리는 번호를 교환했고, 친구들과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확인했다.
풍선을 들고 있는 그의 사진을 보면서 내 친구는 "마술사 아니야?"라고 물었고, 나는 웃어넘겼다.
그리고 다음날 그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알게 됐다. 그는 정말 마술사였다.
E와 나는 서너 번 정도 만났다. 회사를 다니지 않아 평일에 시간이 많았던 E는 나를 자주 데리러 왔다.
카페에서 간단한 카드 마술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E는 우리가 첫눈에 반한 운명적 상대라고 믿었다. E보다 네 살이 많은 나는 우리가 운명이 아니라는 걸 두 번째 만남에 알았다.
잦은 연락이 부담스러웠다. E는 공연 때문에 연락할 시간이 적으니 틈날 때마다 전화를 자주 했다. 나는 내 시간을 방해하는 전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루틴도 맞지 않았다. 직장인인 나는 주말 데이트가 소중한데, E는 주로 주말에 공연 일정이 있었다.
어쩌면 E의 상황을 이해해 줄 만큼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거다. 다름을 감수하기에 내가 너무 나이가 들었던 것도 있다. 그렇게 외모만 보고 만났던 E와의 만남은 끝났다.
30대의 나는 안정적인 연애를 추구한다는 걸 알았다.
E와의 썸이 끝나고, 다른 두 명과 소개팅 이후에 연락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 명은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서른넷이었고, 다른 한 명은 여섯 살 많은 서른아홉이었다.
나는 이제 둘 중 한 명을 선택하기로 했다.
둘을 선택했던 기준은 두 가지였는데 둘 다 바보 같기 그지없다.
첫 번째는 혈액형이었다. 내가 반드시 버려야 하는 습성 중 하나가 혈액형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거다.
나는 O형 남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나름 내 과거 연애로부터 쌓은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한 거였다.
마침 한 살 많은 사람은 O형, 여섯 살 많은 사람은 B형이었다.
두 번째는 누가 나를 위해 먼저 데이트를 신청 하는지 봤다.
당시 나는 누구보다 바쁜 연말을 보냈기에, 만날 수 있는 날이 제한적이었다. 둘 다 그걸 알고 있었다.
먼저 데이트를 신청한 사람은 B형 오빠였고,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8개월 후 헤어졌다.
다음 번 밀물 기간이 온다면, 나 자신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선택을 포기하는 용기를 가져보자.
(사진 출처 : tvN '유미의 세포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