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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Nov 23. 2022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이라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이라고 그러셨지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맞아,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어.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네.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은폐가 곧 거짓이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https://blog.naver.com/2gafour/222934179379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니 느낌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내 머리를 내 얼굴을 딱딱한 무언가에 부딪혀댔다. 그 결과 나는 며칠째 아침에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채 운동을 나가는 것 말고는 집에 틀어박혀 있는 중이다. 자발적 격리 오늘로 4일째. 코로나에 걸린 것도 아니기에 7일씩이나 격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오늘은 나가보려고 한다.      



나는 한때 그리고 여전히 “망각은 나의 힘”

https://brunch.co.kr/@2gafour/60

이라 외치며, “나는 원래 잘 잊어버려. 다 기억하면 힘들어서 어떻게 사니?”라고 나의 가벼움을 당당하게 드러냈었다. 그런데 위 문장을 읽는 순간 그동안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얼마나 기가 찼던 것인지 이기적이었던 것인지 유치했던 것인지 확 느껴져서 머리가 핑 돌기까지 했다. 그래서 머리가 핑 돌만큼 독주를 들이부었는데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지울 수 없는 상처들만 잔뜩 남았다.      



왜 나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걸까?           



성인이 자기 선택과 의지에 따라 술을 마시고 심신미약 혹은 심신상실의 상태에 이르러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런 상태를 유발한 행위 자체에 이미 위법성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 최소한의 이웃 - , 허지웅 산문집
 

https://blog.naver.com/2gafour/222936952348



나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 술을 마셨고 만취 상태에서 타인은 아니지만 나를 해하는 행동을 한 나는 법을 어긴 건 아니겠지만, 무언가를 어긴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을 어긴 걸까? 왜 그런 걸까?      



4일 동안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 떠올랐다. 내 행동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 아니 알고 싶지 않다. 그날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아니 사실은 너무 궁금하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궁금하지만 알고 싶지 않다. 알고 싶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다. 마주할 용기가 안 난다.      



누가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 물리적으로는 멀리 있지만 우선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보살펴주신 부모님, 그리고 현재 물리적으로나 법적으로 가장 가까운 남편과 딸. 하지만 가족은 너무 가깝기에 때로는 서로를 더 모를 수 있다고 아니 어쩌면 모르는 부분을 남겨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 역시 그들을 다 아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도 나를 다 알 수는 없다.   

   


그럼 그다음은 친구. 많은 이들이 말한다. 오래된 친구들, 어릴 때 친구들을 만나면 너무 편하고 좋은데, 나누는 이야기들이나 서로 오픈하는 고민의 깊이가 딱 그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나도 그렇다. 특히 내 친구들은 내 기준에서는 나보다 훨씬 선하고 올바른 사람들이어서(물론 그래서 너무 소중하고 고맙지만) 그들에게는 절대 나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드러낼 수가 없다.     

 


동료나 지인. 말해 뭐해 더더욱 선을 지켜야 할 존재들이다.

      


그래서 때로는 아니 어쩌면 꽤 자주 나는 낯선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 처음 본 사람들, 안 친한 사람들에게 내 속마음을 훅 털어놓을 때가 내 민낯을 확 드러낼 때가 있나 보다. 그 사람들은 무슨 죄람.     

         


가면을 쓴 채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다가는 미칠지도 모른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아도 좋은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런 친구는 많을 필요가 없다. 사실 많을 수도 없다.   - 살고 싶다는 농담 - , 허지웅 에세이  

https://blog.naver.com/2gafour/222915490737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아도 좋은 친구. 최근에 그런 친구를 잃었다. 나를 오래 봐온 것이 아니었는데도 나의 불안한 생각과 거친 눈빛을 단번에 알아봐 주고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공감하려고 내 얘기를 들어주려고 애써주던 친구. 그친구의 상실이 지금 내가 이렇게 비틀거리는 이유인 걸까.그럼 내가 똑바로 걸어가려면 그 친구를 다시 내 인생에 불러와야 하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그런 친구를 찾아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런 친구가 없더라도 내 스스로 호흡을 가다듬고 눈에 힘 빡 주고 내 앞에 펼쳐진 길을 걸어가야 하는 걸까.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 걷는 것은 산문이고 춤추는 것은 시지.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고 사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춤이 된다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나는 지금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이어령 선생 못지않게 몸치인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춤이라는 것을 제대로 춰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빈 문서를 띄워놓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으로 나의 춤을 추고 있다고 하기에도, 술에 취해 밤거리를 비틀거리다 쿵 쾅 해대는 부질없는 몸짓이 나의 춤이라고 하기에도,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 나는 춤추기를 멈추어야 하는 것이겠지. 아니면 똑바로 걷기부터 다시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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