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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l 05. 2023

161025-01

카페에서 말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데시벨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


H의 근무 시간이다.


근무 장소는 M대학교 맞은편의 커피전문점 2층 창가 자리.


제일 안쪽 자리에 가방을 놓고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켜고 마우스와 전자사전, 그리고 A4용지 10장을 꺼내 놓으면 근무 준비 완료.


1층으로 내려가 오늘의 커피 그란데 사이즈와 베이글과 크림치즈를 주문하고 잠시 후 쟁반에 들고 올라오면 본격적으로 근무가 시작된다.


H는 번역가이다.


하지만 유명한 외국 작가의 신작 소설 같은 재미있는 내용이나 전문 학술지 같은 깊이 있는 내용을 번역하는 번역가가 아니라 번역개발원에 소속된 초벌번역가이다. 초벌번역가인 H에게 요구되는 것은 영어를 한글로 그 의미가 전달되는 수준으로 번역하는 능력이다. 초벌번역가인 H가 1차로 번역한 내용은 개발원에 소속된 그다음 단계의 번역가가 다시 매끄러운 문장으로 고친다. 초벌번역가에게는 A4 1장당 10,000원~15,000원의 번역료가 주어진다. H는 초벌번역가 중에서는 나름 전문 영역에 특화된 번역가여서 장당 15,000원을 받는다. 매일 10장씩 번역해서 하루에 15만 원을 번다. 일주일 중 하루는 쉬니까 일주일에 90만 원, 4주에 360만 원을 번다. 하루 근무 시간을 더 늘리면 수입도 늘어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집이 아닌 카페에서 번역을 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다. 처음에는 집에서 했었다. 그다음은 도서관. 하지만 집과 도서관은 H에게는 너무 조용했다. 그때는 하루 종일 해도 5장도 못했다. 근무 시간에 비해 버는 돈이 너무 적어 근무 장소를 바꿔봐야겠다 생각하고 어느 날 큰맘 먹고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그전에는 한 번도 혼자 카페를 가 본 적이 없어 처음에는 커피를 주문할 때도 어색하기만 했다. 어색함을 극복하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3시간 만에 7장을 번역했다. 그때부터 매일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출근했고, 하루에 5시간, 10장으로 작업량을 정했다.



집이나 도서관보다 카페에서 번역 작업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음악 소리와 사람들이 내는 소리였다.


음악 소리는 집이나 도서관에서도 음악을 틀어놓거나 이어폰을 끼면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카페에서 들리는 음악은 직접 선택하고 직접 트는 수고를 줄여준다. 그냥 자리에 앉는 순간 귓가에 들려온다. 그리고 대부분 팝송이거나 연주곡이기 때문에 가사 보다 멜로디에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귓가에 멜로디만 얹은 채 번역작업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내는 소리는 집이나 도서관에서는 만들어낼 수가 없다. 카페에는 아주 소란스럽지도 그렇다고 아주 고요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소음이 항상 존재한다. 그 딱 적당한 소음이 오히려 H의 집중력을 높여주고 잠깐의 환기가 필요할 때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피로한 눈과 손을 쉴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사람들의 대화를 5분 이상 들어본 적은 없다. 카페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라는 것이 대부분 단편적이고 일상적이며 소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5분 가까이 듣고 있으면 이내 다시 번역 작업을 하고픈 욕구를 느끼게 된다.



H의 꿈이 처음부터 번역가였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피아니스트, 발레리나, 과학자, 대통령, 변호사, 의사 등의 다양하고도 막연한 꿈리스트를 거쳐 고등학생 즈음 H가 구체적으로 그렸던 꿈은 기자였다. 기자 중에서도 방송기자.


중학생 때인가 저녁에 뉴스를 보다가 어떤 여기자가 바바리코트를 입고 에펠탑을 배경으로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 소식을 보도하는 모습을 본 이후, 막연하게 저 여성 참 멋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보도 말미의 “ooo 뉴스 ooo이었습니다.” 그 멘트는 그날 이후 H가 혼자 거울을 보며 연습하는 멘트가 되었다. 방송기자가 되어 해외에 특파원으로 파견근무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었다. 그리고 매일 신문을 정독하고 저녁 9시의 메인뉴스를 시청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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