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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Nov 15. 2021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눈앞이 하얘지고 머릿속이 캄캄해질 때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왔는 데 창밖 너머 온 세상이 하얬다. 눈이 왔나? 아니다. 안개였다.  


   

아파트 이름에 ‘리버뷰’가 들어가는 곳에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종종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처음 이런 현상을 접했을 때는 온 식구가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놀라 창문에 옹기종기 붙어 신기해하곤 했다. 눈을 조금이라도 창문에 더 가까이 붙이면 뭐라도 더 보일까 싶어 최대한 얼굴을 창문에 붙인 채 “와 정말 앞이 하나도 안 보인다.”하며 약간의 두려움에 대부분의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뭐 그려려니 한다.      


딸아이 등교할 때 아침 운동을 하러 같이 나오며 사진이나 찍어놔야지 했다.      


안개로 인해 운동을 하면서 약간의 신기한 경험을 했다. 요즘에 딸과 시간 날 때 넷플렉스로 “별에서 온 그대”를 시청 중인데 드라마 속 도민준을 눈앞에서 본 것 같은 경험이었다. 내 앞에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가 걷고 있는데 내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인지 나와 같은 방향으로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가 분간이 안되었다. 안개가 없었다면 바로 파악이 되었을 텐데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 잠시 다른 데를 보고 걷다 다시 앞을 봤는데 정말 1초 만에 그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많은 인간들이 갖고 싶어 하는 ‘순간이동’ 능력을 지닌 사람을 내 눈앞에서 본 건가 하는 마음에 잠깐 설레었는데, 코너를 돌자 다시 앞에 그 사람이 보였다. 여기서 포인트는 잠깐 사이에 나와 그 사람의 거리가 멀어지자 안개에 파묻혀 아예 그 사람이 안보였다는 것이다. 안개의 위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안개란 국어사전에 의하면 지표면 가까이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부옇게 떠 있는 현상이며,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과학에서는 기체인 수증기가 액체인 물이 되는 응결 현상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응결 현상으로 안개뿐 아니라 구름과 이슬도 발생하는데 이슬은 풀, 나무 등에 맺히고, 안개는 지표면 가까이에 떠 있고, 구름은 하늘에 떠 있는 즉, 발생 장소에 따라 구분된다고 한다.        

      

우리가 보통 앞이 잘 안 보이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때 일상적으로 “눈앞이 캄캄하다”는 표현을 쓰는데 눈앞이 하얘도 비슷한 종류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다만, 인간이 기본적으로 어두울 때보다는 밝을 때 더 안전하다고 느끼니까 눈앞이 하얗다는 표현보다는 눈앞이 캄캄하다는 표현을 더 많이 쓰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얗다는 표현은 비슷한 상황에서 “머릿속이 하얘진다”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아무 생각이 안 날 때 그래서 역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때 머릿속이 캄캄해라고는 하지 않고 하얗다고 한다. 이 표현에도 뭔가 의학적 또는 과학적으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은 다른 글에서 다뤄보기로 하고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아침에 안개에 휩싸인 길을 걸으며 잠깐이 아니라 5m 앞이 아니라 영영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으면 어떤 기분일까 문득 생각해보았다.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시절, 과의 특성상 시각장애를 가진 교수님이 원장님이셨다. 나와 친한 동기의 지도 교수님이셨는데, 당시에 내가 학과 사무실에서 조교를 하던 때라 그 동기와 함께 그분의 길잡이가 되어 드렸던 적이 있다. 우리 과는 건물 두 개를 쓰고 있었는데 주로 한 건물에서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이 다른 건물로 이동을 할 일정이 생겨 그분의 보조가 되어줄 학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교수님이 시각을 못쓰는 대신 다른 감각이 굉장히 발달하셔서 그 보조의 역할을 아무에게나 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호출을 받았을 때 선택받았다는 기쁨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동시에 느껴졌지만 친한 동기와 함께라 마음이 좀 가벼웠었다.      


내 동기가 먼저 연구실에서 건물 입구까지 한쪽 팔을 부축한 채 모시고 나왔고 나는 건물 입구에서 인사를 하고 교수님의 다른 쪽 팔을 부축해 함께 다른 건물로 이동하였다. 늘 계시던 건물 밖을 나와 다른 건물로 이동하는 그 얼마 안 되는 거리가 참으로 길게 느껴졌었다. 그때 나는 간접적이었지만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이라는 문구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하지만 비장애인들에게는 그 절실함이 절대 와닿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그때 잠깐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때 느꼈던 그 기분은 아직 간직하고 있다.      


석사과정을 마친 후, 지역사회복지관에서 일할 때 인근 초등학교에서 장애인식개선교육을 진행했던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2명씩 팀을 이루어 한 명은 안대를 쓰고 다른 한 명이 부축을 해 종이컵에 물을 받아오는 활동을 했었다. 아직 어린 학생들은 그 활동이 시각장애인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옆에서 함께하는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는 깊은 의미를 헤아리기보다는 그저 눈을 가리고 수돗가에 가서 물을 받아 오는 행동이 재밌기만 했는지 어쨌든 학생들의 매우 적극적인 참여로 성공적으로 교육이 진행되기는 했었다.     


나도 그렇고 그때 그 초등학생들도 그렇고 대다수의 비장애인들 모두 살면서 잠깐씩은 장애인들이 얼마나 불편할까 얼마나 힘들까 느끼고 공감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뿐, 막상 나 자신이나 가족이 장애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저 남일일 뿐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떤 느낌일지를 간접적이고 잠깐이었던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떠올려보며 앞으로 누군가 앞이 보이지 않아 힘들어할 때 불편해할 때 옆에서 부축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로 마무리지으려니 너무 초등학생 일기 같지만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P.S 석사과정 재학 시절 다른 장애에 비해 시각장애인이 더 예민해 수명이 유독 짧다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보고 듣고 말하는 3가지 중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글을 쓰는 것으로 대체할 수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안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11년 전 비교적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교수님께 오랜만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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