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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터 Feb 29. 2020

2월, 부캐가 필요해

2020년 2월의 월말결산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까워 남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매달을 기록해둡니다.




2월에 읽은 책과 잡지

• 책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 박막례, 김유라

- 치매는 의미의 병이기에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해야 할 가치를 찾게 해야 한다'는 구절을 읽고 왠지 엄마에게 이 책을 권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역시 엄마도 읽으면서 그 부분에서 울림이 있었다고 말해줬다. 여행과 유튜브가 답은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유라 PD가 할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엄마에게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아줄 수 있을까.


책 <오늘도 남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 미즈시마 히로코

- 한번 마음을 다친 이후로 전에는 안 읽던 심리 책을 일부러 찾아 읽기 시작했는데, 그나마 이 책에는 마음에 와 닿는 문장들이 좀 있었다. 다 아는 뻔한 말이지만, 이렇게 괜히 남의 목소리로 듣고 싶을 때가 있다.

"'타인'은 자신을 평가하고 상처 주는 존재라는 작은 트라우마를 통해 만들어지는 '허상'입니다."

"만일 혼자 온 당신을 동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세계관이 좁은 거예요. 혼자서 행동할 자유를 모르는 사람이죠."

"자신이 좋다는 느낌은 웬만한 일로는 흔들리지 않는다.(중략) '기분 좋다'라고 느낄 때의 나는 주인공이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강인한 존재다."


잡지 <슈퍼마켓> 창간호 대만 타이중

- 그래, 이런 게 궁금했던 거다. 뻔한 맛집 소개나 '00에서 꼭 먹어봐야 할 n가지' 류의 겉핥기 식 큐레이션이 아닌, 슈퍼마켓을 통해 살펴보는 그 도시만의 고유한 식생활과 라이프스타일을 알아보는 잡지. 기획 의도에 맞게 동네 마트 세일 전단지 같이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디자인이라 보는 재미도 있다. 로컬 시장과 아침 식사로 시작해서 점심 메뉴, 간식, 편의점, 저녁 식사, 야시장으로 마무리되는 구성이 참신했고, 극과 극 입맛을 가진 4인이 현지의 다양한 버블티를 맛보고 평한 코너 기획도 인상적이었다. 잡지 한 권 읽었을 뿐인데 타이중 2박 3일 식도락 여행 뚝딱 한 기분. 빨리 다음 호 내주세요, 현기증 나니까.


• 책 <아무튼 문구> - 김규림

- 이렇게 한 가지 분야에 애정을 갖고 깊게 파는 사람들이 내 눈에는 참 매력적이다. 개인의 취향은 거창할 필요는 없다. 왜 좋아하는지, 그래서 내 삶이 어떻게 좀 더 나아졌는지를 설명할 줄 알면, 그게 취향이다.

"나는 쓸데없는 것들의 힘을 믿는다. 생필품들은 삶을 이어나가게 해 주지만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쓸모없는 물건들이다. (중략) 그래서 나는 내 일상 속에 항상 쓸데없는 일들이 조금씩 자리하고 있기를 바란다." 

 

• 책 <살 빼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데요> - 신한슬

- 이 책을 읽고 '진짜 스포츠'를 하고 싶어 졌다. 어렸을 때 동네 오빠들과 어울리며 농구를 즐겨하고, 학교 체육대회 발야구 경기에서 기가 막힌 플레이를 선보였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분명 그 시절의 나는 참 운동을 좋아했는데, 왜 지금 하는 헬스나 홈트는 성취감이나 짜릿함 없이 귀찮은 부담이 되어버렸을까. 어쩌면 '여성의 운동 = 미용을 위한 다이어트'라는 편협한 생각이 나의 몸까지 위축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책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 나태주

- 선물 받은 책이라 시집을 다 읽어본다. 타고난 비문학 인간에게 시는 난이도 최상이었지만, 그래도 여기서 마음에 드는 시 하나는 건졌다.

"두 셋이서 피어 있는 꽃보다 / 오직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이 더 당당하고 아름다울 때 있다 / 너 오늘 혼자 외롭게 / 꽃으로 서 있음을 너무 / 힘들어하지 말아라." - <혼자서 中> 


• 책 <생활을 아름답게 바꾸는 빛의 마법> - 무라즈미 지아키

- 요즘 들어 더욱 빛의 중요성을 체감한다. 재택근무로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있으면서 아침에 일어날 시간, 한창 일할 시간, 퇴근 후 휴식을 취할 시간을 구분해주는 건 오직 빛뿐이다. 햇빛이 들지 않는 방이었다면, 내 방에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세 개의 스탠드 조명이 없었다면, 아마 못 버텼을 것 같다. 


• 책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 위근우

- 지금 한국은 콘텐츠 과잉 사회지만, 누구 하나도 보면서 불편해하지 않고 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는 턱없이 부족하다. "강자가 안전한 곳에서 낄낄댈 자유를 위해 약자들의 실존적 자유가 억압된다면, 무엇을 억제해야 할지는 꽤 명확하지 않을까." 


2월에 즐겨들은 음악

•Lisa Ekdahl 'Open Door'

- 예전에 'I don't miss you anymore'을 즐겨 듣다가, 언젠가부터 이 노래 우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안 듣던 가수였는데. 우연히 재즈 라디오에서 듣게 된 이 노래 'Open Door'는 다르다. 어두운 밤에 침대에 누워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잔잔하게 치유가 되는 기분이 든다. 


• 그 외에 아이즈원 'Fiesta'와 방탄소년단 'ON'을 들어봤지만 재생목록에서 오래가지 못했다. 신곡에 흥미가 안 가는 요즘, 주로 유튜브를 틀어놓고 커버곡을 많이 듣는 편이다. 


2월에 즐긴 문화생활

• 종이잡지클럽

- 잡지 덕후의 로망 같은 곳. 우리의 관심사에 맞게 추천해주신 몇 권의 잡지 속에서 또 내가 몰랐던 세계를 발견한다. 하루 종일 이 안에 처박혀 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을 것 같다. 


• 영화 <작은 아씨들>

- 중간에 살짝 졸았는데도 이 대목에서 눈물 쏟았다지.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 지긋지긋해요. 그런데 나는 너무 외로워요."


2월에 즐겨본 콘텐츠

• 유튜브 '요즘 것들의 사생활'

- 우연히 비혼을 결심한 사람들의 인터뷰 시리즈를 보게 되었는데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이어서 결혼식 파업, 생활동반자, 비출산, 명절 파업 인터뷰가 줄줄이 나오는 걸 보고 기겁했다. 결혼은 해도 문제고, 결혼을 안 한다고 끝나는 문제도 아니구나. 이 사회가 주는 고통은 끝이 없구나.

 인터뷰를 보면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혼자 살고 싶은데 이왕이면 마음이 맞는 사람과의 느슨한 연결이 있으면 더 좋겠다 싶다. 슬슬 준비를 시작해야겠다. (* 함께 보면 좋은 영상 '낀낀세대' 40대 싱글로 산다는 것


•NIZI Project

- 진짜 오타쿠 같겠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아이돌 서바이벌의 노예다. 트와이스를 탄생시킨 JYP 걸그룹 서바이벌 <식스틴>을 워낙 재미있게 봤어서, 그 일본판이라고 할 수 있는 니지 프로젝트까지 보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와 연습생들의 실력 차이는 감안하고 봐야 하지만, 박진영이 연습생을 평가하는 관점과 그들에게 해주는 조언의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다. 벌써 눈에 띄는 참가자도 있다. 내가 본 여자 아이돌 중 가장 박력 있고 멋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마코 (리더해) 그리고 나연을 이을 에이스 리드보컬이 될 떡잎이 보이는 미이히 (센터해) 둘 다 현 JYP 소속 연습생들이라니, 역시 제왑 걸그룹은 믿고 본다.


•홈플러스의 소비패턴빙그레 인스타그램 

- 소비재 마케팅의 반란마음에 안정을 주는 고퀄 이미지에 화려한 필력과 찰진 드립이 어우러진 글이 좋아요를 부르는 '소비패턴'과 빙그레우스라는 만화 캐릭터를 만들어 병맛 감성 제대로 어필한 빙그레 계정이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핫하다. 이런 방식이 마케팅 측면에서 얼마나 효과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바이럴은 확실히 대성공. 광고를 넘어 보고 즐기는 콘텐츠, 다음 업로드가 기다려지는 콘텐츠가 되었다.  


2월에 잘한 소비

• 캔스톤 레트로 라디오 블루투스 스피커

- 밤에 할 일 다 끝나면 방에 형광등을 끄고 간접조명을 두세 개 켜 둔 채 휴식을 취하곤 하는데. 뭔가 부족해서 스피커를 들이니 방 안이 행복으로 꽉 차더라.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얄개툰 대사를 인용해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음악이 좋다 (x) 스피커로 음악을 즐기는 나.. 참 좋다! (o)"


2월에 맛있게 먹은 음식

• 내가 만든 명란 파스타

- 내가 했지만 진짜 맛있어서 세 번이나 해 먹었고, 가족들도 맛있게 먹어줬다. 팬에 올리브유 조금 두르고 마늘 볶고, 버터 녹여서 껍질 벗겨낸 명란 긁어 넣고, 익힌 파스타면과 면수 약간 넣고, 미친 듯이 비벼주면 끝! 환상!


• '평상시'의 당근케이크

건강한 비건 재료만 들어간 디저트가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다는 건 약간 충격이었다.  


2월에 마신 카페


2월에 잘한 일

• 흔히들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말하는 서른이 되어, 삶의 방향에 대해 의미 있는 고민을 시작한 시기다. 첫번째 고민은 위에서도 언급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지속 가능하고 안전한 독립생활을 위해 지금부터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그리고 또 하나는 앞으로 뭘 하며 살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지는 아직 고민 중이지만, 내 이름으로 된 나만의 콘텐츠를 남기고 싶다는 목표는 분명하다. 그런데 아무래도 다른 본업이 있는 직장인이다 보니, 이렇게 가끔 브런치에 글 쓰는 것 이상으로 일을 벌이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나에게도 부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다. 부캐는 본캐가 가진 단점과 제약에 영향받지 않아도 되고, 본캐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유재석이 안 하는 트로트를 유산슬이 하고, eaJ가 데이식스 Jae와 전혀 다른 음악 색을 들려주는 걸 보며, 새삼 이름의 힘이 크다는 걸 느꼈다. 나의 본명과 회사에서 쓰는 영어 이름은 커리어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자아인 본캐로, 그리고 '이리터'는 하고 싶은 거 다하며 창작하는 자아인 부캐로 철저히 분리한 삶을 살아보려 한다. 그렇게 해서 나든 이리터든 둘 중 하나라도 행복해진다면 성공이다. 


2월에 아쉬웠던 일

• 코로나 19 여파로 이번 달 예정이었던 베트남 가족여행과 다음 달 혼자 가려고 했던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취소했다. 수수료도 아깝지만 여행 준비하며 한껏 설렜다가 모든 게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경험을 두 번씩이나 하고 나니 마음속이 다 문드러져버릴 지경이다. 지금 딱 리프레쉬가 간절한 시점이었는데, 너무 답답하다.

•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재택근무하고, 약속도 다 취소되고, 밖에 나가는 것도 꺼려지니 삶이 너무 단조로워졌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가버리는 게 허무하다. 빨리 사태가 진정되어 모든 게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2월에 행복했던 순간

1. 다음 여행을 약속한 순간

2. 바다 보러 강릉 당일치기 여행

3. 예상 못한 곳에서 격려의 말을 들었을 때

"제가 아는 당신은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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