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리터 May 30. 2020

5월, 그저 잠에 들기만을 기다리며 "살아"

2020년 5월의 월말결산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까워 남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매달을 기록해둡니다.




5월에 읽은 책과 잡지

•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김하나X황선우

- 이렇게 살고 싶다. 우선 혼자만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다 30대 후반이나 40대가 되어서는 함께 살고 싶다. 꼭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치지 않고,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필요할 땐 기꺼이 가족이 되어줄 수 있는, 부담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끈끈하게 교감할 수 있는 파트너와 함께. 아무리 혼자 사는 게 편해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음이 주는 정서적 안정감과 적당한 긴장감이 나와 우리를 좀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두 작가의 케이스를 보며 이제 확실하게 알았다. 나이 들어가며 사는 것에는 독거와 결혼 말고도 분명히 다른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걸. 그걸 남들보다 좀 더 먼저 깨달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우리 부모님의 생각이 바뀌기에는,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기까지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는 그 전에 일을 저질러야 할 것 같은데. 용기 낼 수 있을까.

"사람은 멀리서 보면 멋있기 쉽고, 가까이에서 보면 우습기 쉽다."

"애정이 없는 대상일수록 일반화하기 쉽다. 뭉뚱그리고 퉁쳐도 상관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존재에 있어서는 아주 작은 차이가 특별함을 만든다. 그 개별성이 소중하고 의미 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안 하고 있어서 좋은 점은, 세상이 말해주지 않는 비밀을 하나 알게 되었다는 거다. 그게 뭐냐면, 결혼을 안 해도 별일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결혼 안 해봐서 아는데, 정말 큰일 나지 않는다."


• 책 <대도시의 사랑법> - 박상영

- 그냥 '도시' 들어가는 제목은 다 좋아하는 도시 처돌이라, '대도시'라면 얼마나 대단할까 하는 기대감으로 도전했다. 퀴어 소설인 줄은 전혀 몰랐어서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술술 읽혔다. "뭐야, 계곡물이야? 뭔데 이렇게 투명해" 같은 표현이 툭툭 나오는, 진짜 재미있는 요즘 소설. 이런 소설이라면 다시 조금씩 픽션을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월에 즐겨들은 음악

•DAY6 <The Book of Us : The Demon>

- 타이틀곡 'Zombie'가 진짜 깊은 우울을 경험해본 사람의 노래라는 게 느껴졌다. 잠시 활동을 쉬는 데이식스의 상황과 수개월째 무거운 마음으로 살고 있는 내 상황이 겹쳐지면서 이 노래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 마음 알아'라고 얘기하는 듯한 부담 없는 위로.

 역대 최고 순위를 기록한 앨범이기도 하다. 성적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데이식스의 노래를 듣고 좋아한다는 게 이 팀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니까. 시작부터 함께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뿌듯했고,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다. 우리 이제 더는 아프지 말고, 행복한 모습으로 공연장에서 만나 웃을 그 날을 기다리며.

 머글에겐 '좀비' 추천하고, 데이식스에 관심 보이는 사람에겐 '럽미올립미' 추천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때려쳐' 들으면서 헤드뱅잉 하는 민족 마이데이 답게 내 최애곡도 '때려쳐'.


아이유 '에잇' (Prod.&Feat. SUGA)

- 처음 듣자마자 '와! 정말 좋다' 하고 바로 확 빠져버린 신곡이 얼마만인지. 그날 퇴근길서부터 잠에 들기까지 내내 계속 들었다. 해 질 무렵 들었을 땐 청량하고 신나서 온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는데. 어두운 밤이 되고 다시 들어보니 이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노래였다. 영영 깨지 않고 싶은 악몽을 꿔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 그 안에서만 허락된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들. 당분간은 '오렌지 태양'을 보면 "우리가 슬프지 않았고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곳, 그 시간들이 그리워질 것 같다.


•그리고 쏟아져 나온 신곡들 중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살아남은

- 태연 'Happy', NCT DREAM 'Riddin', 오마이걸 'Dolphin'

-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샴푸의 요정', '거울 속의 미로', 'DRAMA'


5월에 즐긴 랜선 문화생활

•미국 HBO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 시즌 1~2

- 시즌1 마지막 에피소드의 충격이 다했다. "사건 당사자가 아닌 타인들이 등장하고 피해자들의 소리에 분노하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가 시작된다"라는 누군가의 리뷰 한 줄에 평점 5 주고 싶음. 여성들이 연대했을 때 더 큰 용기를 내고 함께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런 여성 서사 작품은 더 많이 나와야 하고, 더 많은 이들이 봐야 한다.

 시즌2에서는 트라우마를 간직하며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각자 더 큰 위기를 맞이하는 걸 지켜보며 심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그들은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여자들이라는 걸 알고 나니 어떤 마음들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I see a woman struggling, and who isn't?"


•영화 <트윈스터즈>

- 각각 미국과 프랑스로 입양되어 25년 동안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온 쌍둥이 자매 사만다와 아나이스의 재회 스토리. 입양을 다룬 다큐라 사연 많고 눈물 쏙 뺄 거라는 편견과는 다르게, 두 사람이 너무 귀엽고 유쾌해서 영화 보는 내내 웃느라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유튜브에서 발견하고, 페이스북으로 연락하고, 스카이프로 교감하는 SNS 시대의 가족 이야기답게 메시지와 이모지를 활용한 연출도 세련됐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다니" 아나이스와 몇 번 스카이프를 하고 사만다는 둘 사이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교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와 소름 돋게 잘 통하는, 또 다른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어떤 기분일까.


•영화 <레이디스 나잇 (Rough Night)>

- 이게 뭐얔ㅋㅋ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싶은 충격. 사람이 죽고 피가 철철 흐르는데 이상하게 별로 찝찝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여자 갖고 놀다 죽이는 뻔한 영화가 판치는 세상에서 성별만 바꿨을 뿐인데 확연히 다르게 다가오는 메시지. 그걸 무겁지 않게 풀어낸 유쾌한 B급 정서. 신선했다.

 캐스팅은 전혀 모르고 봤는데 '빅 리틀 라이즈'에서부터 매력 쩐다고 생각했던 조 크라비츠 언니가 나와서 반가웠다. 우울한 보니보다 시크한 블레어가 더 찰떡이네.. 매력 있다.. 하다가 입덕.


•유튜브 오리지널 <TWICE : Seize the Light>, <BTS: Burn the Stage>

- 슈퍼 아이돌의 월드투어 다큐멘터리라니. 콘서트 가고 싶은 덕후의 욕구와 해외여행 가고 싶은 방랑자의 욕구를 둘 다 대리만족시켜주는, 코로나 시대에 적합한 최고의 콘텐츠다!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봤다.

 무대 위에서는 늘 빛나는 모습이지만 그 이면은 늘 밝지만은 않다는 걸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다니. 뭐랄까, 나는 이제 그들을 일종의 직업인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지치고 아파도 해야 하고, 모든 걸 쏟아붓고, 실수하면 죄책감에 시달리는.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자기 일을 잘하고 싶어 하는 성실한 프로페셔널의 모습일 뿐이다. 왠지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서 성공했구나 싶은 존경심도 든다.


JYP NO.1 X 50 콘서트

- 티켓팅까지 했는데 일정이 안돼서 못 갔던 박진영의 작년 연말 콘서트. JYP에서 방구석 콘서트 느낌으로 고화질 클립 45개를 다 풀어줬다. 그가 작곡한 50개의 1위 곡들을 기념하는 공연으로, 90년대 박진영으로 시작해서 god, 비, 박지윤, 원더걸스, 2PM, 트와이스로 쭉 이어지는 셋리스트인데 그게 곧 나의 K팝 역사이기도 해서 보는 내내 과몰입했다. 모르는 노래 하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떼창 가능한 공연. 그중 특히 인상 깊은 무대는 발라드로 부른 Feel Special. 댄스곡인데도 들으면 슬프고 울컥하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5월에 즐겨 본 콘텐츠

•팟캐스트 <비혼세: 본격 비혼라이프 가시화 방송>

- 요즘 내 삶의 낙. 비혼세님과 친구분들의 미친 입담 덕분에, 들으면서 혼자 마스크 뒤에 숨어 얼마나 실실 쪼갰는지 모른다. 특히 캥작가님과 함께한 덕질편과 술토크편은 레전드, 다운 받아놓고 우울할 때마다 들을 것.

 들으면서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혼자서 멋있게 잘 사는 언니들이 내 주변에는 없는데, 아는 사이는 아니어도 이렇게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가 닮고 싶은 멋진 선배이자 롤모델들을 만난 것 같아 든든하다.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일 하셨다. 혼세언니가 백만 비혼 여성 커뮤니티 만들어주실 그 날만 존버하고 있어요.


•Mnet <GOOD GIRL :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

- 경쟁에 미친 방송국놈들의 대표주자 엠넷을 결코 믿지 않지만 이 프로그램은 한번 속는 셈 치고 믿어봐도 좋을 것 같다. 여성 아티스트들이 서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 한 팀으로 연대해서 방송국을 턴다는 컨셉이 너무 시류를 잘 읽은 것 같아서 짜증 내면서 재미있게 보고 있음. 무엇보다도 이영지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랩 잘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웃기고 솔직하고 스윗한 사람인지 몰랐네. 여태껏 K-연예계에서 본 적 없는 캐릭터라 응원하고 싶다.


5월에 잘한 소비

- 긴급재난지원금으로 산 모든 것들, 감사합니다.


5월에 맛있게 먹은 음식

•더베이커스테이블의 감자 수프

- 수프 자체도 부드럽고 고소했는데, 특히 안에 들어있는 소시지를 베어 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이건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의 향이다! 정확히는 무스타파 케밥 먹으려고 한 시간 줄 섰을 때 메링담 역 일대에 풍기던 그 향이었다. 눈 감고 맛을 음미하면 독일로 순간이동하게 되는 맛.


•아우프글렛의 크로플

- 크로와상을 와플 모양으로 찍어내고 위에 아이스크림, 메이플 시럽, 시나몬 파우더를 얹은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 한 입 먹어보고 오호.. 달기만 한 게 아니라 크로와상 특유의 겹겹이 쌓여있는 식감도 느껴지면서 고소한 맛도 난다. 단 거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 다 못 먹을 줄 알았는데 혼자서 홀린 듯이 다 먹어치웠다. 


5월에 마신 카페


5월에 잘한 일과 아쉬웠던 일, 그 사이 어딘가

- 내가 담당하는 서비스를 타겟층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이벤트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실제 집행까지 거의 혼자다 해냈다. 그 결과 올해 목표치로 세웠던 수치를 벌써 달성했다. 이벤트 기간에는 자다가도 수시로 깨서 검색하고 반응 살필 정도로 너무 시달렸지만, 어쨌든 명백히 보이는 숫자와 잘했다는 칭찬은 남았으니까. 이제 업무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 법만 스스로 익히면 될 것 같다. '이 서비스가 곧 나'라는 생각은 버리자. 악플 받으면 어때? 욕 좀 먹으면 어때? 나는 맡은 일을 할 뿐이다.


- 어떻게 하면 잘 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휴식 박사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모임을 통해 그동안 나는 몸은 쉬고 있었지만 마음은 쉬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기분이 좋아지는지 알고 있는 것, 내가 도피처를 찾을 때 다그치지 말고 나를 애틋하게 생각해주는 마음, 그런 게 중요하다.


- 나는 왜 이렇게 쉽게 상처를 받는가에 대해 거의 반년 가까이 고민해온 시간들, 이제 끝이 보인다. 마지막일 줄 알았던 상담 시간에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 떠올라 펑펑 울었고, 드디어 고민의 원인을 찾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자꾸만 내가 불쌍하다고 여겨지는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용기 내어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더 이상 트라우마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 이렇게 글로 쓰는 것도 큰 용기다. 다 괜찮아지고 싶어서.


5월에 행복했던 순간

1. 시원한 여름밤의 공기를 마신 한강 피크닉  

2. 'Zombie'가 멜론차트 진입 8위로 시작해 4위까지 올라간 걸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3. 브런치부터 맥주까지 완벽한 코스의 나 홀로 삼청동 나들이

매거진의 이전글 4월, 내가 드라마 폐인이 될 줄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