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의 월말결산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까워 남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매달을 기록해둡니다.
6월에 읽은 책과 잡지
• 책 <브랜드 마케터들의 이야기> - 이승희·정혜윤·손하빈·이육헌
- 배달의 민족, 스페이스 오디티, 에어비앤비, 트레바리 모두 내가 충분히 경험해본 브랜드라 그런지, 이 책을 통해 꼭 그 비하인드 신을 엿보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무려 447 페이지의 책을 앉은자리에서 두 시간 만에 다 읽었으니 말이다. 결국 더 좋은 방향으로 세상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는 건 자기 취향과 주관이 뚜렷하고, 관찰한 것들을 바탕으로 깊게 고민할 줄 알고,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며 일 잘하는, 딱 우리 나이대의 젊은 실무자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표나 리더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 "영 프로페셔널, 젊고 능력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아져야 한다."
• 책 <아직, 도쿄> - 임진아
- 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작가를 따라 도쿄의 아기자기한 동네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온 것만 같다. 문구점에서, 카페에서, 심지어 돈가스집에서까지 감동을 받는 그 마음이 너무 뭔지 알 것 같아서 더욱 공감했다.
"좋아하는 것이 있기에 스스로 감동받는 삶"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를 구경하고 싶다."
• 책 <우리는 취향을 팝니다> - 이경미·정은아
-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려면 컨셉과 의미, 디테일이 중요하다는 내용. 예시로 나온 서울·도쿄·베를린·뉴욕의 다양한 공간들 중 직접 가본 곳이 많아 이해가 쏙쏙 되었다. 그동안 나의 취향을 저격한 수많은 공간들은 어떤 지점에서 나를 무장해제시켰는가를 떠올리며.
"'옛것'이 '새것'을 받아들이면 그 결과로 선택의 폭이 늘어난다." - 하라 켄야
• 책 <기분 벗고 주무시죠> - 박창선
- 브런치에서 가장 인기 많은 작가 중 한 분인 박창선 님의 책. 항상 느끼는 거지만 글을 참 읽기 쉽게, 위트 있게 잘 쓰셔서 그 필력이 참 부럽다. "공감을 유용함으로 만드는 걸 좋아해요"라는 문장에서는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힌트를 살짝 얻은 것 같기도.
"다급함으로 찐 살과 근육은 지워지지 않는 습관으로 남더라고요."
"감정이란 건 어떤 사건에 대한 리액션에 가까워요. 가끔 우리는 이 리액션을 본질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어요."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에서 라이프는 '일을 안 하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채우는 시간'이더라고요. (중략) 삶이 무너지면 일도 없잖아요."
"진정한 자존감은 오히려 '빈틈'과 '상처'까지 '나'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 책 <아무튼 망원동> - 김민섭
- 80~90년대 서울의 평범한 주거 동네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시절을 겪어온 주민들에게 지금의 '망리단길'은 어떤 의미인지가 덤덤하게 서술되어 있다. 나와 연고도 없는 동네의 과거를 그리워하게 되다니.
"이 글을 읽은 당신이 누군가에게 당신만의 소중한 공간에 관한 서사를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당신은 도시를 온전한 자신의 고향으로 기억하는 1세대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과 추억들은 모두 하나의 기록과 역사가 되고, 그 공간을 조금 더 연속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6월에 즐겨들은 음악
• 온앤오프 'The 사랑하게 될 거야', 'It's Raining'
- 남돌들의 과한 퍼포먼스와 치명적인 표정연기의 연속이라 매주 '아 진짜 못 보겠다' 하다가 결국 끝까지 보고 생방까지 달린 '로드 투 킹덤'. 오직 온앤오프를 응원하기 위해서였음을. 이 집 명곡 맛집, 편곡 맛집인 건 원래 잘 알고 있었지만 경연용으로 작정하고 기깔나게 뽑은 편곡은 진짜 사람 미치게 한다. (역시 '음악의 아버지', '한국의 베토벤' 황현, 그는 대체..) 이 퍼포먼스가 얼마나 세심하게 기획되었는지 궁금하다면 편곡 설명하는 모노트리 비하인드랑 메인 댄서 유의 퍼포먼스 코멘터리도 한번 보고 가시길.
•윤훼이 'ONE MORE NIGHT', 예은 전지우 제이미 치타 효연 'WITCH (마녀사냥)'
- 쇼미더머니 방영할 때 음원 난리 나는 거 못마땅해하던 사람이 '굿걸' 음원에 매주 이렇게나 진심입니다. '원모어나잇'은 윤훼이 음색 미쳤고, 여름 야외 페스티벌 느낌 낭낭해서 공연 가고 싶을 때마다 들으면 상쾌해진다. '위치'는 후렴 중독성도 쩌는데 사실상 제이미 도입부랑 전지우 마지막 파트 들으려고 듣는. 다들 이렇게 잘하는데 담주 막방 실화냐.
•아이즈원 '회전목마'
- 사람이라면 안 좋아할 수가 없는 사기 멜로디. 멤버들의 목소리 톤 때문인지 아이즈원 노래들은 내 귀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예뻐서 간지럽다'는 개인적인 편견이 있었는데, 이렇게 톤과 찰떡같이 어울리는 노래를 만나니 참 듣기 좋구나.
•스트레이 키즈 '神메뉴'
- 가사랑 티저 보고서 당황했었는데, 언제부턴가 머릿속에서 계속 '뚜뚜두 뚜뚜뚜' 하면서 상상 속에서 마라탕 먹고 있음.. 내 머릿속에서 이 노래 좀 지워줘 탕탕탕탕
6월에 즐긴 랜선 문화생활
• 미국 TV Land 드라마 <Younger> 시즌 1~6
- 노잼 인생에 한 줄기 재미를 가져다준 미드. 거의 중독 수준으로 매일 밤 에피소드 네다섯 편씩은 봤던 것 같다. 과몰입하면서 봐도 내 마음이 다치지 않는다는 게 이 드라마의 최대 장점. 전개가 빨라서 보면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고, 시즌을 거듭하며 결국 모든 캐릭터들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에 흐린 눈으로 볼 필요도 없다.
밀레니얼 세대인 켈시의 감각과 사실상 기성세대인 라이자의 지혜로 뉴미디어 시대의 출판사의 위기를 극복해내고, 능력 있는 젊은 여성 둘이 서로 도와가며 크게 성공한다는 스토리가 마음에 들었다. 이들에게 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도움 주는 매기, 다이애나, 로렌도 사랑스럽다.
라이자의 승승장구 커리어를 응원하는 한편 연애사는 내 취향이 아니기는 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연하남과 능력 있고 안정적인 연상남 사이에서 이렇게 여섯 시즌 내내 갈팡질팡 하다니. 그런데 이 진부한 삼각관계 마저 즐기게 된 건 순전히 배우들 때문이었다. 팬들 사이에서 '팀 조시 vs 팀 찰스' 구도로 나뉘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인터뷰 질문에 두 남자 배우가 "팬들은 우리 둘 중 누굴 더 좋아하냐가 아니라, 누가 이 여성에게 더 좋은 사람일까를 고민하는 거다. 포커스는 여성에게 있다.", "이 드라마는 여성들의 우정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남자 이야기는 이 정도로 충분한 것 같다"라고 대답한 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배우 본캐들의 가치관과 케미도 매력 터지는 이 드라마. 사랑하지 않는 법 나는 모른다. 조시든 찰스든, 라이자가 행복한 모습 보고 싶으니 시즌7 어서 내놓아라!
+) 과몰입에서 헤어 나오질 못해서 SNS에 검색해보고 또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이 드라마,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SNS 마케팅에 진심이었구나. 당시 유행했던 해시태그 트렌드나 밈에 빠지는 법이 없고, 명장면이나 비하인드 클립을 올릴 때에도 '여기서 너라면 어떻게 했겠니?', '얘 같은 친구 태그 해봐' 등 시청자들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는 방식이다. 배우들 인터뷰는 트윗 반응 읽기로, 다음화 예고는 이모지 퀴즈로 하는 등 세상 트렌디하면서도, 제작진들이 비하인드 썰을 푸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콘텐츠의 깊이에도 신경 쓴다. 그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극 중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폴린의 책 <Marriage Vacation>이 실제 소설책으로 출판됐었다는 거. 극 중 켈시와 라이자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 58페이지에 어마어마한 내용이 실려있었다는 거. 하.. 디테일에 치인다. 시즌1 나온 게 벌써 5년 전인데 도대체 언제부터 앞서 나가고 있었던 건가요?
• 영화 <아이 필 프리티>
-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라는 메시지에는 당연히 크게 공감하지만. 주인공 르네가 내가 절대 좋아할 수 없는 비호감 인물이라는 점이 큰 장벽이었다. 다른 사람 말은 절대 안 듣고 자기 할 말만 배설해버리고, 정작 본인도 다른 이들 겉모습으로 평가하면서 자기만 외모 때문에 미움받는다는 피해의식에 찌들어있는 것 같다. 하이라이트였던 연설 장면도 너무 억지고, 저건 회사에서 고소해도 될 법한 상황 같은데 왜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건지? 충분히 좀 더 공감 가게 만들 수 있는 영화였는데 여러모로 아쉽다.
• 미국 BBC America 드라마 <킬링 이브> 시즌 1
- 궁금한데 무서워서 차마 도전하지 못했던 킬링 이브. 잔인한 살인 장면은 다 스킵해가면서 겨우 시즌1 완주했고 딱 여기까지만 봐야 할 것 같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나는 작품은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괴로워서 못 보겠다.
"나쁜 사람 하는 거 어려워요?" "연습하면 쉬워."
"슬픈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거든요. 느끼는 게 더 많아서요."
6월에 즐겨 본 콘텐츠
• 웹 예능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
- 올해 마흔인 나이에 운동 경험도 전무한 여성이 새로운 운동을 시도하는 족족 이렇게 천재적으로 잘해버린다는 게 놀랍다. 레그 익스텐션 196kg 들어 올릴 땐 이거 실화인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네티즌 댓글처럼 정말 태릉에 있었어야 하는 사람, 우리나라 금메달을 몇 개나 놓친 거냐.. 하지만 체육인의 길 대신 제육인의 길을 택한 그가 해낸 거였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미용을 위한 다이어트가 목적이 아닌, 더 행복한 삶을 위해 운동하는 여성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다는 건, 미디어 밖 우리 사회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희망일 거다. 김민경이 '무게 치며' 즐기는 게 너무 멋있어 보여서 나도 웨이트 운동을 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 JTBC <비긴어게인 코리아>
- 매 시즌 다 챙겨봤지만 이번 시즌은 다른 요소 다 빼고 음악만 놓고 봤을 때 단연 최고다. 계속 돌려보는 무대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이상하게 눈물 날 것 같은 Viva La Vida와 헨리를 다시 보게 된 Youngblood. 지나가던 유럽인들의 극찬받는 것보다 이번 편이 훨씬 더 국뽕 차오른다. 대한민국에 진짜 대단한 가수들 많고, 우리나라 사람들 이렇게나 음악에 진심이라 잘 즐기면서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있다고.
• KBS 다큐인사이트 <개그우먼>
- 친근한 이미지 때문일까, 마치 오래 알던 사이처럼 유독 여성 코미디언들에게 감정 이입이 되곤 한다. 왜 그동안 개그 무대에서 여성들에게는 외모 비하로 웃기는 캐릭터 또는 치고 빠지는 들러리 역할만 주어졌는지, "너구나"라는 남자 선배들의 말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그리고 좌절할 때마다 여성 동료들이 얼마나 서로에게 힘이 되어줬는지. 다큐를 보는 내내 함께 분노하고 공감하며, 여전히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송은이, 김숙, 박나래, 장도연 같은 여성 코미디언들이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 물 만났다고? 아니, 김숙 말대로 그들은 "시대를 바꿨다".
6월에 잘한 소비
• 데니멀즈 2020 필&돈
- 2020 ver. 필이랑 돈까지 입양함으로써 데니멀즈 완전체 데레곤볼 완성! (한 명은 얼굴만 둥둥 떠있는 것 같은 건 모른 척 해주자) 근데 이목구비만 살짝 튜닝해서 똑같은 인형을 대체 몇 번이나 더 낼 건데! 나도 이제 그만 사고 싶어..
6월에 맛있게 먹은 음식
• 수원에서 먹은 생소갈비살과 한돈양념갈비
- 별 계획 없이 가족들과 수원 가는 길에 대충 검색해보고 찾은 곳인데 대만족. 넷이 가니 소갈비랑 돼지갈비 둘 다 양껏 먹을 수 있어 좋았고, 한정식 같은 고깃집 컨셉이라 반찬 퀄리티도 좋고 심지어 마음껏 리필 가능하다. 가성비 미쳤고 맛도 좋고 서비스도 좋아서 고기파워 충전이 필요할 때 가족들이랑 종종 가기로 했다.
• 세스크멘슬의 보스나 샌드위치
- 직접 만든 수제 소시지와 머스타드의 조화. 거기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곁들이니 점심 먹으러 독일까지 날아온 기분.
6월에 마신 카페
6월에 잘한 일
- 본격적인 기록을 위해 드디어 노션을 시작했다. 작년에 만들어놓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손 놓고 있었는데, 빌라선샤인 ‘기록워크숍:디지털 편'을 듣고 힌트를 얻어 나에게 필요한 항목들을 꾸려봤다. 나라는 사람 안에는 어떤 폴더들이 있고 그 안에 하위 요소들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본다는 것 자체도 재미있고. 브런치에 미처 혹은 차마 올리지 못한 것들까지 미래의 나를 위해 남겨놓을 수 있어 다행이기도 하고. 기록은 하면 할수록 뿌듯해진다.
- 잘한다 잘한다 해야 신나서 더 잘하는 사람, 나의 자존감이 위협받는 순간 바로 자존감 풀충전할 수 있는 주문을 찾았다. 나 진짜 잘하니까 의심하지 말고, 하던 대로 믿고 가자. 속으로 백 번씩 외쳐. "잘하는 모습 안 보여주고 싶었는데 결국 나 또 잘해버렸네?"
6월에 아쉬웠던 일
- 어이없게도 방에서 혼자 발을 접질려서 2주 동안 반깁스 신세로 집에만 있었다. 6월 한 달이 통째로 순삭된 기분. 당장 발이 아픈 것도, 이 더위에 반깁스를 찬 것도 고통이었지만, 가고 싶은 데 가고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생각에 서러웠다.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자유는 나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가치라는 걸 또 한 번 깨닫는다.
- '일에 과몰입하지 말자'라고 쓴 게 바로 지난 달이었구나. 지난 1년 동안 '나를 갈아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심히 이끌어온 일을 떠나 갑자기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됐다. 외부적인 구조 변화가 원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내 선택이었기도 해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너무 힘들어서 놓고 싶었지만 막상 놓으라니 놓을 수 없는 이 심정 대체 뭘까. 아직도 가끔 후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머지않아 또 새 업무에 과몰입하겠지.
6월에 행복했던 순간
1. 광교호수공원 프라이부르크 전망대에 올라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2. 불 끄고 선풍기 틀어놓고 '영거' 에피소드 네 편씩 보던 밤들
3. 알디프 티 코스에서 새로운 차를 마셨을 때 '너무 맛있어서 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