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의 월말결산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까워 남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매달을 기록해둡니다.
7월에 읽은 책과 잡지
• 책 <보통의 언어들> - 김이나
- 추천사를 쓴 김하나 작가의 말처럼 어떤 문장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느낌이다. 누군가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다는 촉이 와서 한껏 소심해져 있을 때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자'라는 문장을 마음에 새겨 넣고 조금은 의연해질 수 있었다. 너무 쉽게 감동받고 쉽게 상처 받아서 나조차도 견디기 힘든 유난스러운 성격이 나의 강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부끄러움과 겁이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호감인지 알려준다. 내가 닮고 싶어 하는 멋진 어른이 "사실 나도 너와 비슷해", "내가 먼저 겪어 봤는데 별 거 아냐, 괜찮아"라고 다독여주는 것 같아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나에게 외로움은 반드시 채워져야 하는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오롯이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감정이다."
"유난스럽다고 지적받은 적이 있다면 그 부분이 바로 당신을 빛나게 해 줄 무언가 일 것이다. 그러니 유난스러운 자들이여, 온 힘을 다해 스스로의 특별함을 지키자."
"겁이 많은 자들은 지켜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다. 또 자신과 얽힌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일에 대한 신중함이 있는 자들이다. 삶에 있어 충동보다는 지구력으로 대처하는 이들, 그중에서도 '나는 겁이 많은 편이야'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호감이다. '겁이 없음'을 매력적인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늘 강했다."
• 책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 이다혜
- "왜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이런 말이 입에 잘 붙지 않는 사람이다. 내게 당장 큰일이 닥치는 게 아니라면 대체로 순응하며 굳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편이었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왜? 그건 아니지!"라고 크게 소리치고 싶어 지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전에는 몰랐던 울분의 감정이 차올라 분노하고 잘못된 걸 바로잡고 싶어 졌다.
책 제목대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접해온 책이나 대중문화에 얼마나 이상한 점이 많았는지,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 왜 지금은 다르게 보이는지, 그래서 지금의 나는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여러모로 지금 나에게 큰 의미가 된 책. 특히 '소녀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챕터는 꼭 모든 10대~20대 여성들이 읽어봤으면.
+) 책과 같이 보기를 추천하는 유튜브 '하말넘많' 문학 교과서... 이게 최선일까?
"여러분이 서로의 역할 모델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중략) 다양한 직군에서 자기 일에 충실한 여러 연령대와 외모의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그렇게 서로의 역할 모델이 되길 바랍니다."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인가.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늘 피해자가 생각하는 것이다. 왜 가해자가 가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왜'라니. 마치 이유가 있으면 그래도 된다는 듯이. 그런데 이런 식의 사고는 남성 중심의 스토리텔링에 잘 길든 결과가 아닐까?"
"선택이 자유롭고 능동적이려면 일단 선택지를 가능한 한 넓혀놔야 한다."
• 잡지 컨셉진 7월호 <당신의 삶엔 영감이 있나요?>
- 이쯤 되면 지금 가장 핫한 화두는 영감과 기록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이미 스스로를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해왔고 누구보다 열심히 내가 듣고 보고 느낀 걸 열심히 기록하고 있지만, 이상하게 영감이라는 말은 아직 쑥스럽다. 꼭 작가나 예술가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의 단어 같아서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지금 모두가 영감을 외치는 이 '영감 열풍'이 그 경계를 허물어주는 것 같아 반갑기도 하면서, 이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게 영감이 되어야만 할 것 같아 삶이 피곤해질까 걱정되기도 하고.. 아 모르겠다.
"영감은 '어떤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동기부여'입니다. 그리고 그걸 완성시키는 건 책임감이고요."
"영감은 언제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진 않다. 일상을 얼마나 예리하고 기민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그리고 그걸 흘려보내지 않고 나의 기록으로 남기는지에 따라 작은 휴짓조각 하나도 영감이 될 수 있으니까."
• 책 <아무튼 술> - 김혼비
- 진짜 주옥같은 에피소드들이 많다. 책 읽으면서 현실 웃음으로 낄낄댄 건 처음. 역시 술은 마셔도 마셔도 늘 새롭다. 나는 아무리 마셔도 김혼비 작가님의 경지까지 오르지는 못할 것 같지만.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때는 이렇게 힘들어도 티 내지 않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도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 꿋꿋하게 '어른다운 방식'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그 기분이, 세상에게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어렸다. 매우 어렸다. (중략) '감춤'으로써 그것은 나만 아는 은밀한 성장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거짓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누군가에게 술은 제2의 따옴표다. 평소에 따옴표 안에 차마 넣지 못한 말들을 넣을 수 있는 따옴표. 누군가에게는 술로만 열리는 마음과 말들이 따로 있다."
7월에 즐겨들은 음악
• 선미 '보라빛 밤 (pporappippam)'
- 내가 사랑하는 여름 초저녁 바이브. 해질 무렵 저녁 산책할 때 들으면 어디 드라이브 떠나는 기분이 난다. '뽀라삐빰!' 할 때 꼭 불꽃놀이나 폭죽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 황홀하기까지 하다. 역시 선미와 프란츠는 믿고 듣는 조합.
• 레드벨벳 - 아이린&슬기 '놀이 (Naughty)'
- 원래도 아이린&슬기는 호감이었지만 이번 '문명특급' 보고 좀 더 좋아졌고 '몬스터'도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후속곡에 아주 제대로 치여버렸다. '놀이' 퍼포먼스 비디오는 진짜 올해의 K팝 영상으로 지정하고 널리 널리 알려야 한다. 돈 내고 봐야 할 것 같은 신세계 안무와 영상미, 진짜 멋진 현대미술 작품 한 편 본 것 같은 퀄리티. 레드벨벳 당신들 얼마나 더 잘할 건데, K팝 대체 어디까지 발전할 건데..
• 치스비치 '무자비'
- 레트로 컨셉인 게 아니라 찐레트로 그 자체, 이 팀 그 누구보다 90년대 가요에 진심이라 너무 좋다. 나 8살 때부터 이 노래 듣고 자랐던 것만 같은 기억 조작 오졌음. 작년에 나온 '써머러브'가 티티마 파파야st였다면 이번 '무자비'는 컨셉은 베이비복스에 노래는 핑클이라 더 내 스타일이야. 팬들도 진심이라 댓글 너무 웃기다. "이 노래 처음 나왔던 그 시절 그립읍니다.. 2시간 전이었지요. 세월 참 빠르네요." 대충 이런 식으로 아무 말 ㅋㅋㅋ
• 박문치 '널 좋아하고 있어' (With 기린,Dala,준구)
- 치스비치 덕질하다 여기까지 왔는데요, 여기가 종착역이었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렇게나 순수한 언어로 노래하는 케이팝이라니. 마음이 마구 더럽혀진 날 들으면 눈물이 살짝 맺힐 정도로 깨끗해서 감동적인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 같은 노래'다.
기린 보컬은 눈 감고 들으면 넘나 쿨 이재훈 같고, 준구 래핑도 완전 옛날 플로우라서 진짜 90년대 혼성그룹 느낌 제대로 난다. 아마 '놀면 뭐하니'에서 딱 이런 구성의 곡을 원했던 게 아닐까 싶은. 근데 사실 이 노래의 포인트는 여성 보컬 Dala a.k.a.라라 a.k.a 윤다혜씨라고 생각하는데요. 음색, 화음, 표정, 끼 다 매력 쩔어버려서 나 약간 반해버렸다..? 특히 온스테이지 라이브 너무 좋아서 뻥 안치고 한 500번은 본 듯. 박문치님 이제 유명해졌으니까 우리 루루라라 활동 좀 많이 시켜주세요!
7월에 즐긴 (랜선) 문화생활
• 전시 <명상 Mindfulness>
- 무려 6개월 만에 본 전시라 오랜만에 다시 문화생활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만족스러웠다.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지켜볼 수 있는 첫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양 옆 벽이 서서히 부풀어 올라 숨을 크게 쉬어보도록 유도하는 구간도 좋았는데. 관람객이 너무 많아 몰입하기 힘들었던 게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폭우 내리는 평일 낮에도 매진각이라니, SNS에서 소문난 핫한 전시는 이제 점점 관람하기 힘든 것 같다.
“우리 뒤에 있는 것들과 우리 앞에 있는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일본 TBS 드라마 <나기의 휴식>
- 눈치를 많이 보고 쉽게 상처 받는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소재 자체가 흥미로워서 보게 된 드라마. "공기(=분위기) 파악 좀 해"라고 툭 던지는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 큰 트라우마가 된다. 나기와 닮은 점이 많은 나는 사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눈치는 빠른데 그 이상한 분위기를 좋게 좋게 넘어갈 수 있는 능글맞음이나 용기 같은 게 부족한 거라 생각했다. 근데 신지가 나기에게 "남에게 관심 없잖아? 넌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만 좋아하잖아"라고 팩폭했을 때 내가 다 뼈 맞은 것처럼 아프더라.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대화가 툭툭 끊기고 어색한 공기가 흐를 때 보통 상대방에서 그 원인을 찾곤 했는데, 어쩌면 나는 눈치 없는 것도 아니고, 용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거였구나 싶었다.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지만 언제나 관심은 나에게만 있었기에, 혼자서만 그렇게 답답해했나 보다.
극 중 온갖 빻은 여혐 요소가 난무하고, 나기 엄마가 나오는 모든 씬에서 분노가 차올랐지만. 나기가 주체적인 삶을 찾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끝까지 견디면서 봤고, 잠깐 쉬고 용기를 내면 다 괜찮아진다는 희망을 봐서 보길 잘했다 싶다. 편안해진 나기의 얼굴,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친절한 이웃들과 노란 선풍기 같은 좋은 장면들만 오래오래 기억에 남겨야겠다.
"왜냐면 공기는 파악하는 게 아니라 마시고 내뱉는 거니까."
"하지 않을 이유를 나열하면서 새로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편하고 계속 그렇게 살아왔지만, 그렇게 해서는 보이지 않는 경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 영화 <엑시트>
- 드디어 왓챠에 올라와 보게 된 (거의) 천만 영화. 그 누구도 불필요하게 희생당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약자들이 먼저 구조되어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 좋았다. 주인공들의 안전이 보장된 재난 영화라 부담 없이 재미있게 봤다. 영화 자체가 아주 잘 만든 하나의 재난 대응 매뉴얼 같다는 생각도 했다. 위기 상황 발생 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적어도 뭘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게 되어 의외로 유익하기까지 했다.
7월에 즐겨 본 콘텐츠
• 솔로캠핑 유튜브
- '나 혼자 산다'나 '캠핑클럽' 같은 본격 캠핑 장려 예능을 보고도 관심 1도 없었던 내가 우연히 알고리즘 추천으로 뜬 우중캠핑 영상을 보고 솔로 캠핑에 로망을 갖게 됐다. 전국 방방곡곡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딱 내가 원하는 구조와 동선으로 나만의 아지트를 꾸릴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꼈고. 아무 눈치 안 보고 내가 먹고 싶은 거 해 먹고, 실컷 술 마시며 보내는 고요한 밤도 부럽다. 나는 운전도 못하고 데려갈 강아지도 없고 장비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큰일이다. 너무 가고 싶어 미치겠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솔로 캠핑' 검색해서 나오는 거 다양하게 보는데 요리에 진심인 준식이 joonsigi와 영상미 끝장나는 PICNICAMP 감성채널 이렇게 두 채널을 제일 좋아한다.
7월에 잘한 소비
- 딱히 없다.
7월에 맛있게 먹은 음식
• 양재 영동족발
- 서울 3대 족발이라는 영동족발 테이크 아웃. 솔직히 족발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보쌈파인데, 유명한 집은 역시 맛있구나. 엄청 야들야들하고 하나도 안 느끼하다. 우리 동네에도 직영점 생겼다는 소식 듣고 조만간 또 한 번 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다.
7월에 마신 카페
7월의 사건과 이런저런 생각들
- 갑자기 닥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나름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감정적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 큰 일을 치르고 다들 너무 지친 마음에 한바탕 서로를 오해하고 상처 주고 다시 울고불고 화해하고 나니, 앞으로 내 인생에 무엇이 중요한지가 명확해졌다. 다른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함께 오래오래 사는 것, 그것만 있으면 된다. 왜 항상 좋은 사람들이 나쁜 놈들에게 당하고 상처 받아야 할까?라는 답 안 나오는 질문도 이제 그만. 착한 내 사람들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킬 것이다. 그것이 곧 나를 지키는 것, 나와 우리를 사랑하는 것.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생관 없다.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기.' 김이나의 <보통의 언어들>에 나오는 이 표현에 이유 없이 확 꽂혔는데, 7월이 가기 전에 그 의미를 확실히 가슴에 새겼다. 대충 미움받는 것 따위 더 이상 두렵지 않아. 지금 우리에겐 확실한 사랑만 있으면 돼.
- 이번 일로 한 뼘 정도는 더 어른에 가까워진 것 같다. 절대 잊지 못할 2020년 7월이다.
7월에 행복했던 순간
1.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보통의 언어들>을 읽던 시간
2. 새소리물소리 야외 정원에 앉아 멍 때리며 조규찬의 '이봐 내 여행의 증인이 되어줘'를 반복 재생했을 때
3. 오랜만에 가족 다 같이 외식하고 예쁜 노을 아래 걷던 산책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