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리터 Mar 31. 2019

음주 경력 '고작 9년 차'의 구구절절 술 역사

100일 글쓰기 #술

술을 마셔온지 어느덧 9년째다. 인생 선배님들에게는 명함도 못 내밀 짧은 시간일 수도 있지만, 살면서 무언가를 9년 동안이나 해온 적 있나 하고 생각해보자면 꽤 긴 세월이라 느껴진다. 9년 정도면 '역사'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술술 풀어보는 나의 술 역사.




생각해보면 술을 처음 접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에는 술을 왜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주는 화학약품 같았고 맥주는 쓴 보리차 같았다. MT, 회식, 뒤풀이 등 술 마실 일이 많아 '아싸'가 되고 싶지 않은 어린 마음에 술을 좋아하는 척했던 것 같다. '술 땡긴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맛있다고 생각한 술은 호프집에 파는 싸구려 칵테일 소주뿐이었다. (애처럼 요구르트맛 소주를 그렇게 좋아했다)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나고, 나도 모르게 술을 찾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교환학생으로 1년 동안 미국에서 혼자 지내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인생의 암흑기였다. 날씨가 안 좋아 몇 달 동안 해를 못 보고 살다 보니 우울증이 생겼다. 시골 동네라 놀거리도 없고, 부모님께 돈을 더 보내달라고 하기 죄송해 돈도 없고, 그저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새벽 4~5시까지 잠 못드는 낡은 자취방에서 홀로 버텨내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했다. 한 병에 4달러 정도 하는 저렴한 와인을 반 병씩 비워내는 날, 비로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그게 내 20대 인생에 찾아온 첫 번째 고비였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 딱 반년 정도 행복했다. 이내 찾아온 두 번째 고비는 홀로 지낸 미국 땅보다 차갑고 외로웠던 취업 준비였다. 가고자 하는 길이 확고했기에 계속 도전하고 또 도전했지만 매번 최종면접에서 떨어지거나, 인턴으로 근무했는데 신입 티오가 없다는 등, 늘 그렇게 끝나버렸다. 딱 한 걸음만 더 나가면 되는데 늘 그게 어려웠다.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과 스터디를 하고, 같은 시험대에 올라 떨고 있는 인턴 동기들을 만나 할 수 있는 건 끝나고 술잔을 기울이는 일뿐이었다. 과거에 대한 미련, 현실에 대한 한탄,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 수많은 술잔들에 이런 감정들을 떠나보냈다.




그렇게 두 개의 고비를 넘어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사회로 나오게 됐다. 마침내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이라 볼 수 있을까. 이제는 힘들 때 술이 생각나는 게 아니다. 지금의 나는 그냥 주말에 가족들과 마시는 맥주, 친한 동료들과 퇴근 후 마시는 소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마시는 와인 같은 게 좋다. 딱 그 날 컨디션과 TPO에 맞는 술을 고를 줄 알고, 딱 기분 좋은 정도까지만 가는 경지에 올랐달까.


20대 초중반, 어리고 모든 게 불안하던 시절에는 술에 지배당하며 버텨왔다. 어느덧 20대 후반, 인생 경험이 쌓이고 삶이 안정되니 내가 술을 지배하고 있다. 이제 진짜 '으른'이 됐나 보다.


cheers
매거진의 이전글 대화를 위한 시간과 돈이 필요한 세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