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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에서 다시 찾은
여행의 이유

Day 16.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by 이리터

베를린 이후로는 카페 불모지와 다름없는 도시들을 여행해온 터라, 암스테르담에서는 꼭 좋은 커피와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가보고 싶어 미리 알아둔 카페를 찾아가기 위해 트램을 타고 운하가 아름다운 동네에 내렸다. 이른 시각이어서인지, 관광객 없는 정말 로컬 동네라서 인지, 한적한 마을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암스테르담 로컬들이 편하게 행아웃 하는 카페라고 해서 찾아가 본 'TOKI'. 아침 9시 좀 넘어서 갔는데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신문 보고, 노트북 켜놓고 일하고,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수다 떠는, 매일 아침마다 북적이는 이 동네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10시쯤 되니 비로소 한산해졌다. 이제 다들 출근한 건가. 이런 카페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삶이 새삼 부러웠다. 매일 아침 좀비처럼 셔틀버스에 실려가는 루틴보다는.

이름도 귀여운 TOKI

바 자리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간단한 아침 식사로 플랫화이트와 레몬 케이크를 주문했다. 커피 한 잔에 3유로 정도 하는데 놀라운 점은 계산할 때 현금을 전혀 안 받는다는 거다. 우리나라에서는 천 원, 삼천 원 쓰면서 카드로 계산하기 좀 미안할 때가 있는데 말이다. 암스테르담에는 유독 현금을 안 받는 카페나 식당이 많았다. 환경을 위해서라는데 뭔가 좀 놀라웠다. 화폐가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해서.

이런 여유가 필요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더니 예쁜 샵들이 모여있는 거리가 나왔다. 옷, 액세서리, 생활용품 등을 파는 편집샵부터 열쇠, 조명 등을 파는 철물점까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느 엽서 가게에 눈이 갔는데 이제 막 문 열고 오픈 준비를 하고 계셨다. 양해를 구하고 잠깐 구경하다가 괜히 죄송해서 엽서 두 장을 샀다. 아직 여행의 반이 남았으니 더 무거운 물건은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Grachtengordel-West 일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이 가게 저 가게 구경하다 거울처럼 생긴 한 입간판 앞에 멈춰 섰다. 간판에 내 모습이 비치게 사진을 찍어볼까 하고 카메라를 대봤는데, 간판 테두리에 적혀있는 문구가 새삼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This is happening. 30일씩이나 여행한다면 뭔가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데, 내가 무엇을 위해 왜 여행하는지를 잊은 채 여행하고 있었다. 근데 그냥 'this is happening'처럼. 일상의 내가 막연히 꿈꿔왔던 사소한 것들을 현실로 이뤄내고 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 루프탑 바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싶어, 에즈에서 선인장에 둘러싸여 보고 싶어, 고흐 그림의 배경이 된 론강의 석양을 보고 싶어. 이런 사소한 소망들. 그런 거라면 나는 지금 충분히 여행을 잘하고 있는 거였다. '암스테르담의 예쁜 편집샵에서 마음에 드는 소품을 골라보고 싶어'도 희망 리스트에 있었거든.

This is happening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혼자서 여행의 의의이자 이유를 찾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골목 사이사이마다 흐르는 운하가 유독 시원하게 느껴졌다.




마음은 가볍지만 발걸음은 가볍지 못했는데, 바로 신발이 문제였다. 얇은 슬립온을 신고 매일 25000보 가까이 걷고, 알프스 정상부터 니스 해변까지 다녀왔으니. 밑창이 찢어지고 앞코에 구멍이 나서 신발로서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지 오래다. 비교적 물가가 납득 가능한 수준인 암스테르담에 가서 꼭 새 신발을 사겠노라 벼르고 있었다.


어느덧 이름을 알 만한 브랜드 가게가 모여있는 번화가까지 내려왔다. 지금이 타이밍. 평소 옷·신발류 쇼핑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운명처럼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새하얗고 튼튼해 보이는 아디다스 운동화가 세일해서 단돈 40유로. 사자마자 새 운동화로 갈아 신고, 헌 신발은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극한직업이었지, 고생했어 내 낡은 슬립온.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발걸음도 편해졌으니, 2만 보는 물론 3만 보도 거뜬히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잠깐 그전에 FEBO가 보이길래 에너지 충전부터. 네덜란드 패스트푸드 체인인 FEBO는 특이하게 버거, 크로켓 류를 자판기로 꺼내먹는 방식이다. 직원들이 직접 만들어서 그때그때 채워 넣는 방식이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크로켓을 한 입 베어 물면 안에 뜨겁고 짭짤한 크림소스가 흘러나온다. 2유로에 이 정도 퀄리티 간식이라니, 훌륭해.

국내 도입이 시급합니다

담 광장까지 왔다. 암스테르담 시내의 중심이 되는 곳. 관광객들이 많으니, 관광객들의 눈을 사로 잡기 위한 사람들도 많다. 한쪽에서는 코스프레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열심히 비눗방울을 만들고 있다. 전형적인 유럽 광장의 풍경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파가 모여있던 곳, 그 중심에는 뉴질랜드에서 온 거리 예술가 Josh가 있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외발 자전거 묘기를 선보이고 있단다. 잭 블랙을 닮은 그는 잭 블랙 뺨치는 유머 감각으로 사람들을 빵빵 터뜨렸다. 돈은 안 내도 상관없으니, 오늘 여기 암스테르담에서 Josh라는 아티스트 덕분에 마음껏 웃었다는 걸 기억해달라는 그의 말에 좀 찡해졌다.

덕분에 많이 웃었어요

오전 내내 흐리던 날씨도 조금씩 맑아지기를 기다리며, 담 광장 주변을 구경했다.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큰 서점 Scheltema에서 영어로 된 책을 좀 뒤적여보다가 나왔다.




나의 바람대로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며 파란 하늘이 쨍하고 비췄다. 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안네 프랑크의 집 부근일 테다. 버릴 컷이 없는, 날씨가 다한 풍경.

사실 이 동네에 온 목적은 팬케이크였다. 2년 전에 다른 집에서 팬케이크를 꽤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어 이번에는 좀 더 유명하다는 The Pancake Bakery를 찾아왔다. 점심으로 먹을 거라 베이컨, 치즈 등이 들어있는 식사용 팬케이크를 주문했는데 웬 부침개가 나왔다. 내가 생각했던 맛이 아니라 결국 반도 못 먹고 남겼다.

네 다음 배추전

트램을 타고 알버트 쿠입 마켓 쪽으로 내려왔다. 온갖 잡동사니부터 채소, 과일, 해산물까지 파는 리얼한 시장이다. 다른 나라의 시장을 구경해보는 건 늘 재미있다. 꾸밈없는 진짜 삶의 현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Albert Cuyp Market

네덜란드의 대표 간식 스트룹 와플을 빼놓을 수 없다. 찐득한 캐러멜 소스와 시나몬 향 나는 부드러운 와플. 따뜻한 커피잔 위에 뚜껑처럼 잠깐 덮어놓고 있으면, 안에 있는 캐러멜이 녹아서 더 맛있어진다. 와플 트럭 옆에 커피 트럭 장사하면 잘 될 텐데.

2년 만에 다시 만난 와플 아저씨

시장에서 한 블록 떨어진 옆 골목에도 예쁜 편집샵들이 줄지어 있다. 2년 전에 봤던 그 가게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괜히 반가웠다. 이렇게 예쁘게 공간을 꾸미는 센스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부러워서 질투가 난다.

조금 이른 저녁을 먹으러 왔다. SNS에서 핫하다고 본 곳, 아보카도를 활용한 다양한 메뉴가 있는 #인스타_맛집 '아보카도 쇼'다. 문 닫기 직전 거의 마지막 손님으로 가서 다행히 웨이팅은 없었다. 손님 대부분이 20대 여자였고, 여기저기서 인증샷 찍으며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이나 여기나, 인스타 맛집 특유의 풍경은 만국 공통이구나.

아보카도에 환장한 식당

정말 여러 가지 메뉴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밥이 먹고 싶어서 라이스 메뉴를 주문했다. 비주얼은 참 특이한데 좀 당황스러운 조합이랄까. 흰밥에 아보카도, 연어회, 콩, 망고, 그리고 해초 무침이라니. 먹으면서도 이게 무슨 맛이지 싶었다. 간장 조금 찍어서 이건 초밥이다 최면 걸면서 다 먹었던 것 같다. 유럽 사람들 보기엔 이게 트렌디하고 건강한 아시안 스타일 같은 걸까.

다시 봐도 황당한 조합




5시에 하이네켄 익스피리언스 방문을 예약해뒀기 때문에 서둘러 나왔다. 하이네켄의 도시, 암스테르담. 맥주 제조 과정부터 브랜딩까지, 하이네켄이 만들어지고 소비자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따라 재미있게 투어를 시켜준다.

상당히 잘 꾸며놨다. 놀이공원 온 것 마냥 화려한 비주얼 폭격에 사로잡혔다가, 맥주 한 모금이 간절해질 때 막 따른 생맥주 한 잔을 나눠주니 기분이 업될 대로 업된다. 사실 하이네켄 맥주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투어를 하고 나면 마치 내가 하이네켄의 오랜 팬이었던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렇게 신나서 투어 끝에 생맥주 두 잔을 더 마시고, 괜히 기념품샵에서 뭐라도 사게 된다. 예전에 한창 광고·마케팅 공부를 할 때 하이네켄 케이스 스터디를 많이 했었는데 직접 경험해보니 왜 그럴만했는지 알겠더라. 역시 마케팅 천재들답다.

Proost!

하이네켄에서 주는 생맥주 세 잔을 혼자 신나서 다 받아 마시고 나니 꽤 알딸딸했다. 잠깐 바람 쐴 겸 산책했다. 재작년에는 밤 10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는 초여름에 왔었는데, 그때도 가을과 잘 어울리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10월 초의 암스테르담은 꽤나 무르익은 가을 그 자체다.

가을 그 자체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다시 봐도 예쁜 'I amsterdam' 사인을 만났다. 어제 낮보다 한산해서 훨씬 좋았다.

좀 쌀쌀해지긴 했는데 여전히 Museumplein 잔디밭에 앉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시민들이 더러 있었다. 나도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 서서히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감상했다. 초록색 잔디와 붉은 노을빛이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듯 묘한 장면을 연출한다.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중앙역 쪽으로 이동했다. 암스테르담에서의 마지막 저녁은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 동행을 구했다. 그 친구들은 먼저 만나 성 박물관을 같이 본다고 했으나, 나는 썩 내키지 않아 나중에 합류했다.

트램만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나는 배가 불러 맥주 한 잔만 더 했고, 친구들이 먹은 감자 요리. 다들 나보다 어린 20대 초반의 풋풋한 대학생들이었다. 알바해서 돈 모아 생애 첫 해외여행을 왔다는 두 남학생, 그리고 네덜란드를 좋아해서 알바해서 한 달 살기 하러 왔다는 한 여학생. 같은 20대인 주제에 그들의 젊음이 부러웠다. 나도 조금이라도 더 어릴 때 여행을 알았더라면 지금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감자는 질렸어

밥 먹고 친구들과 홍등가 쪽을 한번 가보기로 했다. 암스테르담에서 여러 밤을 보냈지만 나도 처음이다. 남자 둘 여자 둘, 넷이면 두려울 게 없으니 이 기회 아니면 또 언제 가볼까 싶어서. 다들 바짝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전혀 무서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이상하게 보지 않으려고 '저분들은 일하는 중이다', '이 나라의 문화다'라며 속으로 백번 되뇌었다. 눈이 마주쳤을 땐 기분이 이상했지만. 이런 곳이구나 한번 봤으면 됐다 금방 쓱 보고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새 칫솔과 생수, 먹을거리들을 좀 샀다. 이제 여행 중 생활용품을 사는 게 낯설지 않다. 오늘도 숙소 가는 길에 Leidseplein의 왁자지껄한 술집들을 지나쳤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맥주도 다섯 잔이나 마시고, 아침부터 밤까지 정말 알차게 구경했으니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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