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환 Oct 15. 2024

그 남자 죽자 그 여자 살자 - 2





ㆍㆍㆍ 그 남자 ㆍㆍㆍ

 원투 원투 훅! 백스텝 잽 잽!

 요즘 복싱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이 사각의 링 위에서, 나는 비로소 살아있다.

 헤드기어를 끼면 시야가 절로 좁아져 오직 눈앞의 상대만 보인다. 나는 터진 입술에서 난 피를 혀로 핥으며 다리를 분주하게 움직인다.

 쓱! 상대의 주먹이 내 귓가를 스칠 때 들리는 바람 소리가 황홀하다.

 빡! 상대의 얼굴에 내 주먹이 꽂힐 때 느껴지는 손맛이 짜릿하다.

 땡!

 종이 울리면 그때부터는 생각할 시간이 없다. 무엇이든 생각하면 늦다. 풋워크, 가드, 더킹, 위빙, 패링…. 머리가 아닌 몸이 익힌 기술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나면 이번엔 내 차례다. 잽, 훅, 어퍼, 스트레이트…. 수 없이 연습해 몸에 밴 동작으로 상대를 향해 주먹을 내뻗는다. 이 모든 게 완벽하다.

 처음 체육관에 갔을 때는 주먹을 내기는커녕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함께 시작한 관원들에 비해 실력이 더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 시작한 이래로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체육관에 간 탓이다. 집에 홀로 있을 때면 여전히 우울감이 나를 덮치지만 그럴 때마다 링 위에 오른 내 모습을 상상하며 주먹을 내뻗는다. 세상이 전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생각해 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불과 석 달 전만 하더라도 나는 방 천장에 끈을 걸고 목메는 시늉이나 했다. 지금은 방 한가운데 샌드백을 두고 하루 종일 두들긴다.

 그래. 내가 복싱을 하게 된 건 운명이다. 신이 나에게 복싱이라는 운동을 내렸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ㆍㆍㆍ 그 여자 ㆍㆍㆍ

 내가 107호 남자에게 복싱을 권했다.

 말로 한 건 아니다. 대화 한번 해 본 적 없는 사이에 내가 복싱을 권해봤자 당황스럽기만 할 테고, 그 뜬금없는 제안을 그가 받아들일 리도 없다. 나는 조금 더, 아니 훨씬 더 확률이 높은 방법을 사용했다.

 나는 먼저 화이트보드에 간단한 수식 하나를 세웠다. 한 사람이 하루에 하나의 광고지를 보게 될 확률을 P라고 가정했을 때, 각각 다른 장소에서 5번 연속으로 같은 내용의 광고지를 보게 될 확률은 P*P*P*P*P, 즉 P의 5 제곱이다. 107호 남자가 복싱 광고지를 한 회 받게 될 확률을 30퍼센트라고 잡으면 0.3 * 0.3 * 0.3 * 0.3 * 0.3, 5번 연속해서 같은 광고지를 받을 확률은 겨우 0.00243퍼센트다.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할 확률이 대략 0.001퍼센트다. 그보다 아주 조금 높은 확률이다.

 나는 골목 곳곳에 붙은 복싱 체육관 광고지를 수거해 그것들을 107호 남자가 볼 법한 곳들에 다시 가져다 붙였다. 그가 집에 들어오다 보게 될 고시텔 정문에, 신발을 벗다 보게 될 현관문 아래에, 병원을 갈 때마다 이용하는 버스 정류장에, 전에 보았던 약 봉투에 적힌 약국 이름을 기억해 옆 동네에 있는 그 약국 건물의 벽면에도 가져다 붙였다. 결정적으로 나는 107호 남자가 집으로 오는 길에 지나치는 건물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가 지나가는 타이밍에 맞추어 광고지를 눈처럼 뿌렸다.

 사람은 우연한 사건이 반복되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필연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인식한다. 인간의 인지적 편향 중 하나인 패턴 인식 편향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무작위 사건에서도 의미 있는 패턴을 찾으려 하므로 우연한 사건의 반복을 운명으로 해석한다. 연속해서 복싱 체육관 광고지를 보던 107호 남자가 심지어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오는 그것을 받아 보게 되었을 때, 그의 뇌는 그 사건을 운명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마침 체육관에서는 1개월 무료 이벤트도 하고 있었다. 공짜는 손실이 없기 때문에 두 배는 더 매력적이다. 이쯤 되면 나라도 권투 글러브를 낀다.

 이후 107호 남자는 마주칠 때마다 땀 냄새를 풍겼다. 글러브를 묶어 목에 걸고 다니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우울한 기색이 싹 없어졌다. 다크 서클은 사라졌고, 행동도 전처럼 느릿느릿하지 않았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의 심리는 보통 과거와 미래에만 가 있기에 그토록 괴롭다. 그것을 현실로, 지금 이 순간으로 돌려줄 만한 데에는 역시 운동만 한 게 없었다.

 며칠 전엔 주방에 들어갔다가 섀도복싱을 하고 있는 107호 남자를 발견했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엽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가만히 쳐다보며 씩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뻘쭘한지 서둘러 주방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내 작전이 완벽히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피엔딩인 줄로만 알았다.

 오늘 밤의 일이다. 99년의 공전주기를 가진 사라야치 혜성이 지구와 가까워져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거리라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는데, 막 계단을 내려오는 107호 남자와 마주쳤다. 가볍게 웃으며 눈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남자는 내 눈을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하고는 서둘러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옥상에 올라가서야 그가 왜 그랬는지 알 거 같았다. 오후에 한 차례 내린 국지성 폭우 탓에 옥상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입구에 있는 커다란 물웅덩이를 그대로 밟고 걸어갔는지 옥상 바닥에는 하나의 발자국이 난간을 향해 짙게 찍혀있었다. 그것을 따라 걸어가 보았더니 옥상 한쪽에 있는 난간 앞에 그 발자국이 유난히도 많이 찍혀 있었다. 그걸 보고 알았다. 방금 107호 남자는 여기서 뛰어내릴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 수많은 발자국은 그을까 말까 망설이다 손목에 낸 주저흔이나 다름없었다.

 어쩐지. 최근 107호 남자가 더 이상 체육관에 가지 않는 거 같았다. 왜 갑자기 복싱을 그만뒀지? 왜 상황이 더 악화되었을까? 결국 나 때문일까? 괜히 내가 개입해서 그의 상태가 더 심각해진 건 아닐까? 난간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며 서성였을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덩달아 나도 우울해졌다.

 실은 나 역시 최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며칠 전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뇌과학 연구 기관 취업에 실패했다. 들어가려고 거의 일 년을 공들인 곳이었다. 심지어 넷 중 셋을 뽑는 최종 면접 단계에서 떨어져 그 충격이 더하다. 면접 말미에 최근 쟁점이 되었던 연구 결과에 대해서 심사 위원과 다른 해석을 했던 게 후회된다. 집 안 사정이 좋지 않아 더 이상은 팔자 좋게 학교만 다니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

 먹구름이 가득 낀 탓에 끝내 사라야치 혜성을 보지 못했다.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서 옥상에 올라갔지만 도리어 더 우울해진 채로 내려왔다.

 복도를 걷다가 107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전 01화 그 남자 죽자 그 여자 살자 -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