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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환 Oct 17. 2024

그 남자 죽자 그 여자 살자 - 4





ㆍㆍㆍ 그 남자 ㆍㆍㆍ

 한번 죽었다 살아난 이후로 내 머릿속은 온통 104호 여자 생각뿐이었다.

 그 약은 왜 아프기만 하고 효과가 없었을까? 그녀가 나를 속인 건가? 그렇다면 대체 왜 그랬을까?

 그녀를 만나 내게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어도 104호 여자는 그날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녀는, 살아있을까? 설마 혼자 죽은 건 아니겠지?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약을 먹고 겪었던 고통이 워낙에 극심해 한동안 다시 자살을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사흘쯤 지나자 슬슬 다시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언제나처럼 잠들기 힘들었던 그날 밤이었다. 술의 힘을 빌려 잠이 들 생각으로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 병을 사 오는데, 한 거한이 내가 사는 고시텔 건물의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거한이 방금 빠져나온 방은 위치로 보아 104호였다. 막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거한의 얼굴이 환한 가로등 불빛을 받아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짱딱이었다. 불현듯, 약을 먹은 다음 날 아침에 짱딱이 기묘하게 웃으며 반복해 중얼거리던 그 말이 떠올랐다.

 나를 속였겠다? 그랬겠다?

 짱딱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졌고, 뒤이어 도착한 나는 깨진 창문 사이로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 꺼진 거실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그녀도 보이지 않았다.

 … 저기요? …104호님?

 문득 시야가 닿지 않는 다른 방에서 그녀가 해코지를 당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나는 성큼 열린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급히 다른 방에도 들어가 보았지만 아무도 누워있지 않은 텅 빈 침대만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걸까? 다시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거실 한쪽에 붙어있던 낯익은 종이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화이트보드 한구석에 붙어있던 그것은 복싱 체육관 광고지였다. 나는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화이트보드를 비췄다.

 …107호 남자 살리기… 운동으로 호르몬 자극… 체육관을 다니게 하려면?… 옥상에서 자살 시도… 충격요법…

 최근 겪은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공용 주방에서 그녀가 나를 깨운 일, 집으로 오는 길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복싱 광고지를 받았던 일, 옥상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그녀와 마주쳤던 일, 현관문 앞에 서 있던 그녀가 같이 죽자고 말했던 일.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화이트보드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일정표로 그녀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 오스트리아 학회…8/19 22시 귀국…

 오늘이다. 오늘밤 그녀가 온다. 아, 이 일정표를 짱딱도 보지 않았을까? 짱딱이 어디선가 몰래 숨어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나는 황급히 밖으로 나와 고시텔 근처를 수색했다. 역시나. 얼마 안 가 근처 골목에서 서성거리던 짱딱을 찾았다.

 여기서 뭐 해요?

 아, 누굴 좀 기다려요.

 누구요?

 몰라도 돼요.

 창문을 깨고 104호 안으로 들어간 그의 행동과 지금 내 눈앞에서 보이는 수상한 몸짓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위험한 상태였다.

 나는 뭘 하려는지 알고 있다며 그를 말렸지만 내게 계획이 들킨 짱딱은 이제 대놓고 104호 여자를 향해 거친 욕을 퍼부었다. 나는 그녀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한 행동이라고 말하며 그를 설득했지만 이미 흥분한 짱딱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넌 왜 그러는데? 네가 뭔데? 남자 친구라도 돼?

 그때였다. 멀리 짱딱의 등 뒤로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향하는 104호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일부러 짱딱을 자극해 그가 뒤돌아보지 못하고 나를 따라오게 했다. 그녀에게서 멀어지도록 그를 유인했다. 그러다 어두운 골목에 숨어 놈의 시야가 나를 잠깐 놓친 사이 나는 다시 고시텔을 향해 달렸다. 그녀를 만나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려고 했지만, 104호 안에는 커다란 캐리어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근처 골목을 뛰어다니며 그녀를 찾았다. 아아, 어렵사리 찾은 그녀는 하필 짱딱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안 돼! 나는 지름길로 내달려 겨우 그녀를 따라잡았다. 104호 여자의 손을 잡아채 벽 뒤로 끌어당겼다. 나는 거친 숨을 고르며 내 품 안에 안긴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우리를 덮쳤다. 아, 한발 늦었다.

 성난 얼굴로 나타난 짱딱이 104호 여자의 팔을 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나는 앞으로 나서 짱딱을 말렸지만 흥분한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짱딱이 성가시게 구는 나를 난폭하게 밀쳤다. 나는 몸의 균형을 잡고 짱딱을 향해 주먹을 뻗으려 했지만 그럴 새가 없었다. 내가 겨우 몸을 일으킬 때마다 성큼 다가온 놈이 내 몸을 연신 밀어 나는 그저 계속 뒤로 밀려나기 바빴다. 결국 그러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내 몸 위로 짱딱이 성큼 올라탔다. 짱딱이 그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목을 졸랐다. 금방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토록 원했던 죽음을 이렇게 맞이하나? 숨이 막 넘어가나 싶었던 그때. 104호 여자가 놈의 뒤에서 초크를 걸었다. 그녀의 공격에 놈의 손에 힘이 풀린 잠깐 사이, 나는 안간힘을 다해 놈을 뒤로 밀어냈다. 내일은 모르겠지만 오늘은 죽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또 내쉬었다. 다시 두 주먹을 올리고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놈의 주변을 돌았다.

 흥분한 짱딱이 내게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쓱!

 마구잡이로 뻗은 놈의 주먹이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상체를 홱 기울여 놈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무방비인 놈의 턱에 라이트 훅을 꽂았다.

 빡!

ㆍㆍㆍ 그 여자 ㆍㆍㆍ

 끈질기게 우리를 숨 막히게 한 폭염이 물러가고 어느덧 신선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가을을 알렸다.

 옥상 난간에 기대 밤하늘을 올려 보는데 107호 남자가 나타났다. 막 옥상 문을 열고 나타난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멋쩍게 웃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는 가볍게 손을 올려 화답했다. 내 옆으로 다가와 뻘쭘하게 선 그 남자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오늘 날씨 참 덥죠?

 시원한데요.

 그렇죠?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제가 원래 심장이 빠르게 뛰는 편이 아니거든요? 이렇게 만져봐도 보통은 뛰는지 안 뛰는지도 모를 정도로 느려요. 그런데 요즘은 하루에 두 번씩 심장이 빨리 뛰어요. 첫 번째는 복싱할 때. 한 일 분만 움직여도 미친 듯이 뛴다니까요. 몸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아요. 그리고 두 번째는 언제인지 아세요?

 나는 알았지만 맞추기는 싫었다. 내가 잠자코 있자 그가 부끄러워하며 답을 말했다.

 …정연 씨 볼 때요….

 그의 수줍은 고백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미안해요. 성재 씨. 저는 심장이 안 뛰어요.

 그 남자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이렇게 급격히 우울해지는 걸 보아하니 아직 전두엽과 변연계를 잇는 신경망이 한참 얇은 모양이다.

 나는 107호 남자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결국 뇌의 신경 화학 물질이 분비되어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런 감정이 일어날 때는 전전두엽의 기능이 억제되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는 말을 꺼내려다가 그만뒀다. 지금 이 남자에게 필요한 건 그런 뻔한 조언 따위가 아니라 그저 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일 테니까.

 나는 107호 남자에게 요즘 그가 새롭게 쓰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말했다. 반가운 요청이었는지 그가 금방 어두운 안색을 거두고 눈을 빛내며 자신이 쓰는 소설의 내용을 말해 주었다.

 뭐랄까, 그 남자가 전해 주는 이야기는 어딘가 다소 음울하고 이상했지만, 낮게 깔린 중저음의 파동이 맑은 공기를 타고 내 고막에 닿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107호 남자가 목소리는 참 좋다. 그때 문득 그런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이 남자와 옥상에 자주 올라올 것 같다고.

 나는 내 옆에 선 그에게 저것 보라며 손가락 끝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지구에 근접한 사라야치 혜성이 우리 위에서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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