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빽한 글 vs 여백이 있는 글
언젠가 뜨거운 커피를 들고 걷다가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에 걸려 발을 헛디뎠습니다. 중심을 잡으려 몸에 잔뜩 힘을 줬지만 허사였습니다. 검고 뜨거운 액체는 격하게 출렁이다가 컵 위로 솟구친 뒤 순식간에 손등에 내려앉았습니다.
"앗, 뜨거워!"
왼손이 벌겋게 부어올랐습니다. 커피 전문점에서 음료를 받아들면서 "가득 채워주세요" 했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화상 연고를 바르는 와중에 퍼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 '커피를 조금만 덜 담았으면, 가득 채우지 않았으면 쏟지도 않았을 텐데. 때로는 채움보다 비움이 삶에 보탬이 되는지 몰라….'
사람은 일을 그르칠 때마다 원인을 찾습니다. 무조건 남 탓을 하거나 혹독하게 자신을 책망합니다. 남 탓과 내 탓에는 교집합이 존재합니다. 집착입니다. 집착이 강하면 매달립니다. 나를 바꾸지 않고 남을 떠나지 못 합니다. 포기할 줄도 모릅니다. '도가 지나친 수(守, 지키다)’ 같은 행동이라고 할까요.
집착은 마음 한구석에 ‘밑 빠진 독’을 만듭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의 주머니’를 차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삶의 마지막에 가서야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겨우 깨닫습니다. 집착은 눈을 멀게 합니다. 두 눈만 멀게 할까요? 아닙니다. 이성의 발목을 잡아 머리를 아둔하게 합니다. 반면 비우는 것은 '공(空)'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텅 빈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욕심을 비우면 나를 중심에 놓지 않습니다. 남을 배려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고려는 합니다.
“이게 꿈이야, 현실이야?”
영화 <인셉션(Inception)>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타인의 꿈에 침입해 생각을 훔치고 조작하는 요원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살인 누명을 벗고 꿈에 그리던 집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관객을 놀라게 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주인공의 꿈인지 현실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마치 장자(莊子)의 호접몽(蝴蝶夢)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를 뭉개버립니다.
열린 결말은 관객을 '상상의 열차'에 태우곤 합니다. 저도 <인셉션>을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감독이 던진 질문을 곱씹었습니다. 영화의 결말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했던 것 같습니다. 채움이 아닌 비움이 여운을 남긴 셈이죠. 마찬가지로, 읽다 보면 묘한 여백이 느껴지는 글이 있습니다. 성기고 투박한 것과는 다릅니다. 작가가 더 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공간을 남겨둔 것 같다고 할까요. '절제의 미덕'을 풍기는 문장 말입니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소설 《1984》에서 ‘여백의 묘미’를 제대로 살렸습니다. 작가는 첫 페이지에서 독자에게 'The clocks were striking 13'이란 문장을 보여줍니다. '시계가 열세 번 울렸다' 또는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전 이 문장을 읽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13시? 무슨 소리지?’ 이런 의문이 머릿속을 맴돈다면, 여러분도 작가의 작전에 걸려든 건지도 모릅니다. 문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가)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
(나) 괘종시계가 무려 열세 번이나 울렸다. 암울한 징조다. 그렇다. 작금의 시대는 비정상적이다. 인간이 일개 기계부품으로 취급당하는 어두운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은 (나) 같은 식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가)와 (나)는 단순히 길이만 다른 게 아닙니다. 행간에 스민 글쓴이의 태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가)는 넉넉하게 비운 문장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라, 저렇게 느껴라' 강요하지 않습니다. 간결한 문장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독자가 알아서 받아들이고 판단하도록 맡긴 거죠. (나)는 빽빽합니다. 작가가 설정한 소설의 배경과 상황을 초반부터 상세하게 설명하려 듭니다. 욕심을 내려놓지 않고 여전히 뭔가를 붙들고 있는 듯합니다. 즉, ‘수(守)의 자세’입니다.
여기서 질문입니다. 조지 오웰은 왜 (가)처럼 적었을까요? 의도가 뭘까요? 제 짐작은 이렇습니다. 독자 스스로 의문을 품도록 유도한 게 아닐까요. '흠,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린다고? 소설 속 세상이 그만큼 비정상적이라는 이야기네.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상상의 날개를 펴도록 일종의 장을 마련해 준 거죠. 적절한 암시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맞습니다. 작가는 문장을 채우지 않고 절제함으로써 독자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비우고 내려놓는 ‘공(空)의 태도’입니다.
꾸밈말을 쓸데없이 늘어놓지 않는 것도 일종의 공(空)입니다. 스티븐 킹(Stephen King)은 자신의 저서 《유혹하는 글쓰기(On writing)》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은 형용사로 포장돼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adjectives)"고 했습니다.
명쾌한 지적입니다. 수식어가 문장에 제대로 이바지하지 못하면서 공간만 차지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추가적인 보충 수업을 들었다'는 그냥 '보충 수업을 들었다'로, '최종 결론' 대신 '결론'으로 적으면 충분하죠. 명사를 꾸민다는 명목으로 이런저런 수식어를 가득 채운 문장은 비비 꼬인 글이 되기 쉽습니다. 과도한 형용사와 부사는 문장의 힘을 빼는 불순물밖에 안 됩니다. 볼테르(Voltaire)는 말했습니다. "형용사는 명사의 적(敵)이다."
명사와 동사가 나무의 든든한 뿌리라면, 형용사와 부사는 가지와 이파리입니다. 웬만한 나무는 일정한 시기마다 잔가지를 잘라줘야 합니다. 말라비틀어진 줄기, 멋대로 뻗은 가지를 솎아내야 열매를 잘 맺고 튼실하게 자랍니다. 문장도 가지치기가 필수입니다. 더욱이 글쓰기 훈련을 시작하는 단계라면, 형용사와 부사를 줄이면서 문장의 근본인 명사와 동사 중심으로 쓰는 버릇을 들이는 게 좋습니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 품이 포근하게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차를 몰고 가다 라디오에서 곽진언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편안한 여백을 선사하는 노래 같았습니다. 뭐랄까요. 비집고 들어갈 만한 허술한 '빈틈'이 있다고 할까요. 자극적인 가사와 화려한 멜로디로 노래를 채우지 않았는데도 통기타 반주와 진중한 저음이 제 귀를 잡아당기더군요.
음악도, 그림도, 글도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어렵습니다. 하수(下手)는 무조건 가득 채우려 하고, 중수(中手)는 기계적으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애씁니다. 비우고 내려놓는 건 오로지 상수(上手)의 몫입니다. 내공을 쌓은 사람만 압니다. 비우는 행위는 단순히 덜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무언가를 채우는 방법이란 사실을. 아무래도 비움과 채움은 이어져 있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