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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주 Sep 16. 2016

사랑은 함부로 변명하지 않는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감정에 대하여...

나는 '키우다'라는 동사를 좋아한다. '키우다'는 '사랑' '감정' 같은 명사와 은근히 잘 어울리는 단어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확 타오르는 사랑도 있지만, 모든 사랑이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랑은 시간과 정성에 의해 느릿느릿 키워진다. 두 사람이 마련한 은밀한 텃밭에, 두 사람만의 씨앗을 심은 뒤, 물을 주고 거름을 뿌릴 때 튼실한 감정이 찬찬히 성장한다.


감정이 그리고 사랑이 키워지는 과정에선 꽤 그럴듯한 정황증거(情況證據)가 나타나는 법이다. 만약 밤이 밀려오는 속도가 평소와 다른 것 같고 창으로 스며드는 공기의 서늘함이 전과 다르게 느껴진다면,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지도 모른다. 사랑이 싹틀 때 우린 새로운 풍경이 아닌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므로….


일상에서, '이게 진짜 사랑이구나...' 싶은 사례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얼마 전 5호선 공덕역에서 생각지도 않은 깨달음을 얻었다. 사소한 장면 하나가 내 마음에 훅 하고 들어왔다.


퇴근 시간, 콩나물시루 같은 전동차에 가까스로 몸을 밀어 넣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빈자리가 없었다. 승객들을 둘러봤다. 절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전화를 걸거나 동승한 사람과 왁자지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경로석에 앉은 노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할머니 옆에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제법 시끄러웠다. 게다가 어르신은 뉴스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어허” “이런” 등의 추임새를 꽤 격렬하게 넣었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앵커 멘트와 어르신의 목소리가 객차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손등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여보, 사람들 많으니까 이어폰 끼고 보세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아, 맞다. 알았어요. 당신 말 들을게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내더니 보일 듯 말 듯 한 엷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귀에 꽂았다. 일련의 동작이 마지못해 하는 행동은 아닌 듯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당신 말 들을게요”라는 어르신의 한마디가 내 귀에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문장으로 들렸다.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오”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일 수도 있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인지 모른다.


'사랑'에 대한 사례 하나 더. 비가 올 듯 말 듯 우중충한 새벽, 일산 국립암센터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선 서울로 출근하는 직장인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꽤 많이 탑승한다. 한 번은 4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여성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 서울역 가는 1200번 뻐스 서요?"


양쪽 손에는 오랫동안 병원에서 지낸 듯한 흔적이 보였다. 옷가지와 이불 보따리가 잔뜩 들려 있었다.


"저도 1200번 탑니다. 오면 알려드릴게요."


마침 버스가 도착했고 그녀와 나는 나란히 올라탔다. 몇 분쯤 지났을까. 그녀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당신인교? 환자가 잠 안 자고 뭐 해요?”


병상에 있는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인 게 분명했다. 난 바로 뒤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통화 내용을 엿듣게 됐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녀가 남편에게 읊조린 한마디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녀는 꽤 긴 통화를 마치면서 뭔가를 고백하듯 말했다.


"그래요. 당신이 곁에 있어 참 다행인 것 같아요. 나도 당신 덕분에 버티고 있나 봐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렸다. 저릿했다. 한편으론 의문도 들었다. 아니, 환자의 보호자가 환자 덕분에 버틴다니, 무슨 말이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번쩍하고 머리를 스치는 글귀가 있었다.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이란 말이 퍼뜩 떠올랐다.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문득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애지욕기생’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닥친 현실은 녹록하지 않지만 남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동력으로 삼아 주어진 삶을 버티고, 아니 이겨내고 있는 게 아닌지.


짐작건대, 그녀는 남편에게 틈틈이 전화를 걸어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진심 어린 말로 사랑을 고백할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의 아픔을 어루만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숭고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확인할 것이다.


 “당신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라고 속삭이며….


어느 심리학자가 그랬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성 간의 사랑은 그 가운데 가장 배타적이다"라고. "어쩌면 사랑은 두 사람을 단위로 한 이기주의일 수도 있다"고. 그 말을 곰곰 되씹어본다. 사랑에 빠지면 우린 상대방을 독점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이기적인 요소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규정만으론, 사랑의 본질을 단언할 수 없다. 사랑만큼 복잡한 감정도 없지 않나. 기질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보완하고 아끼는 마음도 사랑이며, 각자가 지닌 삶의 조각을 맞추거나 서로에게 맞춰지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 또한 사랑이다.


사랑의 본질이 그러할 것이다. 사랑은 함부로 변명하지 않는다. 사랑은 순간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려 말하거나 방패막이가 될 만한 부차적인 이유를 내세우지 않는다. 사랑은, 핑계를 댈 시간에 둘 사이를 가로막는 문턱을 넘어가며 서로에게 향한다.


또한, 사랑은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때론 사랑이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들이밀기도 하지만, 그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는 것 역시 사랑이라는 이름의 동아줄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우리를 망가뜨리지 않는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사랑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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