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Oct 27. 2023

4남매 2호, 딸.

둘로 끝날 것이 넷이 되었다.

세상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지만 개중 가장 무기력한 좌절은 탄생 그 자체일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1980년, 난생처음 눈을 떴을 때 난 허름한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남쪽 섬에서 무작정 상경한 부모님은 빈손도 아닌 마이너스 손이었다. 쩍쩍 갈라지다 못해 군데군데 팬 시멘트 바닥 한가운데에 이웃과 함께 사용하는 수도 펌프가 있는, 그런 곳을 마당이라고 부르는 다 쓰러져가는 건축물이 내 집이었다. 부모님은 저녁마다 날 빨간 대야에 넣고 김장 무 씻듯 내 몸을 씻겼다. 그랬다. 당시 우리 집은 중산층에도 끼지 못한 하류층이었다.


부모님 외에 언니라는 인간이 나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요물 같은 것은 이미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상태였다. 젊은 부부의 고단한 타향살이에 첫딸이 안겨주었을 행복과 기쁨은 쉬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리틀 김혜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예쁘장한 것이(아빠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쉴 새 없이 예쁜 짓을 하면서 앙큼을 떨었다. 아빠는 언니가 걷는 법을 잊을 정도로 안고 다녔다.


반면, 오씨 집안 2호기로 출격한 난 불량품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동네 노인들의 입방정이 사달이었달까. 할머니들은 날 임신한 엄마의 배를 볼 때마다 아들이 틀림없다고 입을 모았고 엄마는 어르신들의 말에 혹했다. 의사의 말보다 노인의 지혜를 더 믿고 싶었으리라. 출산이 무슨 균형 잡힌 식단을 짜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딸 하나에 아들 하나를 낳아 균형 잡힌 가족 구성원을 이루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얘는 발길질도 제 누나와는 달리 유난히 잦고 힘차다'며 한껏 들떴다. 플라시보 효과였겠지만.



성격이 급한 나는 어느 날 난데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엄만 출산을 앞두고 여차하면 병원으로 달려갈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지만, 난 엄마가 병원에 갈 틈을 주지 않았다. 엄마는 엉겁결에 집에서 나를 낳았다.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수습하기도 전에 더 황당한 사실을 깨달았으니, 아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둘째 녀석이 놀랍게도 딸이었던 것. 지금은 까맣게 잊힌 그날의 광경을 상상해 보자면 아마도 모녀간에 뻘쭘한 정적이 흐르지 않았을까?


엄마는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빠가 '우리 애들 세대엔 남자나 여자나 똑같다'며 흔치 않은 통찰력을 발휘했지만 엄만 기어이 세 번째 임신을 강행했다. 그리고 어느 날 동생이란 놈들이 나타나 꼬물대기 시작했다. 똑같이 생긴 두 놈이 동시에 빽빽 울어댈 때마다 혼란을 넘어 혼돈 그 자체였다. 엄만 평생의 운(?)을 다 써서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엄마 배 속 사진을 찍을 때마다 놈들은 일렬종대로 헤쳐모여 어른들을 조롱했다. 애들이 겹쳐 있으니 아무도 쌍둥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엄마가 한 놈을 낳은 지 10분 만에 다시 진통을 시작했을 때, 산부인과 의사는 눈물을 흘리며 18년 만의 첫 오진을 인정하고 쌍둥이 중 한 명을 입양하겠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아빤 기쁨이 아닌 분노에 겨워 의사의 멱살을 잡고 고함을 질렀다.


내 부모가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들이었다면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아이들 양육비라도 받아냈으련만,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젊은 부부는 그럴 생각을 할 힘조차 없었다. 두 아들을 안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캄캄한 앞날을 근심하며 그저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하지만 쌍둥이는 곧 동네 스타가 되었다. 그 당시엔 쌍둥이가 그리 흔치 않았기에 매일 동네방네에서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혈혈단신 빈손으로 단둘이 상경할 정도로 용감하고 긍정적이었던 엄마 아빠도 금세 쌍둥이를 보며 활짝 웃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난 이도저도 아닌 아이가 되었다. 4남매 중 둘째 딸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첫딸이 부부에게 안겨준 기쁨과 설렘을 둘째 딸이 또 선사할 수 있을까? 둘째 딸이 아무리 재롱을 떤들 어린 쌍둥이 아들의 옹알이보다 귀여울까? 게다가 난 아들이 아니라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였다. 부모님뿐 아니라 친척과 동네 사람들까지 '너만 아들이었으면 둘로 끝났을 일이 넷이 되었다'는 말로 늘 날 쥐어박았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형제들과는 다른 나만의 특장점을 찾아 어떻게든 튀어야 했다. 그렇게 나의 생존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기억력이 남다른 아이, 영재일지도 모를 똑똑한 아이, 엄마 잘 도와주는 착한 아이, 고집 센 아이, 독한 아이, 자기 할 일은 알아서 하는 아이, 아무튼 유별난 아이'로 마흔을 넘게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그렇게 똑똑하지도, 착하지도, 고집이 세지도, 독하지도, 독립적이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4남매 2호, 딸.

고백하건대 나는 이중생활을 해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