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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Nov 04. 2023

언니가 여우면 난 불여우가 되는 수밖에.

그래야 나도 살아

나는 만 세 살에 스스로 한글을 떼서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순전히 내 생존 전략이었다고 믿는다. 마흔 넘게 살아 본 결과 내게 특출난 구석은 없다는 사실이 확실시되었기 때문이다. 눈치가 좀 빠른 것 같긴 한데 지인들의 인정은 받지 못했다. 나처럼 둔한 인간은 처음 본다며 입들을 모으니까.


어떤 방법으로 혼자 한글을 배웠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부모님 말씀으로 추측하건대 아무래도 혼자만의 싸움을 한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언니와 쌍둥이 남동생들에게 쏠린 엄마 아빠의 사랑을 빼앗기 위한 치열하고도 고독한 경쟁이었으리라.


나보다 두 살 위인 언니는 한글도 구구단도 나보다 먼저 배웠고 속셈 학원에 다니며 산수도 나보다 먼저  시작했다. 그런 언니 곁에서 눈동냥, 귀동냥을 했을 테지. 아빠가 그랬다. 언니에게 "이삼은?" 하고 물었을 때 언니가 "팔"이라고 대답하면, 내가 기회를 놓칠세라 "아빠~! 언니 틀렸지? 이삼은 육이지?"라며 득달같이 끼어들었다고.


여우 같은 언니가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난 불여우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뭐든 그럴싸하게 흉내 내는 정도의 손재주밖에 갖지 못한 데다 매사를 대충 얼버무리는 식으로 끝내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큰 사위가  '고 대충 여사'라는 별명을 붙였을까. 하지만 매일 아침 언니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손질했다. 길게 빗어 내린 머리, 지그재그로 묶은 머리, 땋은 머리, 올린 머리, 땋아서 올린 머리 등등. 엄마의 손길이 내게 닿기엔 시간이 늘 모자랐기에 난 주로 짧은 더벅머리 신세였고 머리가 조금 길면 빠글빠글 양배추 펌을 했다.


마냥 해맑은 뽀글 머리가 나다. 옆이 내 언니.



물론 엄마에게 항변할 기회를 준 적이 있다.


"머리를 빡빡 밀면 머리카락이 굵어지고 숱도 많아진대서 넌 여러 번 빡빡 밀어서 그래. 너희 언니는 시기를 놓쳐서 어쩔 수 없었고."


변명 한번 그럴듯했다. 엄마는 언니 옷도 참 예쁘게 입혔다. 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어도 앙증맞은 모자를 씌우거나 목에 스카프라도 묶어서 '엄마 손 탄 아이'라는 티를 냈다. 반면 난 주로 티셔츠에 멜빵바지 차림이었다. 꼭 사내아이 같았다. 심지어 한복도 남자 한복이었다. 명절마다 엄마는 언니 머리를 땋아 머리끝에 댕기를 묶고 옷고름을 매 주었지만 나는 발목에 '대님'을 묶었다.


내 발목에 묶인 끈이 '대님'이라는 것. 그조차도 허술하게 질끈 동여맸을 뿐이다. 내 바로 뒤에 있는 사람이 언니다.



대체 나는 왜 남자 한복을 입고 있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심플했다.


"옆집 아줌마가 줬어."





내가 보기에 부모님에게 언니는 공주님이고 난 그냥 리틀 보이 같았다. 그러니 언니가 문제를 풀다 정답을 틀리면 재빨리 엄마 아빠에게 일러바쳐 내 존재감을 어필했다. 부모님은 쪼그만 게 어쩌다 우연히 한두 번 맞춘 거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날은 언니가 속셈 학원에 가는 날이었다. 학원 이름도 기억한다. '모범 속셈 학원'. 원장이 직접 봉고차를 몰고 원생들 집을 돌며 아이들을 차에 태우는 중이었다. 언니만 학원에 가는 게 샘이 났는지 난 언니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가 안으려 할수록 더 심하게 울며 발버둥 쳤다.


원장 선생님은 도저히 안 되겠다며 그냥 차에 태우라고 했다. 엄마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난 내복 차림이었는데 이미 차량 운행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기에 손에 집히는 대로 티셔츠 한 장 겨우 들려 보냈다고 한다. 학원에 도착한 뒤 언니는 교실로 들어갔고 난 원장실에 남았다. 선생님은 심심하니까 한글이나 배워보자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는다. 내가 글을 읽는다는 사실을.


"어? 글을 읽네? 너 혹시 쓸 줄도 아느냐? '엄마' 써볼래?"


썼다.


"어어? 더 어려운 것도 쓸 줄 알까? '꽃' 써볼래? '꽃'."


썼다.


선생님은 그 후로도 이거 써 봐라, 저거 써 봐라 하면서 내 한글 실력을 요모조모 시험했다. 그리고 아이들 하원 길에 우리 집에 들러 엄마를 붙잡고 애가 영재 같다며 본인이 책임지고 가르칠 테니 내일부터 학원에 보내라고 했다. 당시 우리는 한 연립 주택의 반지하에서 살고 있었다. 그 어려운 형편을 뻔히 아는 원장 선생님은 공짜로 내 교육을 맡으셨다. 따지고 보면 난 다섯 살 때부터 장학금을 받아 가계에 보탬이 된 셈이다.


보잘것없는 오씨 집안에 처럼 활기가 돌았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도 날 앉혀 놓고 이것저것 테스트했다. 글만 쓰는 줄 알았더니 구구단도 다 외웠다. 언니랑 나란히 앉혀놓고 산수 문제도 풀게 했는데 언니보다 많이 맞혔다. 엄마 아빤 놀랍고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그 후 학원을 다니는 동안 나는 슬슬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오씨 집안 둘째 딸 천재 사건>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난 엄마 아빠에게 '영재일지도 모르는 똑똑한 아이'라는 인식을 깊이 심어주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식은 훗날 내게 또 다른 상처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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