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짝은 생각보다 무거운 물건이다. 살면서 그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문짝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엄만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덕분에 우린 얼마 지나지 않아 반지하에서 연립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주방과 화장실이 집 안에 있어 편했고 무엇보다 종일 따스한 볕이 드는 아늑한 보금자리였다.
엄마도 행복했던 것 같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라고 악을 쓰는 대신 애들 넷이 쪼르르 누워 잠든 방으로 들어와 활기찬 동요를 틀었다. 우린 잠을 깨고도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가 나올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리다가 "살았니? 죽었니?" 하는 대목에서 동시에 "살았다!"를 외치며 까르르 잠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길 건너엔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매일 오후 서너 시가 되면 <예수님 찬양>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멜로디를 익힌 우리 4남매는 불경하게도 그 홀리한 찬송가를 함부로개사해 부르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청개구리 기질로 엄마를 힘들게 했다. 김 굽는 엄마 옆에서 쉴 새 없이 맛소금을 찍어 먹는데 엄마가 짜니까 그만 먹으라고 했다. 난 엄마가 말릴수록 더 하는 아이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엄마는 내 입에 아빠 숟갈로 맛소금 한 스푼을 털어 넣었고, 나는 빽- 울음을 터뜨렸다. 내 기억엔 없는일화이지만 엄만 지금도 술에 취했다 하면 그얘길 꺼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래도 마냥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아빠의 수입이 일정치 않았기에 부모님은 끝내 그 집을 지켜내지 못했고, 내가 여덟 살 되던 해에 경기도 하남시로 쫓겨나듯 옮겼다. 집 앞, 옆, 뒤를 아무리 둘러봐도 산, 들판, 개천뿐이었다. 그 흔한 구멍가게도 하나 없고 학교에 가려면 삼십 분이나 걸어야 하는 깡시골이었다. 집도 판잣집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형편없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시멘트 바닥으로 된 복도가 있었고 부엌도 차디찬 시멘트 공간이었다.
집 같지도 않은 그 집에서 2년을 사는 동안정말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하루는 밤중에 화장실이 급해 언니를 깨웠다. 집 밖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에 혼자 가기가 무서웠다. 심지어 전등이 나가서 촛불을 켜야 했다. 언니가 밖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문을 활짝 연 채 볼일을 보면서 촛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불꽃이 아롱거리며 날 유혹했다.
"언니, 촛불이 참 예ㅃ.... 으악!"
불꽃에 심취한 나머지 초를 얼굴 가까이 들이댄 것이 화근이었다. 앞머리에 화르르 불이 붙은 것이다. 언니도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구운 마른오징어 다리처럼 까맣게 그슬린 앞머리가 제멋대로 꼬불거렸다. 실제로 머리에서 구운 오징어 냄새가 났다. 우린 이불속으로 돌아가 다시 잠들기 전까지 낄낄거렸다.
그보다 더 큰 사건은 어느 일요일 아침에 벌어졌다. 아빠 곁에 엎드려 늦잠을 자고 있는데 별안간 어떤 거대한 힘이 날 짓눌렀다. 내장이 제 발로 튀어나와 항의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문짝이었다. 어젯밤까지 문틀에 잘 붙어 있었던 문짝이나와 아빠를 덮친 것이다. 뭐지? 도저히 앞뒤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아빠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엄마가 입만 벙긋거리며 부엌에 서 있었다. 엄마 머리 위 지붕은 반쯤 날아가고 없었다. 폭발 사고였다. 부르스타라고 하는 휴대용 버너가 폭발한 것이었다. 쌍둥이들 유치원에서 '자연농원(현 에버랜드)'으로 소풍 가기로 한 날이었다. 엄마는 따뜻한 물을 싸 보내고 싶었는데 하필 LPG 가스가 떨어져 가스레인지를 쓸 수 없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가스 배달을 부르기가 뭣했던 엄마는부르스타를 꺼냈다. 그리고 가스통을 끼우고 점화하는 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스통이 폭발하고 말았다.
엄마는 눈썹에 작은 상처를 입었을 뿐 다른 곳은 다 멀쩡했다.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엄마 아빠에겐 그걸로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집안 여기저기를 손보기 시작했다. 그날의 사건은 두고두고 우리 가족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나는 그날부터 조금씩 슬프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눈치챈 순간이었으니까. 가난이란 건 엄마를 잃을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것이었다. 문짝보다 더 무거운 가난이 날 짓누르기 시작했고 난 일찌감치 철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난 착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엄마가 빨래를 하면 옆에 쪼그려 앉아 여섯 식구의 양말을 빨았고, 엄마가 시장에 가면 무조건 따라가 짐이라도 하나 들었다. 형제들이 만화 영화를 볼 때는 옆에서 TV를 힐끔거리며 빗자루로 방이라도 쓸었다.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오씨 집안에 더부살이하는 어린 식모를 자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