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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Jun 10. 2023

거리집회 연사가 스웨덴 총리라고?

지난 2월 금요일 가족 나들이를 갔다가 우연히 T-Centralen역 세르겔 광장에서 무슨 집회가 열리고 있는 걸 봤다.

평소 이 광장에서 많은 집회나 시위가 열리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려는데 아내가 "아, 오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년 되는 날이네"라고 말했다.

2월 24일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일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2월 24일 스톡홀름 세르겔 광장에서 열린 러시아 전쟁 반대 집회

그러고 보니 우크라이나 국기로 몸을 휘감은 사람들과 대형 우크라이나 국기가 곳곳에 보였다.

평소 다른 집회보다 참가 인원이 훨씬 많은 거 같았다.

집회가 막 시작돼 잠시 곁에 서서 분위기나 사람들 표정을 지켜봤다.

스웨덴으로 온 우크라이나인을 비롯해 스웨덴 사람들도 많은 거 같았다.

이들은 집회 연사의 말을 경청하고 손뼉 치고 소리 질렀다.

우크라이나 국기로 몸을 감싼 집회 참가자

그때 집회 단상으로 활용된 세르겔 광장 계단에 한 사람이 나와 발언했는데 아내가 "저 사람 혹시 스웨덴 총리 아니냐"고 말했다.

난 "에이, 무슨... 총리가 이런 거리 집회에 나오겠느냐"고 대꾸했다.

꽤 거리가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스웨덴어 연설도 이해하지 못해 결국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 채로 집에 돌아왔다.

근데 계속 궁금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사람 누군가 했더니

결국 다음 날 검색을 해봤는데 그 인물은 놀랍게도 아내가 말한 대로 현직 울프 크리스테르손(Ulf Kristersson) 스웨덴 총리였다.

총리가 군중 집회에 나온다고?

크리스테르손 총리 전에 발언하고 큰 박수를 받은 여성이 있었는데 전 총리이자 현 사민당 막달레나 안데르손(Magdalena Andersson) 대표였다.

그 외 토비아스 빌스트룀(Tobias Billström) 스웨덴 외무장관, 역사가, 작가, 언론인, 노조연맹 회장 등이 줄줄이 연사로 나섰다.

집회 연사로 나온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 (사진=Dagens Nyheter)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광장 집회에 국가수반을 비롯해 정부 각료, 야당 대표, 각계 인사들이 다 나온 것이었다.

한국 거리 집회에 대통령, 총리, 장관 등이 줄줄이 나와서 발언하는 게 상상이 되는가.

예전 박근혜 탄핵 집회 때 정치인이 참석하기도 했지만 민간 주도 집회가 오히려 정치적으로 왜곡된다는 이유로 발언 기회도 제대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러시아 전쟁 반대 집회에서 발언하는 막달레나 안데르손 사민당 대표 (사진=Dagens Nyheter)

집회 주최자가 누군지 뭘 하는 단체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관변 단체는 아닐까.

집회를 연 단체는 노르딕 우크라이나 포럼(Nordic Ukraine Forum)이라는 곳이었다.

스웨덴 비영리 비정부 조직으로 스웨덴과 우크라이나 사이의 다리가 되고 지식과 서로의 모범사례 등을 공유하는 민간단체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매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러시아 침략반대 시위를 벌여왔다.

이 단체는 전쟁 발발 1년을 맞아 광범위하고 초당파적인 시위를 벌이려고 정부, 정당, 각계 조직의 대표를 초청했다고 말했다.

NGO가 집회에 나오라고 하니 총리, 야당대표, 장관, 각계 인사가 군말 없이 왔다는 거다.

제대로 된 단상도 아닌 모양 빠지는 광장 계단에서 기껏해야 5분 말하려고 일과시간도 아닌 토요일 오후에 스웨덴 정치 리더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노르딕 우크라이나 포럼 주최 러시아 전쟁 1년 우크라이나 지지 집회 포스터

이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

크리스테르손 총리는 "러시아는 1년 동안 우크라이나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안데르손 사민당 대표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는 크고 또렷하고 분명해야 한다. 가해자들은 그들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빌스트룀 외무장관은 "유엔총회에서 140개국 이상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규탄했다"고 말했다.

현지 신문을 보면 대략 이 정도 발언을 한 것 같다.

세르겔 광장 옆 분수대 타워 조명이 러시아 침략전쟁 1년을 맞아 우크라이나 국기색으로 변해있다

크리스테르손 총리는 집회 참석 며칠 전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방문,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강조했다.

올해 2월 기준 스웨덴 정부의 군사지원 금액만 116억 크로나(약 1조3829억원)에 달한다.

군사지원 패키지에는 레오파드 전차, 대전차 로봇, 아처 포병 시스템 등 첨단 군사장비도 포함됐다.

방공체계 지원에 30억 크로나, 우크라이나 군인 훈련에 필요한 장교나 교관 파견, 우크라이나를 돕는 국제기금에 약 3억 크로나 등을 지원했다.

대충 눈에 띄는 것만 더해도 우리 돈으로 1조8천억원이 넘는다.

스웨덴의 지원 규모는 우크라이나의 물자 지원 상위 5개국에 속한다고 한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난 울프 크리스테르손 총리 (사진=Dagens Nyheter)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느낀 스웨덴은 핀란드와 함께 나토 가입을 신청했다. 핀란드는 지난 4월 나토에 가입했지만 스웨덴은 아직이다.

재미있는 건 러시아 전쟁 전만 해도 사민당이나 여타 스웨덴 정당은 나토 가입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거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이었다는 점이다.

스웨덴으로서는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이기길 바라는 동시에 그전에라도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안전망이 될 수 있는 나토에 가입해야 하는 처지다.

스웨덴은 1, 2차 세계대전에서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고 이후 전시는 물론 평시에도 중도를 지키고 어떤 군사동맹에도 참여하지 않는 중립주의를 표방해 왔다.

물론 나토와의 협력을 강화해 온 부분도 있지만 나토 가입에는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

그랬던 스웨덴이 생존을 위해 나토 가입에 목을 매고 있으며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와 산나 마린 전 핀란드 총리(오른쪽). 스웨덴과 핀란드는 동시에 나토 가입을 추진했다 (사진=Dagens Nyheter)

그런 면에서 본다면 총리 등이 군중 집회에 참여한 건 우리와는 다른 집회 문화 영향도 있겠지만 러시아 전쟁이 정말 스웨덴엔 절박한 안보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러, 한중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는 선뜻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을 하지 않고 있지만 스웨덴 총리, 정치인 등에겐 이번 전쟁에 국가의 명운이 달린 거 아니겠는가.

이번 전쟁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나토 가입도 스웨덴엔 사활이 걸린 문제다.

지난해 취임 3주 만에 터키를 방문한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와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악수 장면. 둘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사진=Dagens Nyheter)

스웨덴에 살아보니 러시아 전쟁 이후 난방비 부담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난 월세 옵션에 난방비가 포함돼 그걸 체감하지는 못했지만 한 달에 난방비로 월세 버금가는 돈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또 생활 물가도 지난해보다 많이 올랐다.

난방비나 물가가 올라 살기 팍팍해졌다고 모두가 전쟁이 빨리 끝나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이 모두를 답답하게 만드는 거 같다.

스웨덴에 있으니 러시아 전쟁의 무게가 더 느껴지는 듯하다.

전쟁은 누군가 이기거나 협상으로 실마리를 찾아야 끝날 듯싶은데 나토와 서방 세계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의 전투 의지는 드높고 실제 세계 2위 군사대국 러시아를 오히려 밀어붙이고 있다.

러시아 역시 쉽게 이길 거라는 자체 예상과 달리 고전하고 있지만 타협이나 협상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기엔 이미 먼 길을 왔다.

특히 푸틴은 어떻게 해서든 끝장을 볼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되고 러시아와 중국 등 추종세력과 우크라이나와 서방 세계의 신냉전 구도가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와 암울하다.


파랑, 노랑 국기 색깔부터 닮은 스웨덴과 우크라이나가 각각 나토 가입과 전쟁 승리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꼭 이루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스톡홀름 시청사 앞에 나란히 걸린 우크라이나 국기와 스웨덴 국기 (사진=스톡홀름시 홈페이지)

# Dagens Nyheter, regeringen.se 등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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