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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퇴사 후 느끼는 것들

by 산만언니

매해 연말이면 공장분들이 회사 전체에 '퇴직 인사' 메일을 보내는데, 회사 다닐 적에 나는 이분들의 글들을 유독 좋아했다. 서툴고 투박하지만 한자 한다 따박따박 적어 넣은 진실된 마음, 그 마음을 보는 게 나는 참으로 좋았다.


이분들의 메일엔 주로 이런 얘기들이 있었다. 자전거 뒷자리에 도시락을 묶고 첫 출근을 한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자전거에 딸아이를 태우고 다녔는데, 이제는 그 아이도 시집보내고 정든 이곳을 떠납니다. 첫 월급을 봉투에 받아 들던 날, 행여나 쓰리 당할까 무서워 버스도 타지 못하고 그 귀한 봉투를 품에 안고 한 겨울에 집까지 걸어갔습니다. 철없던 시절 마누라 잔소리를 뒤로하고 선 후배 동료들과 일이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몰려다니며 외상술을 마시고 다녔습니다. 같은 얘기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계전반'이니 '경리과'니 하는 말들, 나는 어쩐지 그 말들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이들의 글에는 공통적으로 하나같이 이런 말이 있었다. "혹여 그간 저 때문에 마음 상하신 일 있으시거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글쎄, 나 역시 제대로 준비하고 퇴사했다면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었을까? 한데 나는 좋은 마음으로 나온 처지도 아니었고, 경황이 없어서, 나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라고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3년 다닌 학교 졸업할 때도 서로 얼싸안고 우는 게 사람인데, 장장 20년의 세월을 한 회사에 다녔는데 어찌 이 일에 아무 감정이 없겠는가. 해서 돌아보니 나 역시 아쉬운 게 많았다. 특히 그땐 몰랐던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예컨대 이런 것들, 무슨 일이든 싸워서 이기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 윗사람에게 하듯 아랫사람에게 반이라도 했어야 한다는 것, 애정을 담지하지 못할 거였다면 그 일이 뭐가 됐든 말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 같은 후회들 말이다. 나 역시 이런 많은 일들이 가슴에 남는다.


그렇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는 거다. 나도 안다. 내가 평소에 잘했으면 이런 꼴 안 당했을 거라는 거, 적당히만 하고 살았다면 이 사단은 나지 않았을 거라는 것도. 물론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말이다.


퇴사 당일 자정을 기준으로, 회사 그룹웨어에서 내 계정은 사라졌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퇴사를 실감했다. 전에 한 번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 있다.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와 어느 날 분식집에 마주 앉아 돈가스를 먹는데 불현듯 '"오늘 우리 헤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로 그 날을 기준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바로 그 기분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마치 영화의 결정적 시퀀스처럼 장면이 전환되는 순간이었다고 해야 하나.


퇴사하는 날은 생각보다 바빴다. 정작 그만두자 마음먹으니 1분 1초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해서 종일 정신없이 모니터만 보고 업무 인수인계서를 썼다. 그러자 같은 팀의 A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왜 갑자기 그만두는 거냐고. 어디 따로 일 할 데는 구해놓고 그만 구는 거냐고, 그 말이 너무도 기가 막혔지만, 다행히 잘 참고 대답했다 " 갑자기 결정한 거 아닙니다. 일 년 동안 고민했습니다." 그가 다시 물었다. " 따로 할 일은 있어? " 그 말을 듣는데, 이번엔 진짜 어찌나 기가 막 히던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게 화가 나서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받는 척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그러다 생각해보니 이 사람은 나한테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거였다. 본인은 당연히 자신의 위치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고, 자신이 증명하지 못할 뿐 여전히 내가 그날 술을 마시고 만취 상태로 운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러는 거다. 그러니까 애초에 잘못한 건 너잖아, 그런데 왜? 하는 마음이라서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거다.


한데 나는 것도 모르고, 그런 그에게 제발 한 번만 내 얘기를 들어달라, 내 사정을 좀 헤아려 달라 애원했던 거다. 그러니 어찌 보면 서운 할 일도 아니다.


퇴사 얘기가 나오면 대개, 사측도 당사자도 서로 한 두 달 여유를 갖고, 업무 정리를 한다. 물론 중차대한 잘못을 저질러 해고를 당한 경우에는 인사 공고 직후 바로 책상이 빠진다. 하지만 나처럼 스스로 사표를 쓰고 나가면 얘기가 다르다. 이렇게 빨리 퇴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사직서를 내고 짐을 챙겨 나왔다. 사실 그간 이럴 때를 대비해 매일같이 하던 업무 목록도 따로 정리해 뒀고, 이메일도 수시로 비웠기에 그 과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해서 나는 그야말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처럼, 수업 중 아니 근무 중에 읽던 책을 집어던지고 회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거다.


평소에도 나는 약속을 안 했으면 안 했지, 한 번 약속을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지키려고 한다. 해서 여태 빈말로라도 '이놈의 회사, 때려치워야지' 하는 소리 해 본 적 없다. 내 기억으로는 지난 20년 동안 공식적으로 나는 2018년 7월 그리고 이듬해 봄에 걸쳐 각기 다른 팀장님과 상담한 게 전부다.


한데 말이다. 나한테 말끝마다 퇴사하겠다고 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 회사를 다닌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퇴사'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그냥 오늘 기분 나쁘다. 정도의 얘기였을까, 나는 모르겠다. 이런 빈말들을 대체 왜 하는지, 지키지 못할 말들을 왜 그렇게 하는지.


경험에 미루어 볼 때, 실제로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들은 이들처럼 입으로 매일 사직서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천년만년 이 회사가 없어질 때까지 다닐 것처럼 묵묵히 일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직서를 내고 사라졌다. 물론 나 역시 그랬고.


갑작스러운 나의 퇴사 소식에 무엇보다 오래 알고 지내온 동료들이 놀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버틸 것 같던 내가, 그 망신을 당하고도 기어이 다시 책상에 와 앉던 내가 이제 와 갑자기 나간다고 하니 다들 놀라서 어쩔 줄 몰라했다. 숫제 몇몇은 내 앞에서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그간 속사정을 알던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할 거 없이 나랑 눈만 마주치면 오나가나 눈시울을 붉혀 정작 퇴사하는 날에 나는 어디가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황급하게 회사를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팀장님께 지난 이십 년간 목에 걸고 다닌 네임택을 드리니 팀장님이 이걸 왜 자기한테 주냐고 물었고 나는 " 인사팀에서 친구한테 맡기고 가라는데 , 아시잖아요. 저 친구 없는 거" 했다. 그러자 팀장님이 웃으시면서 " 너는 그렇다 치고 나는 나중에 누구한테 주냐 " 하셨다. 우리는 잠깐 함께 웃었고, 그렇게 나는 회사를 나왔다.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이 다들 말했다.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영리하게 행동하라고, 일단 회사에 적을 둔 상태에서 다음에 할 일 찾고 나오라고. 글쎄, 모르겠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실제로 그러고 사는지도, 하나 불행히도 나는 아니다. 아마 그런 재주 있었으면, 애초에 이딴 식의 일도 안 만들었을 것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내게 앞으로 뭐해 먹고살지 물었다. 그 질문에 그때마다 나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 내게는 아무 계획이 없다. 왜냐면 정말 이렇게는 더 못살겠다 싶어, 자리를 박차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나마의 위안이라면 딴지일보에 가뭄에 콩 나듯 글 올리는 게 전부인데, 이건 사실 크게 위로가 안 된다. 아닌 말로 요즘 같은 세상에 난다 긴다 하는 전업 작가들도 나자빠지는 데 나 같은 듣보가 무슨 재주 있어서 글로 밥벌이를 할까.


이런 연유에서, 아마 나는 당분간 퇴직금과 실업 급여로 먹고살아야 할 것이다. 아마 이쯤 되면 다들 내 퇴직금이 궁금하실 거다. 20년이나 큰 회사에 다녔으니 그 금액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 생각할 거고, 한데 실망스럽게 얼마 안 된다. 별생각 없이 입사 십 년 차에 퇴직금을 괜히 한 번 당겨 쓴 데다, 공교롭게 마지막 해 고과가 C라서 연봉이 10프로 삭감돼 받은 퇴직금이 일 년치 연봉 정도밖에 안 된다. 한데 불행히도 이 돈 마저 그간 살면서 이래저래 진 빚잔치하고 나면, 정말이지 내 손엔 얼마 안 남는다.


그렇다면 다들 이렇게 물을 거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대책도 없이 그 좋은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던 거냐고.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사는 데 있어서 생존 공포보다 더한 게 어디 있겠느냐고, 그러니까 나는 말 그대로 그러다 죽고 싶지 않아 그만둔 거뿐이다. 정말이지 살고 싶어 그만둔 거다. 도저히 그렇게는 하루도 더 못살겠어서 그만둔 거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도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백수가 된 후 나는 많은 날 허공에 손을 뻗어 그간 내가 회사에서 사람들에게 주었던 마음들과 되돌려 받은 마음들을 세 보았다. 부끄럽게도 나눠 준 마음과 회수한 마음들 모두 열 손가락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연이어 내게 웃으며 인사하던 사람들이 돌아서서 던진 날 선 비수들이 생각났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일만 생각하면 가만히 있어도 등이 시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채권자인 배가 밥을 사준다며 나오라 했다. 어디가 웃으며 밥 먹을 기분 아니었지만 아직 채무금을 다 갚지 못한 처지라 마지못해 나갔다. 어두운 얼굴을 하고 고깃집에 먼저 가 앉아있으니, 그가 내게 말없이 노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별생각 없이 봉투를 열고 나는 너무 놀라 그날 고깃집 테이블에 엎드려 울었다. 진짜 엉엉 울었다.


세상에 그 봉투에는, 전 직장 선후배들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들어 있었는데, 그 밑에 짤막한 응원 멘트들이 쓰여 있었다. 또 서로서로 얼마씩 모아 만든 '자립 축하금'이라는 명목의 제법 큰돈도 함께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결국 또 사람인 것이었다. 내게 상처를 준 것도 사람이었는데,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이 "지긋지긋한" 사람들이었다. 그 사실이 기가 막혀 그날은 집에 와서도 소매자락으로 자꾸만 눈물을 훔쳤다.


차라리 싹 다 미우면 편할 텐데, 죽는 날까지 그냥 이 회사 사람들은 모두 미워하고 살면 속 편할 텐데, 이렇게 자꾸 어디선가 선의로 가득 찬 노란 봉투를 들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노릇을 어쩌라는 말이냐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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