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글쓰계 - 세 번째 주제 : 좋아하는 공간
문토 이룰 님의 모임 '다함께 글쓰계'의 세 번째 모임 주제, '좋아하는 공간'에 관한 글입니다. 더 많은 글들을 보고 싶으시다면 여기
광주에 살고 있었고 조선시대 시대극 과몰입러였던 난, 서울에 있는 궁궐들이 궁금했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그런 미지의 공간이랄까. 서울 나들이를 간다쳐도 팬클럽 관광버스에 실려 콘서트에 가기 바빴고, 친구들이랑 놀러 간다고 해도 예쁜 음식점과 카페가 더 귀했다. 서울로 대학을 온 후에도 궁에는 발길이 잘 닿지 않았다. 스무살의 눈앞에는 광란의 밤만이 가득할 뿐.
그러다 어느 날, 약속 시간이 붕떠서 약속 장소 옆에 있던 궁에 우연히 들어갔다. 그 순간 노이즈캔슬링이 되듯 도시의 모든 소음이 통째로 사라졌다. 온통 초록빛이 가득한 나무와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모래길을 자근자근 밟는 소리, 새가 나뭇가지를 박차고 날아가는 소리. 저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즐거운 소리. 마치 차원을 순간이동 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마법같은 순간을 맛본 이후로 계절에 두 번씩은 궁으로 향한다.
궁에서는 망상을 하는 걸 좋아한다. 학창시절에 좋아했던 만화 <궁>을 생각하며 '만약 지금이 입헌군주제고, 알고보니 내가 세자 저하의 숨겨진 약혼자라면?'하는 상상을 한다. <대장금>의 장금이는 음식을 대령할 때 어떤 길로 걸어다녔을까도 그려보고, 돌에 걸려 엎어지지는 않았을까 걱정도 해본다. 정조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정약용을 괴롭혔던 건 어디쯤이었으려나 하며 괜히 정전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어느새 궁궐은 복작복작해진다. 여기저기 관료들과 궁녀들, 내시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는 것만 같다.
옛날의 조선, 그리고 분위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금방 행복해진 나는 발걸음을 좀 더 옮겨본다. 청설모를 마주하는 행운이 오면 얼른 카메라에 담아보고 처음 보는 꽃이 있으면 '꽃 검색 카메라'로 이름을 알아내기도 한다. 그렇게 궁에 다녀오면 사진첩에 100장이 넘는 사진이 쌓인다. 궁에 있는 하나하나가 매번 새롭고 소중해 눈에 더 담고 싶은 마음이랄까.
언제나 가장 빨리 행복해 질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어지럽던 내 마음이 한순간에 평화로워지는 곳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서울에 있는 모든 궁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