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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an 13. 2022

그럼에도 사랑만이

Love│이도우, <사서함 11호의 우편물>


 이따금 전개가 어느 정도 예측되는 이야기. 이를테면 빤한 러브스토리에 기대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갈등을 거치겠지만 끝내 예쁜 결실을 맺으리란 기대를 손에 꼭 쥔 채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고 싶은 순간, 입으로는 ‘비슷한 이야기지 뭐’라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래서 다행이야’라고 되뇔 수 있는 이야길 읽고 싶은 순간이.


저마다의 사랑이 어느 정돈 바람대로 흘러가 주면 좋으련만, 도통 그래주질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를 접할 때처럼 나의 사랑도 조금은 예측할 수 있고 또 간혹 길을 잃더라도 곧 다시 찾으리라는 믿음을 품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겠지요. 이런 이유 때문일 것 같습니다. 사랑이야기가 시대불문 이토록 꾸준히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건.      


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읽었습니다. 작품 속 주인공 건과 진솔은 라디오 PD와 작가로 만나게 되는데요. 둘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에 전부를 걸 수 있을 것 같던 20대를 진즉에 넘겼다는 거죠. 마냥 설레기만 하기엔 그 대가가 너무 큰 감정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이란 때때로 부질없다 느껴지기까지 한 감정이었지요. 이제 제법 쓸쓸함에 익숙해진 것도 같고,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신경 써야 할 일들은 넘쳐났기에.      


이제는 사랑을 남 일처럼 여기는 것이 마음 편한 둘. 사랑에 몸을 던지기보단 그 기대와 감정을 저편에 던져버린 둘이 마주하게 된 겁니다. 소설은 이 둘의 만남을 전환점 삼아 서로를 향한 그들의 마음이 예열돼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요.


더는 바라지 않겠단 마음으로 간신히 포박해왔던 진솔과 건의 심장이 다시금 뛰기 시작합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그 온기는 책을 쥔 손으로도 전해져 돌연 손끝이 간질간질해집니다.   



 # 사랑은 참 묘하게도 사람을 변하게


 둘로썬 참 오랜만에 맞닥뜨린 감정이었을 텐데요. 사랑이 참 묘합니다. 사람을 변하게 만들어요. 진솔과 이건 모두를.      


가령 진솔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인데요. 평소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은 조금도 하지 못합니다. 공공장소에서의 자잘한 통제사항에도 매우 순응적이죠. 심지어 자신의 감정에도 규칙을 적용하는데, ‘연연하지 말자’란 다짐을 다이어리에 적어놓고 다닐 정도입니다. 아마 감정이 아이의 살결처럼 예민하기 때문이겠죠. 미묘한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그만큼 상처도 받기 쉬운 사람. 그래서 감정에 치우치는 것이 늘 겁나는 사람. 그런데 어찌 사랑엔 연연할 수밖에 없었는지, 불현듯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 찾아오고 맙니다. 누군가에게 먼저 진심을 표현하는 일이라니. 그것도 좋아한단 마음을 전하는 일이라니. 진솔로썬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요... 할 말 있어요, 나... 당신을 사랑해요.”      

아쉽게도 건의 반응은 진솔의 마음과 달랐지만요.

“지나가는 바람일지도 몰라요. … 솔직히 난... 사랑이 뭔지 이제 잘 모르겠어. 내 마음 들여다보는 일이 이젠 익숙하지가 않아요.”      


사랑에 대한 기대가 메마른 사람. 사랑에 쏟을 에너지를 애저녁에 소진해버린 거겠죠. 일전에 너무 아픈 사랑을 했던 탓에. 동시에 미처 헤어나지 못한 탓에. 그래서 건은 진솔을 꽤나 오래 기다리게 합니다. 진솔을 꽤나 아프게 해요. 그랬던 그가 느지막이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진솔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음을. 자신이 누구 못지않게 사랑을 바라왔음을. 기대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내 외면해왔던 것임을.      


“나,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고... 내가 한 여자의 쓸쓸함을 모조리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아. 내가 옆에 있어도 당신은 외로울 수 있고, 우울할 수도 있을 거예요. 사는 데 사랑이 전부는 아닐 테니까. 그런데... 그날 빈소에서, 나 나쁜 놈이었어요. 내내 당신만 생각났어. 할아버지 앞에서 공진솔 보고 싶단 생각만 했어요. 뛰쳐나와서 당신 보러 가고 싶었는데... 정신 차려라, 꾹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


건이 느꼈을 이때의 감정이란 혼란이었을까요, 깨달음이었을까요, 아니면 안심이었을까요. 꽤 복합적인 감정이었을 테지만, 어찌됐건 그 순간 사랑에 기댈 수 있게 됐으니 건에게도 진솔에게도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해갈 거예요. 어느 순간엔 사랑이 전부가 아님을 체념하기도 하겠죠. 그래야만 상처를 덜 받을 테니까. 그렇지만 분명 사랑이 전부가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랑 말곤 모든 게 부질없게 되는 순간. 그때는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이어야만 하죠.      


“아직 안 갔네요.”

“발이 안 떨어져서.”

“당신은, 왜 나왔어요.”

“...붙잡으려고요.”     


우리는 사랑 앞에 좀 더 솔직해져도 좋지 않을까요. 진솔했기에 사랑을 얻게 된 진솔처럼.     



# 그럴 수밖에 없는. 어찌할 수가 없는.


누구나 사랑에 대한 기대를 한 편으로 접어두게 되는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그 꾸깃해져 버린 기대가 다시금 피어나게 하는 이야기인 것 같고요. 물론 한 이야기를 통해 치유 받는다 하더라도 역시나 사랑은 늘 어려울 따름이겠죠. 하지만 갸륵하게도 사랑을 구하는 일은 우리가 결코 져버릴 수 없는 본성일 겁니다. 과연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삶에 기대를 걸 수 있을까요? 삶에 기댈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한 대사처럼.     


난 항상 독립적인 여자(주체)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 내 인생을 남자(타인)한테 맡기고 싶진 않아.그런 걸 경멸해 왔지만, 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내게 중요해. 우리의 모든 행동은 결국 더 사랑받기 위함이 아닐까?
- 영화, <비포 선라이즈>  


마음이 다치면 마음이 닫히는 순리에 따라 동굴에 숨어버리고 마는 시기가 닥칠 수 있겠지만요.

그럼에도 홀로 보낼 시간이 필요해란 자각은, 반드시 그럼에도 사랑은 필요해란 소망으로 귀결될 겁니다.


우리는 간혹 아프지 않기 위해 사랑을 피하다가도 곧 아프지 않기 위해 사랑을 찾게 될 거예요.

우리는 결국, 사랑 안에서만 위로받을 수 있으니까.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우리가 이대로 완전해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건 사랑뿐이니까. 그러니 끝내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순간 불현듯 사랑이 찾아왔을 때 말예요.     


더불어 소설에서 건이 ‘당신의 사랑도 무사했으면’이라 썼던 글처럼 ‘모두의 사랑이 무사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타인의 사랑을 빌어주고 그도 타인의 사랑을 빌어주고 이 마음들이 연쇄작용 된다면,

모두의 사랑이 무사할 날을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요.     


다시 한 번 바랍니다. 당신의 사랑이 무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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