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 Feb 10. 2022

부르짖지 않고 끌어들인다는 기적



 희망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날들이었습니다. 내면이 황량해진 탓이었을까요. 마음에 손을 갖다 대면 슬픔, 두려움, 불안, 무기력 같은 앙상한 단어들만 혹처럼 매만져지는 날들이었습니다. 도무지 내일에 기대를 걸 수 없을 것 같던 밤.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 기대었던 날이었어요. 영화를 보기 전엔 몰랐습니다. 이 영화를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들게 될 줄은.

 


# 브렌다 



영화의 무대는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Bagdad 카페입니다. (Bagdad는 지명이 아닙니다.) 카페 운영자 브렌다는 카페와 더불어 주요소와 모텔까지 함께 꾸려가고 있음에도 삶이 막막할 뿐인데요. 너무도 황량하고 기척이 드문 이곳에 손님이라곤 어쩌다 경유해가는 화물차 몇 대가 전부이기 때문이죠. 바그다드의 텅 빈 공간을 채우는 건 무기력뿐이었습니다. 무언가 이 상황을 좀 구원해 줬으면 하지만, 그럴 기미가 통 보이지 않기에 지치기만 한 날들이었죠.     


더군다나 책임져야 할 식구는 넷이나 되는데 자녀들은 브렌다의 걱정에 공감하기엔 지나치게 천진난만하고, 남편마저 책임감은커녕 태연하기 그지없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으로 브렌다의 속은 늘 용암처럼 끓는데요. 언제나 짜증이 오른 상태로 가족들을 다그치고, 때로는 그 화가 종업원이나 손님을 향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남편과 말을 다투다 홧김에 그를 내쫓기까지 한 날이었습니다. 신세의 한탄함에 눈물까지 나오는 상황, 여행객 차림의 야스민과 처음 마주한 날이기도 했죠. 그저 투숙객으로 온 손님이라지만 자존심 강한 브렌다로썬 달갑잖은 첫 만남이었지요.     


게다가 브렌다는 야스민이 수상쩍기만 합니다. 이런 사막 한가운데 이방인이 홀로 투숙을 하려 한다는 것이. 거기에 짐이라곤 온통 남자 옷이라는 것도. 그렇기에 브렌다는 야스민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는데요. 어느 날은 자신이 시내로 장을 보러 간 사이, 엉망진창이던 사무실을 야스민이 말끔히 청소를 해놓은 겁니다!     

첫 만남에 약한 모습을 들킨 것도 자존심 상한데, 자신의 너저분한 사무실을 속속들이 헤집어놓기까지 했다니. 브렌다는 그간 돌보지 못해서 너저분해진 내면을 들킨 듯한 수치심과 불쾌감에 또 한 번 폭발하고야 말죠.     


“대체 왜 그런 거예요!”

“이렇게 하면 (당신이) 행복해질 줄 알았어요.”



# 야스민


 

브렌다는 야스민의 대답이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과연 타인의 행복을 바라줄 만큼 야스민의 마음은 여유 있던 걸까요? 사실 알고 보면 야스민도 얄궂은 상황에 처해있긴 마찬가지였는데요. 그녀는 여행 중 남편과 다투다 결국 차에서 쫓겨지고 마는데, 이 굴욕적인 대우를 더는 감당하기 싫었습니다. 매번 같은 상황의 반복에 실물이 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남편이 자신을 다시 태우러 오는 순간, 몸을 숨겨버리죠. 그렇게 야스민은 낯선 나라의 넓은 사막에 홀연히 남게 됩니다. 머물 곳도 향할 곳도 없이 말예요. 사실 상황으로만 본다면 브렌다보다 훨씬 덕 막막했지요.    

 

다만, 그녀는 열악한 처지에 굴하지 않습니다. 대신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기로 하죠. 이 낯선 땅에서 용케 숙소를 찾아냄을 시작으로. 그리고 급박한 상황 중에도 사수했던 짐 가방이 남편의 짐이었음을 알아챈 후 큰 한숨을 내쉬긴 하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더 이상의 한탄은 없었죠. 게다가 숙소의 청소 상태도 엉망인데요. 투숙객의 자격으로 화를 내는 대신, 기꺼이 직접 청소를 시작합니다. 방의 먼지를 털어내면서 근심도 털어버린 듯. 어느새 춤까지 춰가며 흥겹게 말예요. 이렇게 그녀는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 바그다드에 적응해갑니다. 야스민은 자신의 처연함을 수렴하되 무너져 내리지 않아요. 무기력한 채로 무언가 자신을 구원해 주길 기다리고만 있지 않죠.     


어느 날 브렌다의 사무실을 청소해 주려 했던 건 브렌다의 처지에 공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카페 점원으로부터 브렌다가 남편과 불화가 있음을 전해 듣고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던 거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청소를 활용해서요. 다행히 깔끔해진 사무실을 좋게 봐주는 투숙객들의 반응 덕에 브렌다의 불쾌감도 곧 수그러듭니다.

     


# 마술



 한편, 야스민은 남편의 짐 꾸러미에 딸려온 마술도구에 주목하기도 하는데요.  그녀는 마술을 활용해 바그다드 카페의 손님들을 기쁘게 해줍니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이곳에, 마술은 엄청난 이벤트였던 걸까요. 이 소식이 입소문을 타고 일파만파 전해집니다. 어느덧 카페는 야스민의 마술을 보기 위한 손님들로 북적이기 시작해요. 적막으로 꽉 찼던 사막은 이제 웃음소리로 가득 찹니다.

 연대와 웃음이 있는 공간엔 행복이 들어차나 봅니다. 늘 무기력하기만 했던 바그다드 카페 안에선 아무도 모르는 사이, 활력이 자라납니다.     


 마땅히 기적이라 할 만한 변화였어요. 이 모든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실 그녀가 일으킨 반향에 비해 그녀가 행한 일들은 그리 엄청난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지금 할 수 있는 것, 그 순간 허락된 것을 활용할 뿐이었죠. 대단한 거라면 단연 그녀의 노력이지 않을까요. 타인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움직이는 노력말예요. 가령, 마술은 원래 본인의 장기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의 짐에 우연히 딸려온 마술도구에 관심을 갖고 기꺼이 연습을 시작했던 거죠. 

 역시 중요한 건 마음인가 봅니다. 그녀의 선함은 주변을 훤히 밝혀주죠. 야스민은 바그다드에게 이전에 없던 희망이 돼주었어요.



# 이타심


 

 이타심이라 하면 왜인지 희생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희생이라 하면 어쩐지 손해란 단어와 연관되는 느낌이고요. 그런데 야스민을 보고 있자면 그녀의 선함은 결국 자신을 향합니다. 밖으로 손을 뻗음으로써 그 누구보다 스스로 충만함을 느끼죠. 타인을 기쁘게 해줌으로써 본인의 기쁨을 찾고, 주변을 평온케 만들어줌으로써 본인의 평온을 만들어냅니다. 브렌다의 상실감을 치유해 주며 자신의 상실감 또한 치유해가죠.  

   

스스로 기적을 잉태함에 대한 행복감은 대체 어떻게 측정해야 할까요. 

스스로 빚어낸 희망이라니 그 가치를 어떻게 매겨야 할까요.     


그녀로부터 귀중한 사실들을 배웠습니다. 행복이나 희망은 부르짖기보단 불러들이는 것임을. 넋 놓고 기다리는 것도 목적지로 정해놓고 악착같이 쫓는 것도 아니란 것을. 다만 오늘에 집중함으로써 지금 마땅히 할 수 있는 걸 해내는 것임을. 그러는 동안 마음 속 부정들이 잦아들 것임을. 또한 무언가 선택해야 한다면 선함을 택해야 함을. 그러는 동안 행복이란 이미 곁에 와 있을 거란 것도.     


‘쫓지 않고 끌어들인다.’ 이런 게 진짜 마법이고 기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없는 거라 속단하지 않는다면, 희망이란 어디라도 들어차나 봅니다. 마른 사막에서도 꽃이 피는 것을 보았거든요.     


간혹 머물게 될 것 같습니다. 이 바그다드 카페에. 그녀가 부린 마법이 자주 생각날 것만 같아서요.                                                                                                                                                                                                                                                                 



◐ 연재 시리즈:  <작품에 기대어 내일을 기대해> 중



- 출처 -


º이번에 기댔던 작품│퍼시 애들론,  「바그다드 카페」, 1993



이전 10화 열심보다 진심으로 (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