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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모 Jul 05. 2020

와인 마시고 치즈 먹는 여행

파리 식도락기 2편


 파리에서 항상 중식이나 쌀국수를 먹던 것은 아니다. 끼니로는 아니더라도 치즈와 와인을 즐겨먹었다. 걸어서 삼십 분 남짓 걸리는 센강까지 작은 와인과 빵, 치즈를 무겁게 이고 걷곤 했다. 풍경이 멋있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우연히 자리를 잡을 땐 꼭 술이 생각난다. 그럴 때면 맥주보단 와인을 운반하는 편이 낫다. 탄산이 터지거나 시원한 맛이 가실까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와인. 고급의 술이란 생각이 있었다. 물론 아주 질 좋은 와인에겐 ‘고급’이란 말이 어울리겠지만, 파리에서만큼은 질을 가리지 않고 친숙하게 지낸 사이였다. 소주 한병의 가격으로 가게에서 제일 싸다는 와인을 사서 마셨다. 소주처럼 혼자 마시기 처량하지도 않으면서  분위기 잡기에는 이만한 술이 없었다. 쌉싸름한 과일의 향은 주스처럼 달지 않았지만 아주 독하지도 않았다. 입 안에 느껴지는 맛보다도 코 끝에 감도는 향이 매력적인 술이었다. 유리병을 잡았을 때의 묵직한 느낌, 레드와인의 진하고 검붉은 버건디색까지. 값싼 와인을 마셔도 ‘와인’ 자체가 주는 낭만의 느낌은 어마어마했다.


 낮에 본 바스티유 광장 쪽의 작은 강변이 마음에 들어 에펠탑 야경을 제쳐두고 그곳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사천 원짜리 와인을 사서 가방에 넣고 걸었다. 바람 때문에 일렁이는 강줄기 무늬에 비친 요트 불빛이 무척 근사했다. 배 위로 뿌옇게 오른 연기들 사이로 고구마 굽는 익숙한 냄새도 났다. 버드나무가 늘어진 강 바로 앞자리가 좋아 주저앉았다. 돌바닥은 딱딱하고 축축했지만 눈 앞에서 헤엄치는 오리 부부 한쌍, 조용하게 반짝이는 강을 보니 하염없이 시간을 흐르게 두는 것도 좋았다.

 챙겨 온 와인 병뚜껑을 열고 한 모금을 마셨다. 끝 맛의 쌉쌀함이 가시기 전에 안주를 먹기로 한다. 집 앞의 디저트 가게에서 산 치즈 타르트를 꺼내 베어 물었다. 포슬포슬한 식감에 씹을수록 부드럽고 눅진했다. 네 개에 1유로 정도한 초코 푸딩과 듀플렉스 역 가는 길에 산 무화과도 함께 먹었다. 적당히 달고, 상큼해 약간 느끼한 치즈 타르트와 잘 어울렸다.


 퐁피두 미술관에 전시를 보러 간 날이다. 여느 때처럼 와인을 가방 안에 넣고 있다가 출입 금지를 당했다. 와인을 꺼낼 생각은 않고 미술관은 다음에 오자며 와인 편을 들었다. 노트르담 성당 쪽으로 열차를 타고 와인을 마실 장소를 찾았다.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는 성당의 모습도, 여섯 시 정시를 알리듯 반짝거리는 에펠탑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루브르 박물관까지 걸어가며 보았던 야경만큼이나 잊지 못할 장면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턱이 없어 조금만 발을 뻗으면 강물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날의 술은 역시 와인, 안주는 각종 치즈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월레스와 그로밋>의 달치즈, <톰과 제리>의 구멍이 뽕뽕 난 치즈를 보며 세상의 치즈가 가진 맛들을 상상 했다. 티브이에 나오는 음식 중 상상력을 가장 자극시키던 게 바로 이 ‘치즈’였다. 내가 원하는 맛을 지어내고, 그 맛으로 입안을 가득 채우는 상상을 했다. 치즈는 분명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처럼 부드럽고 달콤했으며, 향긋한 버터향이 났다. 상상 속 치즈는 차라리 치즈케이크의 맛에 가까웠다. 파리에서 ‘진짜’ 치즈들을 맛보며 내 상상에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프랑스의 특산품인 까망베르는 둥그런 나무통 안에 들어있었다. 빨간 체크무늬 천이 삐죽 튀어나와 예뻐 보여 샀다가 나중에야 그게 ‘까망베르’인 줄 알았다. 쪼글쪼글한 껍질은 하얀 솜털이 붙은 것처럼 보송한 느낌이고 식감은 쫄깃하다. 숙성 기간에 따라 표면에 하얀 곰팡이가 생기고 줄어들기를 반복하며 만들어진 표면이다. 반대로 속은 크림과 비슷하게 꾸덕하고 말캉하다. 포크나 나이프도 없이 손가락 하나로 끈덕지게 치즈를 파먹었다. 치즈맛도, 와인 맛도 잘 몰랐지만 짭짤하고 향이 강한 치즈를 먹은 후 마시는 와인이 꿀처럼 달콤하다는 건 알았다.


 짠맛이 강하고 바슬바슬 단단한 식감의 에멘탈 치즈, 개미 눈곱만큼 맛봐도 시큼하고 꼬릿 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블루치즈도 맛봤다. 모두 상상에서와는 아주 다른 맛이었지만 그 낯선 맛들이 다른 치즈에 대한 호기심을 부르곤 했다. 그중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부라타 치즈’였다. 딱딱하고 누런 치즈들 사이에서 익숙한 질감과 색의 치즈가 눈에 띄어 샀던 게 처음이었다. 정체불명의 액체에 잠겨, 언뜻 모짜렐라 치즈처럼 보여서 그래도 개중에는 친숙해 보였다. 부라타 치즈는 모짜렐라와 생크림의 조합이다. 얇고 말랑한 모짜렐라 안에 생크림을 가득 채워 넣은 후 끝을 묶어 만든다. ‘버터를 바른’이라는 뜻을 가진 만큼 크림처럼 부드럽게 퍼지는 맛이다. 깨끗한 우유의 풍미에 중독돼 입국할 때 까지도 네 개입 부라타 치즈를 자주 사 먹었다.


 치즈와 바삭한 페스츄리 빵, 달달한 에끌레어, 그리고 말린 과일을 준비하면 와인 한 병을 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내 파리 여행은 이런 식이 었다. 어제 갔던 미술관을 오늘 또 가고, 멋진 풍경을 보며 값싼 와인에 새로운 치즈가 함께하는 하루. 아직도 와인의 맛을 잘 모른다. 먹어보지 못한 치즈가 더 많고, 파리에서 가지 않은 명소가 한참 남았다. 내게 삼 주간의 파리 여행은 그래서 짧았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싼 와인과 좋아하는 맛의 치즈를 먹으며 하루를 보낼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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