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식도락기 1편
.. 새로운 공간에 가는 건 일상에 크고 작은 자극을 가져다준다. 이번엔 ‘나라’로 가는 스케일이니, 앞으로 내 일상은 종잡을 수 없는 자극이 되겠다. 살아도 좋고, 관광도 좋아. 하고 싶은 대로!
- 2018년 여행일기 중
여행의 첫 목적지는 파리였다. 영화 <라따뚜이>의 주인공 ‘레미’는 우연히 본 지상의 풍경을 보며 ‘Paris? All this time, I’ve been underneath Paris?’라고 말한다. 감격에 젖은 생쥐의 촉촉한 눈망울, 에펠탑 중심의 도시 전경과 웅장한 음악. 좋아하는 만큼 여러 번 본 영화라, 과제나 일을 할 때 생각 없이 틀어놓기도 하지만 파리의 풍경이 펼쳐지는 장면에서만큼은 레미에 빙의해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도시의 존재를 아는 이상 가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레미와는 다르게 의도된 여행이었지만 파리에서만큼은 무심코 마주친 도시인 것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11월의 파리는 추웠지만 커다란 배낭을 메고 열심히 걸은 탓에 외투를 꺼내 입지 않아도 됐다. ‘가르 드 누아’ 역을 가기 위해 여러 번 묻고 그만한 도움을 받았다.
‘파리 사람들 친절하구나. 그래도 북역은 무섭다던데..’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마음을 졸이다가 계단 위에서 처음 마주한 파리의 모습에 순식간에 영화 속 레미가 되었다. 시원한 밤공기와 조금은 떠들썩한 분위기가 도시의 첫인상이었다. 16인실 호스텔에 짐을 풀고 붕 뜬 마음으로 거리로 나왔다.
숙소 주변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은 호기심보단 경계에 가까웠다. 낯선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길래, 숨다시피 달려 숙소로 돌아와 눈물을 찔끔 흘렸다. 괜히 억울한 기분이었다. 고대하던 파리의 첫날인데 말이다. 다시 나가 근처 가게에서 맥주와 아이스티 한 병을 사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바로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빵을 먹자’였다. 빵보단 밥을 좋아하지만 프랑스에 왔으니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거리를 걷다가 작은 카페에 들어가 빵을 골랐다. ‘Nouveu’라는 이름의 길쭉한 빵이었다. 자그마한 파운드케이크처럼 생겨서는 떡처럼 촉촉하고 쫄깃했다. 위에는 큰 알갱이의 설탕이 뿌려져 있고, 말린 무화과가 간간히 들어있어 심심하지 않았다. 식감이며 맛이며 약과가 생각나기도 했다. 기분을 내보겠다고 추운 테라스 자리에 앉아 생전 마셔본 적 없는 에스프레소도 시켜 마셨다. 또 다른 빵집에서는 커스터드 크림이 꽉 찬 에끌레어를 먹어보기도 하고, 턱이 아플 만큼 오래 씹어야 하는 딱딱한 바게트를 사서 뛸르히 공원의 새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명소보다는 사람 사는 공간을 구경하고 가보는 게 더 좋았다. 특히 식료품점이 가장 재미있었다. 치즈가게를 들어가면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얇게 저민 햄과 치즈를 주셨다. 그걸 받아먹으면서 버드나무가 늘어진 센강을 따라 걸었다.
숙소는 강변에서 멀었지만 항상 강을 보러 갔다. 넓적한 빵 안에 토마토, 양배추, 가지 등의 각종 야채와 팔라펠, 할라피뇨 그리고 토마토소스가 들어간 중동식 샌드위치를 즐겨먹었다. 햇살이 잘 비치는 강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푸짐한 양의 빵을 포크로도 퍼먹고 한 입 크게 베어 먹기도 했다. 잘게 썰린 야채와 바스러지는 팔라펠이 빵 위로 자꾸만 튀어나오고, 소스는 줄줄 흘러 깨끗하게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그래도 소란스러운 야외에서 꾸밈없이 마구 먹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파리는 아무 데나 걸터앉아 허겁지겁 먹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아 편안한 도시였다.
이곳에 머무르면서는 타국의 음식을 더 자주 먹었다. 당시에 내게 ‘프랑스 음식’은, 왠지 고급 레스토랑에서 차려입고 먹어야 하는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그랬다. 그래서 비교적으로 값이 싸고 푸짐한 중식을 즐겨먹었다. 동네에는 작은 크기의 중국 식당이 많았다. 통 유리로 막혀있는 음식 진열대에서 튀김이나 조림 요리를 골라먹고 가끔 양이 많아 보이는 면 요리를 주문했다. 당면이 든 만두튀김은 보통 차가웠지만 바삭해 한 두 개를 먹곤 했다. 피망, 땅콩과 짭조름한 고기 조합이 좋은 새빨간 깐풍기를 가장 많이 먹었다. 주인아저씨는 늘 ‘이거? 이거?’하고 음식을 가리켰는데, 그게 중국어로도 ‘이거?’라는 뜻인 줄은 한국에 돌아와서야 알았다. 칠리새우 같은 생김새에 맵기만 한 새우볶음과 짜기만 한 고기볶음, 심심한 볶음밥도 먹었다.
보통은 전시를 보고 밥을 먹는 게 하루 일과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 나로서는 예술작품이 넘쳐나는 파리에 있는 매일이 꿈같았다. 특히 좋아하는 작품들이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은 국제학생증이 있으면 무료로 입장이 가능했다. 학교에 출석이라도 하듯 매일같이 작품을 보러 가던 기억이 난다.
파리의 날은 거의 매일 흐렸다. 적당히 선선하고 쌀쌀한 날씨가 뜨끈한 국물을 생각나게 했다. 어느 날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센 강 위 다리를 건너러 가며 조금 전 보았던 반 고흐의 작품과 같은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오렌지 색 불빛 사이를 오래도록 걸었다.
파리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의 공기와 색이 주는 분위기, 내가 그런 것들로 울 수도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센치해진 기분에 따뜻하고 구수한 육수의 국물요리가 먹고 싶었다.
루브르 박물관까지 감성에 젖어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쌀국수 가게를 갔다. 파리에서 쌀국수라니, 한국에서도 잘 먹지 않는 음식이지만 왠지 국물 한 모금에 몸이 노곤해지는 상상을 하니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양지머리고기와 완자가 듬뿍 들어있는 쌀국수를 주문했다. 국물은 레몬 반개를 쭉 짜넣어 산미 가득하게 만들어 들이켰다. 면을 제외한 숙주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숙소로 돌아가서는 찬 밤공기와 함께 전 날에 산 ‘La Chouffe’라는 밀맥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