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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슨니 Jun 10. 2021

어쩌다, ‘관계적 완벽주의자’

엄마 아빠, 나는 왜 힘들다는 말을 못 할까요.

이 주 전쯤이었나. 약속 상대와 시시콜콜한 이야길 주고받다, 상대는 내게 ‘관계적으로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 같다고 말했다. 평소 ‘완벽주의자냐’는 말에는 일부 동의하며 살았지만,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 본 탓에 당시에는 의아해했다. 하지만 듣고 보니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 며칠을 곱씹었다. 이후 소수의 지인들에게 ‘내가 그런 사람인 것 같다’며 내가 소화한 말을 뱉어냈다. 그마저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나를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뱉어낼 수 있는 일종의 고백 같은 거였는데, 오늘 엄마와의 통화 중에 또 한 번 입 밖으로 꺼내게 됐다.


사실 요 근래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특정한 일이 힘들어서 지친 건 아니었는데, 작년에 비해 성취감을 얻을 만한 일거리도 없어진 탓인지, 요즘 들어 공허하고 기운이 잘 나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살아 지쳤던 작년 한 해를 돌아보며 이런저런 후회가 가끔씩 든다고 털어놓았다. 근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 더 힘들다고. 어지간하면 나도 후회를 잘하지 않는 편인데, 중요한 걸 놓쳤던 지난날이 후회되기도 한다고.


나는 힘든 것을 타인에게 잘 말하지 않는(실은 못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말없이 혼자서 앓는 편이지만, 이는 어렸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뼈에 새겨진 관성 같은 것이었다. ‘힘듬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을 듣곤 순수하게 내 힘듬을 고백했을 때, 주변인들의 반응은 싱겁다 못해 차가운 날도 있었다. 내가 힘들다는 사실조차 누군가에겐 부담으로, 공감은 해주지만 진심은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으로 내게 다시 돌아왔고, 그 시간들은 나를 어려움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남들 눈엔 온도가 적절한 중탕 같아 보였겠지만, 한편으론 곪아가는 중이었던  같다. 타인에게로부터 영향받지 않고 나를 보살피려 했던 일종의 ‘살아남기 위한 방법 모색하게  것일지도. 그리고 나는 내가 느낀 애매하거나 차갑던 공기를 타인에게 전해주지 않기 위해, 내게 자신의 어려움을 터놓는 이들에게 나름의 진심을 담아  시간을 채워주려 노력했다. 내가 주변이들에게 품었던 기대가, 충족되지 아 생긴 절망이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타인을 향한 존중과 배려로 둔갑된 이때가, 내가 ‘관계적 완벽주의자’로 거듭나게 된 배경이자 동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런 나는 이제 부모님에게만 나의 어려움을 전한다. 재지 않고 나의 마음을 헤아려줄 사람은 나를 세상으로 소환한 부모님 밖에 없다고 느껴버리는 오늘날. 실은 그마저도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만, 엄마나 아빠에게 힘든 상황을 얘기하다 보면 그렁그렁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을 인정하는 일이었고, 몇 번을 부정하고 부정하다 마주한 실체였을 테니 그럴만도 하다.


언제부터 나는 힘들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했을까. 공감의 부재였을까, 진심의 부재였을까. 내면에 차오르는 단어와 감정들에 예민한 내게 세상은 얼음장과도 같았다. 눈치가 정말 빠른 사람은 눈치 없는 척을 한다던데, 눈칫밥을 많이 먹은 나는 어딜 가든 눈치를 보는 사람이었던 탓이었을까. 사랑받을 만한 행동이 뭘지 알았고, 누군가를 굳이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모른 체하며 하루들을 견뎠다. 내가 모르는 척하면 없는 일이 되는 세상이니까. 그냥 그게 괜찮다고 여겨왔는데, 이젠 내가 괜찮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삶만 힘든 게 아니니 싫은 투정 부리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싫은 투정하지 않는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었지만, 책임감이 무뎌짐의 동의어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힘들다는 사실을 툭툭- 쉬이 내뱉을 수 있는 사회라면 좋으련만 삶의 무게는 무겁기만 해서, 책임질수록 책임을 덜어낼 곳은 줄기만 한다. 엄마 아빠, 나는 왜 힘들다는 말을 못 할까요. 어쩌다 나는 이런 어른이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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