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잘 사는 사람이 있을진 몰라도, 혼자 자라는 사람은 없다.
사회복지 실천 관점 중에는 ‘환경 속의 인간’이라는 관점이 있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관점인데, 나는 전공 수업을 들으며 이 관점을 배웠을 때만큼 쾌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맞지, 한 사람은 다양한 사람의 영향력으로 이뤄지는 존재라고도 표명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정의 내려지는 것이 단숨에 가능할 만큼, 단번에 내 마음을 헤집고 들어왔다.
이 관점을 알게 된 이후, 어려움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모두 인간관계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세상을 혼자만 사는 사람은, 굳이 굳이 어려움을 마주하지 않아도 될 거다. 왜냐고? 혼자만 잘 살면 되니까 양보도, 배려도 필요 없을 거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성찰을 통해 변화를 이뤄내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혼자 도태되는 운명을 맞이하지만 도태를 모르는 척 사는 수밖에 없다. 혼자서만 ‘잘 살 고 있다’는 착각 속에 허우적대며 ‘인간다움’이란 단어에는 털 끝도 닿지 못하는 수밖엔, 없다.
그리 긴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다양한 일을 마주하며 살았다고 자부한다. 연애 같은 것도 해봤고, 집단 따돌림도 당해봤고,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도 해봤고, 집단의 리더라는 책임도 져봤다. 돈도 벌어봤고... 짧거나 긴 순간들 속에 슬픔이나 어려움 등의 부정적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그 근원은 사건에 있었고, 사건에는 늘 ‘인간’의 존재가 있었다. 인간의 부재 속 어려움을 느낀 적은 아마 인생에 한 순간도 없을 거다. 혼자 울고 불고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혼자만이 세상의 전부면 울 일도 울 이유도 없었을 테잖나.
그렇게 울고 불고 하는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때마다 나를 성숙시키는 기저들이 열심히도 재기능을 해줬다. 인간은 쓴 맛을 봐야 변하는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동기에는 아마 나의 ‘경험담’이 백 할을 차지할 거다. 사람들과 상호작용하고 관계 맺으며 자연스레 수용한 영향들이 나를 구성하도록 허락했고, 허락을 통해 나라는 개인과 신념이 탄생했으니, 주변인들이 나를 만들어 준 셈이다. 그래서 끼리끼리라는 말이나, 주변에 어느 사람을 두느냐가 중요하다는 말들을 쉬이, 익히 하는 걸까 싶다.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영향을 행사할 특권 같은 걸 내어주는 거나 다름없는 거니까. “이렇게 생각하니, 인간관계라는 거, 되게 멋지고 대단한 거잖아!?”
잘 사는 것과, 자라는 사람. 두 사람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잘 사는 것’에 대한 정의는 다르겠지만, 두 사람에게 큰 차이를 두기 위해, 자라는 사람에 비해 잘 사는 사람은 반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려 보고 싶다. 그렇다면 ‘자란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생물이 생장하거나 성숙하여지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데, 나는 인간에게 있어 생장과 성숙은 결국 ‘관계 맺음’에 달렸다고 본다.
나는 혼자 살아내는 인생은 불가능하다고 얘기하고 싶다. 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은 착각에 불과하다. 사실 인간이란 게, 혼자 잘살아내는 걸 목표 삼는 순간부터 도태되기 시작한 거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감안하면, 자살행위에 가깝다. 인간이길 포기했다고 감히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고. 그런 의미에서 난 ‘잘’은 못해내더라도 부단히 자라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주변인들이 찔러주는 것들에 반응하고 되새김질하며 자라 갔으면 좋겠다. 애초에 잘 사려고 태어난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열심히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도태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주변도 잘 둘러보고, 계속해서 자라나는 사람으로. 그렇게 살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