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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자 Oct 13. 2022

예측 넘어 결국은 선택

결혼 방학 #13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 빅토르 프랭클


오늘의 스타벅스는 매우 붐빈다. 아마도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설악 문화제의 영향인 듯하다. 나는 커피를 한잔  주문하고 문 앞의 2인석 테이블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무엇을 쓸까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덩치 큰 남자가 내 테이블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나는 내가 선점한 테이블에 내게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앉은 그가 의아했다. 의도적으로 무례한 것인가? 아니면 나랑 개념이 다른 것인가? 여기는 오픈된 공간이니 그가 나를 위협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왠지 경계가 침범당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를 살핀다. 그는 보통 남성들도 만만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덩치가 크고 손등에 산타클로스 스티커 문신을 했고, 머리에 비듬이 잔뜩 있다. 건달 같기도 했고, 그냥 이상한 사람 같기도 했다. 나는 내 감정이 불편과 불쾌, 호기심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내 쪽은 쳐다보지 않고 전화를 건다. 그의 말투가 이상하다. 혀 짧은 소리, 분명하지 않은 어투, 아이 수준의 문장 구조. 나는 그가 내 테이블(?)에 앉은데 악의는 없다고 추측했다. 내가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나는 커피를 받아 3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현듯 성인의 창의성이라 불리우는 예측력(추정)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일어난 내 삶의 변화 중 가장 큰 것이 데이터가 적을 때보다 훨씬 더 쉽게 추측 혹은 예측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것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피하는 데 있어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삶을 보수적으로 대하게 된다는 점에서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일어나거나 경험하지 않은 것을 상상하여 미루어 짐작한다는 점에서 상상력과도 비슷하고, 문제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 해결력과도 비슷하다. 나는 이 능력이 내 삶의 편의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 이 예측력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발 씻을 물이 나오지 않는 폐장된 해수욕장에서 파도에 발을 담그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다음날 중요한 미팅이 있다면 과음하지 않고, 무리한 일정이 요구될 것 같은 일은 받지 않는다. 무리하지 않는 나는 감정의 고비를 겪을 일이 적고,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울 일도 많지 않다. 아마도 대부분의 성인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작용하고 있을 이 예측력은 양날의 검과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경험에 의한 패턴 인식과 그로 인한 사후 의사결정이 안정권에 머무는 방식으로만 진행된다면 점점 더 보수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결국엔 선택지를 최소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예측력은 사실 정답이 아니라 그저 안전한 답일 뿐이다. 예측에 의한 선택은 나를 안정권에 머물게 하지만 동시에 예상 밖의 즐거움, 행복, 행운 등의 많은 기회를 빼앗는 점에서 자멸과도 비슷하다. 그러니 내가 스스로에게 할 수 있을 법한 현명한 조언은 예측 안에서, 혹은 밖에서 선택하라는 말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든 그 결과와 책임이 내게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는 말 정도일 것이다.


이슈에 따라 최악의 상황을 예측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어제 이른 저녁, 나는 그에게 물어볼 게 있어 톡을 남겼다. 내가 아는 한 그에게 특별한 일정은 없었지만, 그는 답변이 없었다. 처음에는 평소 그의 패턴을 보건대 초저녁이지만 그가 낮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핸드폰을 두고 운동을 갔을 수도 있다. 책이나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동네 친구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있을 수도 있고, 서울에서 누군가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톡을 보낸 지 너댓시간이 넘도록 연락이 없다는 것은 내게 몇 가지를 추측하게 했다. 1) 그에게 지금 폰이 없다. 2) 폰은 있지만 폰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을 재미난 상황에 빠져 있다. 3) 톡을 봤지만 톡에 대답을 해서 대화를 이어가긴 곤란한 상황이다. 그가 폰을 잃어버렸다면 아마도 내게 다른 방법으로 연락을 했을 것 같다. 3)은 어느 정도 신뢰가 생긴 우리 사이에서 이제 그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되는 행동이다. 물론 이건 그저 나의 추측일 수 있으나 그는 나에게 이 정도 추측이 가능한 신뢰를 쌓았고, 나는 그에게 어떤 상황이라도 공유해도 괜찮다는 신뢰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저 '지금 사정이 좀 있어서 나중에 톡 할게.' 정도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과거 패턴을 비추어 봤을 때 2)가 가장 의심되었다. 그 재미난 상황이 무엇일까? 회식? 새로운 만남? 일탈? 아마도 누군가 남편을 혼자 두면 일어날지 모른다고 예고한 그런 일? 나는 이런저런 상상을 더하다 불현 진짜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지 예측하게 되었다. 내가 이놈의 시키가 연락을 할 때까지 이 추정 놀이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는 것, 그 의심을 키워 일상을 잡아먹고 방학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바로 이러한 것이 결국 방학의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힘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선택을 했다. 그저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정이 넘은 시간 그에게 부재 중 전화와 카톡이 와 있었다.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예측해 보는 것은 그게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그 예측에 빠져 보수적 선택을 하게 하는 것 두 가지의 갈림길을 가진다. 여기서 중요한 분별력이 동원되는데 바로 그것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인가이다. 나는 내 감정, 선택, 행동, 태도, 관점, 욕망 등을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의 것은 통제할 수 없다. 그건 마치 날씨나 주식과 마찬가지다. 내 뜻대로 되길 간절히 바래 봤자, 내 간절함과는 결과는 별 상관이 없고 그저 운이 좋으면 땡큐, 운이 나쁘면 젠장일 뿐이다. 그러니 간절함을 버리고 그저 Let it go 혹은 Carpe diem 하되, 스스로는 바람직한 선택을 하고 선택에 책임지려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나는 이것을 의지와 태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쓰다보니 이 글은 실제 내 행동 이상으로 이성적, 혹은 이상적인 듯 하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했던 것도 그저 예측력의 사이드 이펙트(side effect) 정도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성을 발휘해, 예측을 넘어 행동을 선택하는 그것이 바로 태도라는 훈훈한 이야기로 결론을 포장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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