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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Jul 19. 2021

마취, 그리고 깨어나기

I have become comfortably numb.

"같이 가고 싶은데... 나는 잠이 와서 조금 더 자야 할 것 같아."

잠이 부풀린 얼굴이 뽀얗게 웃었다. 아침 6시,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난 아이가 잘 다녀오라며 안아주었다. 보통 미술관이 오픈하는 시간이 10시 또는 11시인데 6시 출발이라니, 겸연쩍은 시간이었다. 주말엔 다들 늦잠을 자고 싶어 하니까, 산책 다녀와서 씻고 식구들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아침 먹고 나면 오전 시간이 다 가 버리니까, 일찍 미술관 근처에서 산책을 하다가 문 열면 얼른 그림만 보고 오려는 셈이었다. 바쁠 것 하나 없이 한산한 도로 위를 달리고 있자니 상념이 떠올랐다.


나와 나의 아이,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미리 밝혀두건대, 나의 생각은 이렇다. 나는 특별히 우둔하거나 무감각하지 않다. 나의 아이 또한 특별히 감수성이 뛰어나다거나 민감하지는 않다. 우리는 여느 존재처럼 고유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방향으로든) 아웃라이어는 아니다. 변명 같지만 정말로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최근   사이에  번이나 내면의 구덩이에 빠져들었다. 번번이 아이와 대화를 나눈 직후였다. 어두컴컴한 구덩이 안에 들어가 ', 나는 얼마나 무감각한 사람인가? 내가 내뱉는 ‘정치적으로 올바른말들정서적으로는 얼마나 절연되어 있는가?’ 자조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하나? 개선의 여지가 없다. 구제 불능이다.  가지 예를 들어보면, 상황은 이랬다.


상황 1. 자동차 정기검사일이 도래하여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검사소에 가는 중이었다. 신호 대기에 걸려서 서있는데 아이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들은 왜 자꾸 아파트를 짓는 거야? 마음에 안 들어!” 아이의 동생인 또 다른 아이가 이유를 물었고, 아이는 아파트를 짓기 위해 깎여나간 작은 언덕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을 잃은 곤충과 동물들을 대신해 격양된 목소리로. “라윤이 말이 맞네.” 나는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느끼지는 못 했다, 아이가 경험한 것과 같은 분노를. 탁 트였던 시야를 가려서, 미관상 좋지 않아서 거슬리는 정도였다.


상황 2. 몇 달 전인가 아이와 둘이 대형마트에 갔다. 우리는 주로 집 앞 소형 마트와 협동조합 매장을 이용하기 때문에 대형마트 나들이는 ‘장보기’의 성격보다는 ‘나들이’의 성격이 크다. 내가 몇 가지 물건을 고르는 동안 아이는 수산 코너의 수족관 앞에서, 애완동물 판매 코너의 동물 케이지과 작은 어항들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얼추 장을 다 보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새장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왜 좁은 새장에 십자매를 가둬 둔 건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네 말이 맞아.”라고 했지만, 십자매보다는 아이의 침울한 기분에 마음을 쏟았다.   


상황 3. 선물 받은 한 아름 꽃을 화병에 꽂고 있는데, 아이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혹시... 이 꽃 계속 살 수 있는 거지? 뿌리가 자라서 계속 살 게 되는 거지?”라고 물었다. 그건 아니지만,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화훼 산업이 발달한 거야, 라며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 "그럼 화분에 심긴 꽃을 사면 되지 않아?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했다. 그 말도, 맞았다.


상황 4. 지난봄, 자주 지나다니는 산책길에 대대적인 가지치기가 있었다. 긴 머리를 스포츠머리로 깎는 것만큼의 극적인. 관목들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던 붉은머리오목눈이들이 사라졌다. 작은 새들을 걱정하던 아이는 가지치기를 왜 하는 건지 물었고, 나는 이번에도 뻔한 대답을 내놓으려다 그만뒀다.


상황 5. 아이는 요즘 부쩍 북한에 대해 묻는다. 우리는 한 나라인데 왜 북쪽과 남쪽으로 나뉜 거냐고. 미국은 무슨 상관인데 우리나라의 일에 끼어드냐고. 우리는 언제든 다시 싸울 수도 있는 거냐고. 왜 어떤 사람들은 북한을 돕는 일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거냐고.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맞다, 맞다. 네 말이 다 맞다. 그런데 왜 내 안에서 ‘평화'와 ‘통일'은 관념이기만 할까? 저기 저만치에서 안전한 거리를 확보한 채 맞는 말만 하고 있는 사람은 대체 왜 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상황 6. 길을 걷다 문득, “엄마, 나는 백두산에도 가보고 싶고, 금강산에도 가보고 싶어. 거기 가면 우리가 못 본 새들이 엄청 많겠지? 북한이 개발을 많이 안 해서 환경오염을 많이 안 시킨 건 잘한 것 같아.” 한다. 마음이 걸음을 멈춘다.


I have become comfortably numb.(핑크 플로이드의 곡 ‘Comfortably numb’의 가사) 나는, 어쩌면 깊은 마취 상태에 빠져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어지러운 생각은 모두 옆으로 밀어 두고, 아이의 이야기들을 남편에게 전했다.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리고 짧지만 분명하게 답했다.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지.”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보았다. 그래, 사랑, 사랑이었구나! 나의 마비된 것은, 사랑이었구나!


나, 이제 깨어나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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