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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Jan 31. 2022

자기(自己)의 이유(理由)

네가  안에 있는 그것을 꺼낼  있다면  안에 있는 그것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그런데 네가  안에 있는 것을 꺼내지 못하면, 태어나지 못한 그것이 너를 파괴시키고  것이다. -도마복음


‘뭐라도 하자.’ 생각했다. 바쁜 일정이 끝난 후 어김없이 무기력감이 찾아왔는데, 종일 옅은 우울감에 시달리다가 밤에는 잠을 설쳤다. 밤 10시면 아이들과 잠의 세계에 들어섰지만 세네시간이 채 못 되어 잠에서 깼다. 가슴이 답답했다. 거실 소파에 누워 눈을 꿈벅이며 생각했다. ‘이러다 내 안에 그 무엇이 나를 삼켜버릴지도 몰라. 무엇이든 꺼내어보자.’


그래서 시작한 몇 가지 일들 중에는 영어공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Mom the Reader 새벽달님과 EBS 라디오에 이현석 선생님이 진행하는 낭독 프로젝트를 신청했다. 매일 새벽 EBS 영어방송 중 ‘귀가 트이는 영어’와 ‘입이 트이는 영어’를 듣고 낭독을 음성으로 기록했다. 그렇게 2022년 1월 한 달을 빼곡하게 살았다. 뿌듯함과 보람으로 가득해야 마땅할 1월의 마지막 날, 어쩐 일인지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지난 한 달간의 낭독 영상을 돌려보았다. 솔직히 나의 낭독 수행은 전반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다(해외 체류의 경험이 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긍정적인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생기를 잃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태도의 문제였다. ‘영어 공부하면 두루두루 좋지. 아이들 영어책 읽어줄 때도 도움이 될 거고.’라고 두루뭉술. ‘다시 외국에 나가서 공부할 것도 아닌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해외여행을 갈 수 있을까?’ 사기를 꺾어버리는 생각을 더 자주 했다. 영어 공부에 대한 나만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잡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바쁘게 만드는 기능적 이유 밖에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자유(自由)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유, 영어공부에 있어서 나는 그것을 갖지 못했다. 비루한 열정을 톱아보다 한 시절의 표본이 된 장면들을 떠올렸다. 영어를 더 잘하고 싶어 하던 시절. 한 시절, 나는 가방 속에 영어로 씌어진 시집을 한 권씩 넣어가지고 다녔다. 마음이 퍼석거릴 때마다 꺼내어 소리 내어 읽었다. 빛나는 낱말들의 나열과 그 낱말들이 소리가 될 때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나는 사랑했다.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랬다. 소리와 소리, 리듬과 리듬 사이의 공백에서 위로를 받았다. 나의 은밀한 유희를 알았던 하우스 메이트이자 친구인 리사가 노래하듯 시를 읽어주던 장면들도 떠올랐다.


아름다움에의 추구, 내 안의 깊숙한 그곳에는 늘 그것이 자리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더 많이 향유하고 싶은 마음,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 마음이 나에게는 크고 분명한 ‘자기만의 이유’ 인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간절한 마음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나라의 나이 든 나는 ‘구원’을 향해 다시 새롭게 ‘소리’를 꺼내어보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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