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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Feb 11. 2022

윤슬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푹신한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던 윤슬은 자칫 넘어질 듯 위태롭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소파 난간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윤슬은 대학 타운 중심가로 이사를 하기 전 임시 거처로 제니스의 집에 묵게 되었다. 여행 중인 제니스를 대신해 물고기들의 밥을 챙겨주는 조건이었다. 제니스의 집은 대학원생들이 많이 사는 이스트 빌리지 내에 자리 잡은 이층 목조 아파트였다. 아파트 복도를 따라 걷는데 중국어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현관문에 키를  꽂고 문고리를 돌려 열자, 해 질 녘 붉은 햇살이 윤슬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거실의 절반을 채운 식물의 실루엣이 드리운 거실 창 풍경은, 막 태평양을 건너온 윤슬을 더 먼 곳까지 데려갔다. 윤슬은 외투를 벗어 짐과 함께 한쪽에 개어두고 화장실로 들어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샤워를 했다.


담요를 덮고 소파에 누워 폴더폰을 열었다 닫았다 시간을 확인하고, 거실 창밖을 올려다보며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슬은 닫혀있는 두 개의 방문을 번갈아 살폈다. 두려운 상상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올랐다. 담요로 몸을 두르고 나서야 일어설 용기가 났다. 정작 소리는 집 안에서 들렸는데 현관문을 단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윤슬은 생각했지만, 달리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그렇라도 해야 했다. 현관문에 등을 기대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던 윤슬은 은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당장 급한 마음에 연락은 했지만, 윤슬과 은수는 가깝다고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사실 이곳에서의 모든 관계가 그랬다. 은수가 먼저 떠오른 것은,  한 권의 시집 때문이었다. 한국에 다니러 가는 윤슬에게 은수가 부탁한 시집. 시집의 제목이 뭐였더라 생각하고 있는데 곧 은수가 왔다. 은수의 손에는 커피와 쿠키 한 봉지가 들려있었다. 윤슬은 그제야  마음 놓고 거실에 불을 켰다. 역시나 방문을 열어보지 않는 편이 좋겠지, 윤슬의 물음에 은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선 두 사람 모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은수는 도서관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밤을 세울 작정이라고 가방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이 쿠키 먹어봐.”

은수가 커피와 함께 초콜릿이 중간중간에 박힌 커다란 쿠키를 윤슬 앞에 내밀었다.

“아, 미국 냄새난다!”

둘은 피식 웃었다. 진하고, 쫄깃하고, 달았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시니, 비로소 달지만 달지 않고, 쫄깃하지만 촉촉하기도 한 궁극의 초콜릿 칩 쿠키의 맛이 완성되었다.

“역시!”

은수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둘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침묵이 어색하지는 않지만 딱히 할 말도 없는 사이. 은수는 식탁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윤슬은  소파 시트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글을 썼다. 어차피 시차 적응도 안 되었겠다, 혼자 잠을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윤슬은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자연과학도가 작가라니 허황된 꿈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작가는 받아쓰는 자’라는 말의 의미를 윤슬은 체감하고 있었다. 때때로 머릿속에 문장들이 떠올랐고 그 자리에서 받아 적지 않으면 삶이 통째로 불행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즉각 받아 적지 못하면 아무리 곱씹어도 기억은 글이 되지 못했다. 실제로 그럴 때마다 키가 1mm쯤 작아지는 것 같았다. 쓰는 행위는 그렇게 윤슬의 생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창 글을 쓰고 있을 때 연필심이 뚝 부러졌다. 가지고 있는 필기구라고는 지우개가 달린 연필 한 자루가 전부였다.


윤슬은 은수 쪽을 바라보았다. 은수는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윤슬은 은수의 얼굴을 눈으로 천천히 쓸어보았다. 목과 어깨와 팔과 손가락 끝까지. 부러진 연필심을 제자리에 도로 집어넣고 다시 글을 썼다. 연필심이 곧 빠질 이처럼 덜렁거렸지만,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바짝 움켜 잡으니 그럭저럭 쓸 만했다. 윤슬은 어쩐지 연필과 더 친밀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시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슬아, 밖에 비 온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윤슬에게 빗방울보다 반가운 것은 “슬아”, “슬아”라는 말소리였다. 어쩐 일인지 이곳에서는 한국사람들조차 윤슬을 부를 때 미국식 억양의 스타카토로 “윤술”이라고 불렀다. 은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윤슬은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것이 자신만은 아니구나 싶은 생각에 좋아하다가 얼른 시집을 떠올렸다.

“맞다, 시집!”

윤슬은 트렁크에서 시집을 찾아 은수에게 건넸다.

“우와,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은수는 몇 번이고 손바닥으로 책 표지를 쓰다듬었다. 책장을 펼치고 몇 편의 시를 골라 윤슬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다.


은수와 윤슬의 이야기는 그것이 끝이었다. 은수는 윤슬의 이삿짐 옮기는  도왔고, 이따금 윤슬의   앞이나 우편함에 간식거리와  같은  두고 가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학기 중에는 학과 공부로 각자 바빠서 얼굴을  수가 없었고, 은수는 학기가 끝나자마자 차로 4시간 거리의 도시로 연구차 떠나버렸다. 윤슬은 이따금 은수에게 느꼈던 자신의 감정이 뭐였을까 자문했다. 가벼운 호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은수의 마음이 궁금해지곤 했다. 그날  은수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혼자서 제니스의  방문을 힘껏 열어젖혔더라면 생각하다가도, “은수야!”라고   다정하게 불러볼  그랬다고 후회를 했다. 윤슬은 지금껏 살면서 식물 같은 자신의 성향이 과학자가 되기에,  작가의 꿈을 키우기에 적합한 자질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은수를 생각할 때면 바라보고 살피기만 하는 이런 성격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럴 때면 윤슬은  눈을 감았다.


'여기가 어디지?’

윤슬은 목적지에 다다라서야 잠에서 깼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풍경의 도약. 윤슬은 그곳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지나온 길에 대해 알지 못했다. 끝끝내 알 수 없었겠지. 그 때 현재의 풍경 위로 분명하게 은수가 보였다. 은수였다. 은수가 윤슬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은수야!”  

윤슬은 소리 내어 은수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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