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정 May 15. 2018

매트 위 강아지

혼자 샤워하게 해주세요!

반복적으로 꾸는 꿈이 있다. 쇠로 된 무거운 볼링공이 내 몸 위를 굴러다니는 꿈이다. 그 꿈을 꾸는 밤이면 몹시 아파하다가 눈을 뜬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도 욱신거리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태율이의 동그란 머리가 내 가슴팍 위로 굴러다니는 게 보인다. 어제저녁, 밥을 먹고 라윤이와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태율이가 왼쪽 검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손가락을 문 채로 한참을 낑낑대더니 내 엉덩이와 의자 등받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는다. "태율아, 태율이 왜 여기 앉아?" 내가 물었다. "엄마 좋아서." 녀석이 웃으며 답한다.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나의 가장 큰 목마름은 사적인 시간과 공간의 확보다. 엄마가 좋아서 안아달라고, 손 잡아 달라고 다가오는 아이가 예쁘면서도, 홀로 아무 생각 없이 바람을 만나고 햇살을 만나는 시간이 고프다. '한계인가?', 크게 숨을 고르는 날이면, 미국에서 만났던 어린 유학생 엄마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주변에 조력자 없이 타향에서 아이를 키우던 대학생 엄마는 어린아이를 혼자 두고 화장실에 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참고 또 참다가 변비에 걸려버린 그 엄마는 결국 아이를 안고 볼 일을 봤다고 했다. 아이를 안고 변기에 앉아 수치심에 한참을 울었다고.


배변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는 육아의 세계에서 샤워의 자유를 논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겠지만 나에게 샤워는, 내 삶의 존엄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그 무엇이다. 동시에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넘버 원,  나는 가늘고 따뜻한 물줄기 아래에 서서 행복감을 느낀다. 그래서 매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샤워를 한다. 휴일에도 마찬가지다. 씻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는 야옹이 세수를 시킬지언정 나의 샤워는 거르는 법이 없다. (나 너무 이기적인가?) 살금살금 이불속에서 빠져나와 문을 살며시 열고 화장실로 향한다. 하루 중 가장 여유 있는 시간, 샤워기의 물을 틀어 온도를 체크한 뒤 따뜻한 물줄기 아래에 선다. 토도도독 토도도독 피부 위로 경쾌하게 와 닿는 물줄기에 모든 감각이 기분 좋게 깨어난다. 어, 그런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타다 타다 타다- 뜨으윽- 화장실 문이 열린다.


태율이다. 눈도 덜 뜬 아이가 휘청거리며 화장실 문 앞에 서있다. 내가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발매트 위에 눕는다. 우리집 강아지, 녀석의 사랑이 매일의 아침 풍경으로 펼쳐지며 함께하는 우리의 하루가 시작된다.

이전 21화 이력체(履歷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