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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Apr 23. 2018

나를 비추는 작은 거울들

SKETCH: layoon, COLORING: sojeong


싸악싸악 사과를 깎아 라벤더가 그려진 작은 접시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담는다. 그 옆에 작은 포크 두 개를 올리고 라윤이와 태율이를 부른다. 두 아이는 어김없이 "사과다!"를 외치며 테이블로 달려와 앉는다. 태율이가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태율: 엄마, 어제 띵동~하고 아저씨가 안녕하세요~ 치킨이 왔어. (거실 쪽 테이블을 가리키며) 저기서 치킨 먹었어.

라윤: 엄마, 어제 우리 TV를 너무 많이 봤어.

나: 정말? 왜 TV를 많이 봤어? 아빠랑 재밌게 놀지.

라윤: 아빠가 자꾸 틀어줘서 우리가 집중해서 봤지. 엄마가 아빠 혼내줘.

태율: 안돼~! 나 아빠 짝꿍이잖아!


내가 외출한 사이에 일어난 일을 일러주는 두 아이의 이야기 속에 '집중'과 '짝꿍', 우리집 고빈도 단어가 모두 등장했다. '집중'은 대화할 때, 밥 먹을 때 주의가 흩어지는 것을 못 견뎌하는 내가 자주 하던 말이다. 이제는 내가 매일 아침 라윤이에게 듣는 말이 되었지만 말이다. 습관인가? 현관문을 나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나면 나는 가만히 기다리지를 못한다. 꼭 무언가를 한다. 보통은 두고 나온 물건이 없나 가방 안을 확인하거나, 아이들의 옷매무새를 다시 살피는데 그러면 라윤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엄마, 집중해야지요."라고 말한다. 물론 어떤 날은 상냥하게 "엄마, 집중하지 않을래요? 내가 도와줄게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짝꿍'은 가족이 함께 외출했을 때 좀 더 아이들을 안전하게 돌보기 위해 내가 도입한 제도(?)이다. 남편과 함께 외출을 하면 책임감이 분산되어 남편은 내가 잘 보고 있겠지 짐작하고 나는 남편이 잘 보고 있겠지 짐작하며 얼마쯤은 긴장의 끈을 놓곤 했다. 덜컹하는 마음을 막아보자, 육아의 부담을 적정하게 나누어보자 해서 시작한 짝꿍 제도인데, 하얀 도화지 같은 태율이에게는 절대적이 되어버렸나 보다. 아빠 짝꿍이라서 아빠를 지지하고, 아빠 짝꿍이라서 아빠를 보호하기 바쁘다.


오늘도 나는 나의 작은 거울들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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