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랑거리는 인디고 쇼츠에 하얀색 면 반팔티, 민트색의 캡 모자를 눌러쓰고 경량 러닝화를 신는다. 워치를 톡톡 깨워 운동 기록 앱의 시작 버튼을 누르면 3, 2, 1, 시작! 통통통, 계단을 내려간다. 제자리를 찾아가고 싶어, 제자리를 찾아가고 싶어. 걸음을 디딜 때마다 몸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 허리뼈와 꼬리뼈를 잇는 천골이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쥐었던 힘을 풀고 부드럽게 달린다. 몸이 덥혀지고 호흡이 차오르면 몸에 새겨진 감각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른다. 깜깜한 밤 살갗을 스치던 차가운 공기, 팽팽한 종아리, 주변 시야로 흩어지던 사람과 풍경들, 멈추어 터뜨리던 소다수 같은 웃음. 다시 달릴 수 없을 줄 알았다. 태중의 아이가 산도를 지나 몸 밖으로 나온 이후, 그 작고 연약한 생명을 품에 안은 이후, 나의 삶도 움직임도 고요해져 버렸다. 빠르게 움직일 때조차 조심조심 살금살금 조바심 낸 채 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해체. 나의 부분들이 주저앉고 떨어져 나가고 말 거라는 망상을 품게 된 것이었다.
그런 내가 달린다. 특별한 다짐이나 계기도 없이 5월의 어느 날,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아이들 옆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날 이후 매일, 아이 등교를 도와주고 돌아오는 길, 아이들이 숙제를 하는 사이, 장 보러 가기 전,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일상의 틈새를 비집고 나가 달린다. 우산 대신 눌러쓴 모자 위로 빗방울을 맞으며 달린다.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이 달린다. 달리는 몸은 해체되는 대신 느슨한 연결을 만들어 내고, 숨길을 터서 크게 호흡한다. 초록의 나무들 아래에서 나의 숨결은 새소리에 스미고, 땅을 밀어내는 나의 발아래로 붉은색 버찌가 토도독하고 터진다. 관계 맺고 연결된다. 나는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