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써내리며.

올해 목표 : 시 쓰기.

by Chet

올해를 친구들과 택시 안에서 맞이했다.

순간 올해도 생각하던 방식과는 다른 희한하고 우아한 한 해가 우리를 맞이하겠구나 하는 마음에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광안리를 빠져나오던 사람들을 거스르며 어두운 바다로 향하던 새해의 첫날들이 아직 선명한데 어느덧 초록이 자라는 3월이 되었다. 두려웠고 원치 않았던 소식이 3월을 반겼고, 나는 이 순간도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단념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끔찍했던 작년에도 문득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고, 바라왔었던 순간이 서글프게 찾아오기도 하였다. 올해도 그런 순간들이 이 보잘것없는 삶을 빛바래게 추억하게 할 것 같다.


서울로 올라온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왔던 곳과 많은 차이가 있지만, 서울은 고향과 달리 눈이 정말 많이 내린다. 어린아이가 고사리 손으로 뭉친 것 같은 크기의 눈이 말 그대로 억수같이 내리던 날, 회사에서 지루한 오전을 보내고 간단하게 혼자 점심을 해결한 뒤 눈스퀘어 지하에 있는 서점을 우연히 찾았다. 갑자기 뭐라도 읽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서 멋들어져 보이는 제목의 시집을 하나 집었다. 제목은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였다. 돈 관리를 해본 적이 없는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처럼 가격도 확인하지 않은 채 카운터에서 책을 결제하고 옆에 붙어있던 카페에 커피 한잔을 시킨 뒤 앉아 어설프게 명동의 직장인 흉내를 내면서 책장을 넘겼다. 첫장에 이 시인의 유고시집이라고 적혀있었다. 순간 유고라는 뜻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유고가 맞는지 찾아보았는데 그 뜻이 맞았다.


시를 한편 한편 씩 읽으면서 느껴졌던 것은, 이 작가는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집을 쭉 읽다 보니 죽음을 앞둔 이 시인이 가장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사랑인 것 같았다. 이 시집은 죽음이면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을 만난 후부터 길은 휘어져 오른쪽으로 가도 왼쪽으로 가도 당신을 만나요"

"책상에는 농담 같은 일기와 진담 같은 詩 몇 편"

"언젠가 당신은 눈먼 거미의 호주머니에서 내 유서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이해하려고 해 봤자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한"

"그것은 우리가 물어뜯고 해체한 시간이에요 나에게 온 적이 없는 당신의 시간이에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문장을 쓰고 있어요"


순간 사랑에 대한 시를 쓰고 싶어 져서 그 자리에서 어설픈 시를 한 편 썼다.


"뿌연 하늘에서 창백한 눈송이가 무리를 이루는 임의로운 낙화 속에 서있어요 그 꽃들은 나뭇가지 없는 속절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라서"


"마치 어린 날의 모래성을 야금야금 파괴시키듯 결국 함락의 책임은 내가 모두 껴안고, 무너진 나뭇가지 깃발을 두툼한 외투 주머니에 홀로 숨겨뒀어요"


이 어설픈 문장들을 적어내며 밖에서 내리는 흰 눈을 생각했고, 흰 눈처럼 하얗고 텅 빈 어설픈 시를 나는 그 자리에서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후 3일 동안 두 편의 시를 써내었다. 물론 어이없고 만용이 가득 섞인 글들이지만 그때의 나는 써야 했고, 그 시들은 쓰여야 했던 것 같다. 시를 쓰면서 흔들리는 버스 앞자리에 갖다 대어 삐뚤한 글씨체로 써냈던 편지와, 들키기 싫어 몰래 화장실 벽면에 대고 썼던 생일선물 속 짧은 편지가 생각났다.


아무런 계획과 목표 없이 시작된 한 해였으나, 차갑고 텅 빈 흰 눈 덕분에 시를 쓰고자 하는 자그마한 열정이 생긴 것 같다. 이 시들을 우연히 발견한 직장인 신춘문예에 출품해 보았다. 지난 나의 엉뚱한 단편소설들처럼 수상은 기대조차 못하지만 이런 순간들만으로도 지난날처럼 올해를 빛바래게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아직은 컵라면도 끓일 수 없는 미지근한 온도일지라도 뜨겁게 사랑을 써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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