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시리즈 - 노화가 아니었어!
"노년은 우리에게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에, 더 조급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 헬렌 켈러 (Helen Keller)
입천장이 자주 까진다. 나이가 드니 몸의 작은 변화에도 신경이 쓰인다. 혀로 입천장을 문질러보면 뜨거운 국물에 벗겨져 생긴 상처가 따끔거린다. 까지기 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입천장이 "나 여기 있소" 하며 수시로 존재를 드러낸다.
점심시간이 되면 함께 진료하는 원장님들과 직원식당으로 내려간다. 매번 따뜻한 국이 나온다. 소고기 미역국, 육개장, 아욱 된장국, 추어탕, 소고기 뭇국 등 계절별로 바뀌는 메뉴 덕분에 집밥처럼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야간 진료가 있는 날에는 저녁도 직원식당에서 해결한다. 식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며 입천장을 더듬어본다. 며칠 전에 까졌던 자리가 또 까졌다.
내 몸인데도 짜증이 난다. 나이가 들면 노화가 진행된다지만, 이렇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하나? 좀 적당히 하면 안 될까? 두 번 까진 입천장 때문에 음식을 먹기조차 불편하다. 뜨거운 국물이 닿기만 해도 아리고, 딱딱한 음식이 살짝만 스쳐도 아프다. 혀로 음식을 한쪽으로 밀며 조심스럽게 씹어 삼킨다.
함께 일하는 제일 어린 원장님과는 20살 차이다. 같이 식사를 하며 요즘 들어 입천장이 너무 자주 까지고 낫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푸념을 했다. "나이가 드니 피부가 연약해지고 면역력이 떨어져서 회복도 더딘가 봐요"라고 말하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저희 아버지도 그래요. 뜨거운 국을 너무 급하게 드시더라고요. 천천히 드시라고 해도 급하게 드시다가 자주 입천장을 데세요.”
아이들은 음식이 조금만 뜨거워도 먹지 않는다. 엄마가 후후 불어 식히고 한 번 입으로 확인해줘야 겨우 먹는다. 어른이 되면 뜨거운 국물을 용감하게 입에 털어 넣는다. 밥을 한술 뜨기 전에 뜨거운 국물로 캬~ 해야 식사가 시작되는 기분이 든다.
친한 내과 후배에게 찾아가 혈액검사를 하고 진료를 받았다. 검사 결과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왜 자꾸 이런 증상들이 생기는지, 정말 면역력이 떨어진 건 아닌지 물었다.
“저도 그래요, 선배. 나이 들어서 그런 거예요.”
나이가 들수록 일상의 루틴에 집착하게 된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점점 어렵다. 의지와 상관없이 나타나는 몸의 변화는 솔직히 두렵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일상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고 반팔차림으로 잤는데, 이제는 유니클로에서 히트텍을 사고 있다. 피부의 각질 때문에 겨울이면 올리브영에서 바디로션을 고르며 제품을 비교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아침마다 몸이 묵직하고 몸살처럼 아리다. 아내에게 영양제를 물어보고, 냉장고의 경옥도를 밤마다 한 숟갈씩 떠먹는다.
건강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능한 한 스스로 건강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 아프면 가족 모두가 힘들어진다. 사실 나쁜 결과가 나올까 봐 검사가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큰 불씨가 되기 전에 확인하고 필요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마음도 약해진다. 나이가 들어서 무언가를 해내면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혹시 나이 때문에 스스로 선을 그어놓은 것은 아닐까? 가족을 팽개치고 무모한 도전을 하겠다는 것도, 나이에 맞지 않게 젊음을 증명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헤이해진 마음을 다잡아본다. 걷기를 숙제처럼 했다. 걷지 않을 이유 대신 걸어야 할 이유를 더 만들었다. 전날 과음을 했으니 걷고, 일요일 과식을 했으니 걸었다. 부슬비가 와도 방한 후드를 입고 걸었고, 야간 진료를 마치고 늦게 들어와도 걸었다. 쌓아두었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고, 브런치에 매주 최소 한 개씩 글을 올렸다.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집을 읽다가 모든 투고작에 대한 심사평을 보게 되었다.
“올해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50대, 60대의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참 많구나. 나만 특별한 줄 알았다. 시험이 쉬우면 나만 쉬울 리 없다. 남들은 나태한데 혼자만 열심히 사는 줄 알았다. 쓸데없이 우쭐하지 말자.
2주 동안 뜨거운 국을 조심스럽게 먹었다. 입천장이 한 번도 까지지 않았다. 후배의 말이 맞았다. 피부가 약해진 게 아니라 성격이 급해진 것이었다. 조금씩 느려지는 삶의 속도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여유를 찾아가는 법도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