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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펜 Mar 19. 2023

흰머리 어떻게 좀 해봐

노화 - 흰머리

"흰머리는 단순히 나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이를 품은 아름다움이다."

— 세네카 (Seneca)


아파트 단지에서는 매년 야외음악회가 열린다. 클래식 연주, 성악, 무용뿐 아니라 대중음악과 힙합 공연도 있어 아이들이 특히 좋아했다. 광장 주변 부스에서는 솜사탕과 막대풍선을 나눠주고 간단한 페이스 페인팅도 해준다. 하지만 아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경품 추첨이었다. 매년 꽝이었지만, 어느 날 아이들이 소리치며 집으로 들어왔다. 행사장에서 집으로 가는 어른들의 응모권까지 받아서 15만 원 상당의 미용실 이용권에 당첨된 것이다.


노안 때문인지 나만 잘 몰랐던 흰머리. 이전부터 아이들은 염색을 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자세히 보니 흰머리가 제법 많이 올라와 있었다. 염색은 한 번 시작하면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미루고 있었는데, 아내는 "기왕 미용실 이용권도 받았으니 첫 염색은 미용실에서 받는 게 좋겠다"며 권했다. 미용실에 전화해 펌 시술 대신 염색이 가능한지 물었더니 가능하다고 했다. 평소에는 부담스러워 가지 못했던 고급 미용실에 예약을 하고 아이들에게는 학용품을 살 용돈을 준 후, 생애 첫 염색을 받으러 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스타일리스트가 태블릿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염색 준비를 했다. 염색 전에 피부 테스트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요즘 염색약은 워낙 잘 나온다는 생각에 별일 없을 거라 여겼다. 서비스로 나온 허브차를 마시며 편하게 염색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와 아이들이 몇 년은 젊어 보인다며 왜 진작 안 했냐고 말해 기분이 좋아졌다. 주말이 지나고 출근했을 때 직원들 반응도 궁금해졌다. 빈말이라도 젊어졌다는 말이 싫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염색은 주말이 지나고 일주일 동안 악몽 같은 시간을 선사했다.


저녁이 되자 머리가 가렵기 시작했다. 머리를 벅벅 긁으니 아내가 밥 먹는 데 뭐 하느냐며 핀잔을 줬다. 가려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통증으로 변했다. 작은 바늘로 머리를 콕콕 찌르는 듯하다가, 불에 달군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피부가 민감한 편이라 그럴 수 있겠다 싶었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아침에 거울을 보니 두피가 부풀어 있었다. 붉게 물든 두피는 마치 바람이 잔뜩 들어간 풍선처럼 커져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붓기는 더 심해졌고, 인터넷에서 염색약 부작용을 검색해 보니 내 모습과 똑같은 사진들이 나왔다.


부은 머리를 손으로 누르면 쑥쑥 들어갔다. 귀보다 옆머리가 더 커져 안경조차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결국 미용실에 전화를 걸었더니 일단 병원을 가보라고 했다. 피부과에서 주사와 약을 처방받고 나서야 붓기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미용실에 강하게 컴플레인하고 싶었지만, 스타일리스트와 제품 공급업체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에 실망만 남았다. 결국 병원비와 샴푸, 두피 케어 제품을 보상받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1년이 지나면서 흰머리는 빠르게 늘어갔다. 만나는 사람마다 흰머리를 지적한다. 노안 때문에 잘 보이지 않던 흰머리도 이제는 신경이 쓰였다. 아내가 천연 염색약이라며 한 번 더 시도해보자고 했다. 꺼려지긴 했지만 아내가 안전하다고 하니 다시 염색을 해보았다. 하지만 저녁부터 두피가 따끔거리고 가려웠다. 일단 약국에서 약을 사 먹고, 월요일 아침 일찍 피부과를 찾아 주사와 약 처방을 받았다. 염색을 계속 시도하면 면역력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원장님은 오히려 몸이 더 빨리 심하게 반응할 거라고 했다. 피치 못할 상황이면 주사를 맞고 염색을 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늘 다니는 미용실 원장님도 내 상황을 알아서 염색은 절대 권하지 않는다. 최근에 정말 안전한 염색약이 나왔다며 피부 테스트를 한 번 해보자고 한다. 다음 날 팔뚝에 불도장을 찍은 듯 염색약을 바른 부분만 발진이 생기며 심하게 가렵기 시작했다. 며칠간 연고를 바르고 진정시켰다.


마트에서 음료수를 사러 가다가 동년배의 이웃 주민을 만났다. “머리가 많이 하얗네요. 원래 하얬나?” 하며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같이 일하는 원장님도 “염색 좀 하세요. 머리가 너무 하얘요.”라고 한다. 추석에 만난 친척들도 머리숱은 풍성한데 머리가 너무 하얗다고 한다. 매번 “염색약 부작용 때문에 못 해요”라고 답은 하지만,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자꾸 들으니 신경이 쓰인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기능적인 노화는 도구의 힘을 빌릴 수도 있지만 내 흰머리에는 아직 해결책이 없다. 피할 수 없이 함께해야 하는 노화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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