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드펜 Jun 07. 2023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는 엄마

노화 시리즈

"전에 갔던 음식점 거기 있잖아. 그거 먹었던."

전에 언제, 거기 어디? 그거는 무엇?


앱스토어의 어플을 다운로드하려면 비번을 입력해야 한다. 비번이 틀리면 새로운 비번을 생성해야 하는데, 보안강화 정책 때문인지 최근 1년간 쓴 비번은 쓸 수가 없다. 다음에 생각해 낼 비번을 입력한다. 1주일만 지나도 비번은 생각나지 않는다. 또다른 새로운 비번을 만드는데, 망각의 암호를 넣는 기분이다.


거의 매일 연락하는 원장님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성은 알겠는데 이름이 가물거린다. 카톡 검색창에 성을 입력하자 이름이 탁하고 생각난다.


가벼운 일상의 단어들은 당연한 노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거의 매일 연락하는 지인들의 이름이 생각이 안 나다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절친인 정신과 전문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수위가 높아가는 건망증에 대해 주절거린다. 이제는 이름도 생각이 안 나네, 뇌에 문제가 있는 걸까? 친구는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노화란다. 자기도 그러니 별다르지 않고, 바쁘니 일 봐라고 하고 사라진다.


질풍노도의 시기. 밥 먹고 빵 들어갈 배는 따로 있다는 말처럼, 공부로 꽉 채운 머리에 잡다한 일상의 기억들이 들어갈 공간도 충분한 시절이었다. 

대화를 하다 한 번씩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그거, 그거라고 하는 엄마. 너도 내 나이 돼 봐라는 말은 속담처럼 굳어버린 엄마의 대사였다. 100미터 밖 바위의 이끼도 선명하게 표현하는 최신 카메라가 아니라, 엊그제 찍은 4월의 벚꽃마저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 그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가 유난스럽다 생각했고, 괜히 저런다 화를 내고, 대화가 막히면 짜증을 부렸다.


엄마 나이의 내가 되었고, 그때의 나는 아이들이 되었다. 

"블랙핑크 말고 있잖아. 이번에 새 노래 나왔던데. 뭐지? 그 있잖아 블랙핑크 말고."

노래는 아이들과 작은 소통 통로다. 학교나 학원 픽업을 하면, 각자의 취향에 맞게 만들어둔 플레이리스트의 노래를 틀어준다. 큰 아이 플레이리스트에는 최신 K팝이 가득하다. 

"뉴진스? 여자아이들? 아이브? 르세라핌?"

"아니. 블랙핑크만큼 유명한 그룹 있잖아."

소속사가 어렴풋 기억이 났지만, 꼭 이름을 기억해 내고 싶었다.

"아이돌 맞아? 여아 아이돌 유명한 거 또 뭐가 있지?"

"맞다. 로제 있는 그룹 있잖아!"

"로제는 블랙핑크야. 이름을 말해봐! 참! 이름 몰라서 지금 묻는 거지. 혹시 에스파?"

"맞다 에스파. 진짜 유명한데 왜 생각이 안 나지? 이번에 새 노래 나왔던데 들어봤어?"

"벌써 들어봤지."

아이들은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고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간다.



새 아파트에 살다, 10년쯤 지나면 화장실 변기, 샤워기, 싱크대 배수, 구석의 벽지 같은 소소한 잔고장이 생기듯, 몸도 다양한 노화를 만든다. 당연했던 몸의 기능들이 조금씩 무뎌지는 것. 살기에 익숙해 잔고장은 덤덤하게 감당한다. 아파트와 달리 몸은 리모델링이 안된다.


작가의 이전글 에스프레소 대신 바닐라라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