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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펜 Jun 20. 2023

8년 전 보다 생각이 늙었다

노화 시리즈

도구가 일상을 바꾼다.

오디오를 샀기 때문에 음반을 구매한다.

커피머신을 샀기 때문에 커피를 더 자주 마신다.

러닝화를 샀기 때문에 운동하러 나간다.


만년필과 노트가 일상을 채웠다. 

만년필을 수집하다 보니 써야 할 노트가 필요했다.

노트를 수집하다 보니 다양한 쓸 거리를 만들었다. 

감사일기, 낙서노트, 투자일지, 그림노트, 할 일노트.


실재 쓰는 노트들


아이들과 서점엘 가면 발걸음은 노트칸으로 향하다. 독서광이 무색해진다. 여행을 가서 쇼핑을 하면서도 문구코너는 빠짐없이 들린다. 이쁜 곁표지에 들었다가 가격을 보곤 깜짝 놀라 내려놓는다. 

노트를 고르는 기준은 분명하다. 크기는 손바닥만 한 B5가 좋다. A4 사이즈는 한 페이지를 채우기 버겁다. 너무 두꺼우면 한권을 채우는 기간이 길어진다. 테마별로 2달 정도면 적당하다. 다 쓰고 마지막 페이지에 감사 멘트를 쓰고 새 노트를 꺼내 안표지에 날짜와 새로운 다짐을 적는다. 필요하면 앞전 노트의 주요 내용을 옮겨 적고,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나간다. 가격도 적당해야 한다. 눈여겨본 노트가 세일 중이라면 많이 구매하기도 한다.


책장을 정리하다 아주 두꺼운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노트를 고르는 취향이 달라졌나 보다. 지금 같으면 사지 않을 사전 정도의 두께다. 크기도 A4 보다 작지만 손바닥보다는 훨씬 크다. 

지금처럼 용도를 구분해서 쓰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적던, 통칭 낙서노트였다. 

일기, 옵션계산, 독서감상문, 일상잡담, 사주풀이, 주가와 환율. 폭넓은 잡다한 내용들을 끄적여놓았다. 심지어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연예인 얼굴, 손가락, 내 얼굴, 반려견 자두의 모습까지. 


2015년 일기가 있었다. 무려 8년 전. 40대 후반의 나를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다. 

무한히 반복되는 일상. 주말이 지나고 새롭게 시작되는 월요일은 지난 월요일의 반복. 반복의 터널을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적혀있었다.

변화를 위해 발버둥 치던 시기였다. 

강박에 가까운 자기 관리, 스스로 의무감을 지운 연간 수백 권의 독서, 다양한 사고와 일상의 변화를 위한 노력. 지금이라면 꿈도 못 꿀 열정이 노트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불현듯 떠올랐다. 그 시절 과거의 나는 최선을 다해도 성에 차지 않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현실의 나를 더 닦달해 노력을 짜내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던 시기였다. 


저렇게 할 수 있었다니. 저런 것도 했다니. 과거의 열정이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쪼그라든 열정을 다시 불태울 용기도, 바람도 생기지 않는다.


매일 0.1%면 1년에 36.5%를 바꿀 수 있다. 일상의 변화는 감지하기 힘들다. 같은 매일의 반복이다. 8년 전 일기 덕분에 바뀐 나를 알아차렸다.

신체의 노화는 불편한 증상 때문에 쉽게 알아챈다. 생각과 감정은 현재가 기준이라 지금이 가장 당당했다. 살면서 과거의 나에게 처음으로 패배했다. 생각도 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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