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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펜 Jun 20. 2023

생각이 늙었다

노화 - 생각

"나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 마음을 닫는 것이 우리를 늙게 할 뿐이다."

— 헨리 포드 (Henry Ford)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환경에 지배당한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처럼, 아이의 공부 환경을 위해 이사까지 갔을까? 대학교 때 아침잠이 많아 가끔 1교시 수업을 빼먹곤 했다. 평생 못 고칠 줄 알았던 아침잠이었지만, 훈련소에 가니 6시만 되면 눈이 떠졌다. 그때는 ‘드디어 아침잠을 고칠 수 있겠다’ 싶었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결심은 일주일도 안 돼 물거품이 되었다.


환경이 변하면 사람도 변하는 것일까, 주객이 전도되기도 한다. 평소에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거나 아침에 한 잔 정도 마셨는데, 커피머신을 들여놓고 나니 에스프레소를 하루에 다섯 잔, 여섯 잔씩 마시게 되었다. 음악 감상을 위해 오디오를 샀는데, 어느새 음반 수집이 취미가 되었다. 잡지를 사고, 레코드 가게를 찾아다니며 인터넷을 뒤져가며 음반을 모으는 데 시간을 쏟았다. 운동을 하겠다고 러닝화를 샀더니, 브랜드별 운동화를 모으게 되고, 덕분에 더 자주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역시 환경이 바뀌면 일상도 달라진다.


악필이라 필기보다 키보드가 편했다. 남자의 만년필 수집에 대한 책을 읽고 나니 만년필에 관심이 생겼다. 고가는 아니지만, 하나씩 사 모은 만년필이 어느새 열 자루나 되었다. 만년필의 단점은 자주 쓰지 않으면 잉크가 굳는다는 것이다. 세척이 귀찮아 자주 쓰다 보니, 만년필을 쓰기 위해 노트까지 모으게 되었다.


아이들과 서점에 가면 책보다는 문구 코너로 먼저 간다. 사려다 망설였던 노트, 새로 나온 노트, 세일하는 노트에 눈이 간다. 몰스킨 사이트에 가끔 들어가서 할인 품목을 살펴보기도 하고, 알림 설정해둔 사이트에서 노트 할인 행사를 하면 놓치지 않으려고 몇 권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여행을 가면 현지 문구점에서 특이하고 예쁜 노트를 사는 재미도 빼놓지 않는다. 가격이 너무 비싸면 내려놓지만, 적당한 가격대의 노트는 몇 권씩 사온다.


노트가 많아지면서 활용도도 다양해졌다. 매일 한 가지씩 감사한 일을 적는 ‘감사일기’, 투자 관련 생각을 정리하는 ‘투자노트’, 해야 할 일을 적는 ‘할일노트’,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구를 적어놓는 ‘명상노트’, 특별한 주제 없이 자유롭게 적는 ‘낙서노트’. 노트가 다 차면 마지막 페이지에 간단한 감상을 적고, 새 노트를 꺼내 시작 날짜와 새로운 다짐을 적어 놓는다. 노트를 쓰는 동안 작은 발전을 기대해본다. 가끔 중요한 내용은 앞 노트에서 옮겨 적기도 한다.


쓰다 보니 나름의 기준도 생겼다. A4 크기는 다 채우기 버겁고, B5가 적당하다. 너무 두꺼운 노트는 부담스럽다. 다 쓰면 뭔가 과제를 수행한 듯 뿌듯하고, 새 노트를 꺼내 쓰는 즐거움도 있다. 그래서 좀 얇으면 좋다. 가격도 적당해야 한다. 한때 팬시점에서 천 원짜리 노트를 사 모았지만, 만년필 잉크가 번져서 그 뒤로는 너무 저렴한 노트는 사지 않는다.


책장을 정리하다 두꺼운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보통은 노트를 다 쓰면 버리지만, 워낙 두꺼워서 절반도 못 쓴 채 남아 있었다. 누런 종이에 밑줄도 없어 이것저것 편하게 적어두었는데, 요즘 같으면 절대 사지 않을 크기와 재질, 두께였다. 가족과 지인의 사주풀이, 방위학 책을 읽고 요약한 내용, 주식과 원자재 관련 기사 정리, 일상 이야기 등 다양한 시도가 담겨 있었다. 심지어 잡지 사진을 따라 그린 그림, 연예인 얼굴, 반려견 자두 얼굴까지 그려져 있었다.


노트에는 40대 후반의 내가 쓴 글들이 있었다. 지금의 나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정신없이 바쁘지만 무한히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절실함. 연간 수백 권의 책을 읽어가며 변화를 꿈꾸던 열정.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술 마시는 요일까지 철저하게 관리했던 강박적인 모습. 그때의 나는 최선을 다해도 성에 차지 않았다. 현실의 나를 다그치며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살았다. 최고의 경쟁자는 나 자신이었고, 어제의 나를 이기기 위해, 내일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살던 시절이었다.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변해 있었다. 어느새 현실에 안주하고, 힘든 일상을 탓하며 변명을 찾고 있다. 신체의 노화는 불편한 증상 때문에 알아차리기 쉽지만, 생각과 감정의 변화는 늘 지금이 기준이 된다. 10대에도, 20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세상의 중심은 늘 ‘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처음으로 과거의 나에게 패배감을 느꼈다.


할 일 노트에는 하지 못한 일들만 가득하다. 방학을 시작하며 세웠던 원대한 계획들이 방학이 끝나가며 생각에 그친 현실로 남듯.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뭔가를 하려고 해도 불이 붙다가 금세 꺼지는 장작처럼 열정이 불타오르지 않는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늙은 걸까? 10년 후의 나를 생각하면 그래도 지금이 뭔가를 할 수 있는 때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대학 친구들을 만난다. 여전히 바쁘게 사회활동과 강의를 하며 열정적으로 사는 친구, 이제는 무리하지 않고 현실을 즐기며 사는 친구. 둘 다 좋아 보인다. 인생의 계획표는 다음 방학이 없다. 할 일 노트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시도해봐야겠다.


휴일에 메신저로 지인이 연락해 왔다. 유튜브를 해보지 않겠냐며 이유를 조목조목 적어 보냈다. 조금 고민해 보겠다고 했지만,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미팅 날짜를 정하고 유튜브 촬영에 필요한 내용을 정리했다. 학원 강의실을 대충 정리해서 스마트폰으로 연습용 촬영을 해봤지만, 우리 힘으로 하나씩 준비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실감했다. 촬영에 필요한 소품이 준비된 스튜디오를 섭외해 첫 녹화를 했다. 결과물이 시원찮았다. 할 일 목록의 ‘스피치 연습’을 다시 해야겠다. 환경은 사람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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