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 건망증
"나이 들면서 잊는 것은, 기억할 것과 놓아줄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전에 갔던 음식점 있잖아. 그거 먹었었잖아!"
"전에 언제? 어디 말하는 거야? 먹었던 그건 또 뭐고?"
나보다 건망증이 빨랐던 아내에게 했던 핀잔을, 이제는 아이들에게 그대로 듣는다.
질풍노도의 시기. 먹어도 먹어도 돌아서면 배가 고팠던 중학교 시절, 그때 내 머리는 마치 무한 용량의 하드디스크 같았다. 공부로 가득 채워도 일상의 잡다한 일들까지 모조리 담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넘쳤다. 지금의 내 나이였던 엄마가 “그거, 그 뭐냐…” 하면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면, 나는 속으로 '저 쉬운 단어가 왜 생각이 안 나?' 하고 의아해했다. 혹시 일부러 그러시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답답해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냄비를 태우거나 빨래를 돌렸는지 잊고 체육복을 그대로 세탁기에 둔 채 내가 화를 내면 미안해하셨다. 그때 엄마의 건망증을 답답해하던 내가, 이제는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한때 일상의 사소한 기억까지 꼼꼼하게 챙기던 '고성능 뇌'는 어느 순간 희미해진 전구처럼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자주 쓰는 비밀번호는 매번 잊어버린다. 결국 비밀번호 찾기로 다시 설정하고, 다음번에는 또 기억이 나지 않아 메모장에 저장해둔다. 퇴근길에 떠오른 일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까맣게 잊히고, 자주 연락하던 지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핸드크림을 사러 가서 익숙한 디자인을 발견하고 사려다가,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현재 쓰고 있는 제품이었고, 그 제품은 사용감이 별로라 다시는 안 사겠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제품이었다. 내 기억은 최신 스마트폰이 아니라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귀퉁이부터 희미하게 바래져 간다.
늦은 밤, 아이들을 학원에서 데리고 오는 차 안에서 물었다.
"그 노래 들어봤어? 블랙핑크 말고, 그 뭐더라…"
최신 노래는 나름 아이들과 소통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뉴진스?"
"아니, 블랙핑크 말고 있잖아? 엄청 유명한 그룹!"
이름이 떠오를 듯 말 듯 했지만, 끝내 정확한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아이브? 르세라핌?"
"맞다! 에스파!"
다행히 아이들은 짜증 대신 엄마랑 비슷하다며 웃어주었다.
최근 들어 건망증이 더 심해지면서 절친인 정신과 의사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주 연락하던 후배 이름도 잊고, 매일 쓰던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더라며 불안함을 털어놓았다. 혹시 뇌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친구는 진지하게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노화라며 신경 쓰지 말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기억력을 향상시킬 묘약은 없다. 그래서 나만의 안전장치를 만들기로 했다. 중요한 업무는 직원에게 더블체크를 부탁했고, 스마트폰의 다양한 앱도 시도해봤지만, 결국 가장 믿을 수 있는 방법은 고전적인 '노트에 적기'였다. 출근하면 해야 할 일을 큼지막하게 만년필로 노트에 적고, 하나씩 체크해 나갔다. 약속도 미리 며칠 전에 다시 확인했다. 날짜와 시간을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서로 늙어가는 요즘에는 쌍방 확인이 필수다.
새집도 시간이 지나면 잔고장이 생기듯, 우리 몸도 그렇다. 변기에서 물이 새고 샤워기에서 물이 튀고 벽지가 찢어지는 것처럼 우리 몸도 삐걱대기 시작한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차츰 그런 잔고장에도 덤덤해진다. 차이점이라면 집은 리모델링할 수 있지만, 우리 몸은 리모델링이 안 된다는 거다. 고장 난 부분을 고치면 또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기고, 그때마다 적응해 나가야 한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몸의 작은 고장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덤덤하게 그 변화를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