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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돌이 Aug 05. 2022

에스프레소는 흰 잔에 마셔야 한다

매일 아침 만나는 일상의 행복

공폰으로 쓰는 LG V30의 알람이 울린다. 손을 뻗어 폰을 뒤집자 잠잠해진다. 잠시 후 아이폰 12의 알람이 울린다. 눈을 조금만 떠서 화면을 터치하고 다시 잔다. 한 번 더 차례대로 알람이 울리면 알람을 끄고 침대에 반듯이 누워 활짝 웃는다. 하루를 알차게 살 나에게 보내는 격려다. 


거실로 나오면 위잉 소리가 들린다. 아내가 핸드믹서로 야채와 과일을 갈고 있다. 살짝 옆으로 비켜서서 네스프레소 머신의 버튼을 누르고 캡슐을 하나 장착한다. 치익하며 흰잔에 검은 액체가 차오른다. 갈색의 크레마가 덮인 잔을 야채 과일 주스 용기 옆에 내려놓는다. 교대로 한모씩 마신다. 달고 쓴 맛으로 아침을 연다.


십여 년 전 처음 에스프레소 머신을 샀을 때 아내는 에스프레소 잔을 선물했다. 은색의 스테인리스 잔에 귀이개보다 조금 큰 숟가락이 놓인 받침대와 한 세트였다. 


태국 여행 가서 백화점 쇼핑을 하며, 스타벅스에 디스플레이된 잔을 보다가, 일리 커피의 아트컬렉션이 이뻐서 잔을 사모았다. 잔은 깨지라고 만들었는지 평균 수명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아내의 스테인레스 잔에 내린 에스프레소는 뭔지 안 이뻤다. 막걸리 사발에 와인을 담은 느낌이다. 아이러니하게 유일하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잔이다. 


스테인리스 잔에 내린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면 대부분 흰 잔에 에스프레소를 내려준다. 까만 액과 갈색 크레마는 흰 잔에서 가장 돋보인다.


바디가 길고 밑이 살짝 좁아지는 안 이쁜 스타벅스의 에스프레소.


스타벅스의 에스프레소


자주 가고 싶지만 몇 번 못 가본 구남로의 에스프레소 바. 통통한 바디에 바닥이 동그스름한 전형적인 에스프레소 잔. 걸쭉한 갈색의 크레마는 흰 잔과 또렷하게 대비된다. 


구남로 에스프레소 바


코로나로 여행도 못 가고 답답했던 2021년. 일상의 작은 사치를 부리고 싶어 비싼 에스프레소 잔을 샀다. 그전까지 최고가 잔은 일리의 아트컬렉션이었다. 


승모근과 광배근을 단련한 넓고 탄탄한 몸통 같은 바디에 바닥을 주석으로 마감했다. 주석의 무게 때문에 들 때마다 느껴지는 묵직한 이질감. 잔이라기보다는 예술 작품을 하나 사는 기분이었다.


가마에 구운 잔이라고 했다. 약하니 조심히 다루란다. 에스프레소를 마신 후 싱크대에서 손가락으로 조심히 컵을 씻고 기기 옆에 두었다. 컵 안이 조금씩 더러워지자 아내는 다른 그릇과 함께 설거지를 했다. 살짝 부딪쳤는데 윗부분이 깨져나갔다. 물론 아내의 증언이다. 받침대도 금이 갔다. 버리기에는 너무 비쌌다. 안 깨진 부분으로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셨다.


입구가 떨어져 나간 주석잔


지난주 손잡이가 사라진 잔이 놓여있었다. 아내는 자신이 범인이라고 순순히 자백했다. 기존에 깨진 반대편도 떨어져 나갔다. 더 이상은 함께 하기 힘들겠다. 헤어지기 아쉬워 안 깨진 부분으로 조심조심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셨다. 



손잡이도 떨어져 나간 주석잔


스타벅스에는 요즘 에스프레소 잔이 안 보인다. 일리 커피는 매장이 없어졌다. 일리 사이트에 아트컬렉션이 팔긴 하는데, 세트로만 판다.


주말에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릇 코너를 찬찬히 둘러봤다. 눈에 띄는 잔 하나. 곧바로 사고 싶었지만, 잠시 마음을 누르고 나머지 코너를 확인하고 되돌아왔다. 


곧고 길게 뻗은 바디. 얇고 큰 귀를 닮은 손잡이. 머리는 은색의 플래티넘으로 장식되었다. 회전하며 말려 올라간 치마처럼 살짝 떠오른 받침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는 어떤 맛일까? 두근두근 아침을 기다린다.

 

주석잔 다음의 고급진 에스프레소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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