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불쑥불쑥 떠오르는 달갑지 않은 생각들이 있다. 짜증 나고 쪽팔린 흑역사라던가, 복잡한 고민거리라던가, 당시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미제로 남겨두고 잠시 잊어버린 생각이라던가. 어떤 날은 찰나에 떠올랐다가 일상에 밀려 사라지지만, 어떤 날은 며칠간 떠올라 사람을 깊은 동굴 속에 밀어 넣는다. 이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타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을 때이다. "그때 왜 그랬어? 그때 그랬던 게 사실이야?"
이런 생각들은 나에게 긴밀할수록, 소중한 사람에 관련된 것일수록 더더욱 나를 괴롭힌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래도 상대방과 잘 지내고 싶어 아주 참았지만, 아무리 참아도 새어 나오는 궁금증에 결국 입을 열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은 보통 기대 이하였어서 이제는 혼자 생각하고 짐작하게 된 것들. 어린 만큼 불안도 더 컸기에 더 자극적으로 더 파국적으로 해석하고 괴로움에 눈물 흘렸지만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어 내 안에서 곪아가던 생각들. 도움받지 못해 곪아가던 마음은 결국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서 나이 든 내가 해결한다. 나이 드는 것의 장점은 세상을 이해하는 해상도가 높아지는 것 아닐까. 나이 든 나는 높아진 해상도로 어린 나에게 세상을 다시 해석해 주고, 나를 변호하고, 내 눈물을 닦고 나를 다시 웃게 한다.
제주도로 태교여행을 갔을 때였다. 임신 중기의 나는 배가 꽤 불러 있었고, 시설이 좋아 임산부들이 태교 여행으로 많이 찾는 호텔에 묵었다. 제주도에서 수영을 하기 위해 샀던 초록색 뽀글이 임산부 수영복을 개시하는 날이었다. 새 옷을 개시하여 들뜬 마음으로 범과 함께 호텔 야외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라 따뜻한 물에서 나오면 밖은 꽤나 추웠다. 얇은 얼음 같이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노니는 기분이 샤워 후 뽀송뽀송한 겨울 이불을 두른 듯 개운하고 포근했다. 범과 물장구를 치며 노다가 수영장 쉬는 시간이 되어 전부 물에서 나와야 하는 때였다. 수영장에 있던 사람들은 메인풀에서 나와 풀 근처의 지름 3m의 작은 원형 풀에 들어가 있었다. 나와 범도 재개 시간을 기다리려 원형 풀에 합류했다. 풀에는 우리 둘을 포함하여 9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범과 나, 커플 한 쌍, 엄마와 아들, 아빠와 두 딸. 9명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다리만 담근 채로 쉬었다.
평화롭게 쉬는 도중 맞은편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의 출처는 어린 두 딸과 함께 온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선글라스를 꼈으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임산부들은 다들 공감하겠지만, 배가 많이 나오면 외출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는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아무래도 배가 볼록 튀어나와 있어 입체감 때문에 눈이 자연스럽게 가는 효과라 생각하여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가곤 했다. 보통은 자연스럽게 눈이 가서 날 쳐다보더라도 임산부임을 인식하면 황급히 눈을 돌리곤 했다. 가끔씩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도 있긴 했다. 바로 이 중년 남자처럼. 눈을 마주치면 안 쳐다보겠지 싶어 정면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잠깐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계속 다시 나를 쳐다봤다.
눈이 세 번쯤 마주쳤을 무렵, 화가 치밀어 올라 "저한테 뭐 할 말 있으세요? 왜 자꾸 쳐다보시는 거예요?"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몸을 함부로 쳐다보지 않는 것은 기본 예의 아니겠는가. 심지어 지금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 상태라 시선이 더욱 불쾌했다. 그런데 그를 안고 있는 그의 어린 딸이 눈에 띄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그의 딸은, 그의 허리를 안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딸은 나를 쳐다보는 아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에게 그 질문을 했더라면 그는 어떤 변명을 했을 것이다. 눈을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쪽을 쳐다본 게 아니었다든지, 임산부냐고 물어보든지, 그 수영복 어디서 산거냐든지,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든지. 뭐든 내가 알 바 아닌 변명을. 중요한 것은 그가 꽤 오랫동안 나를 쳐다봤고, 내가 눈을 맞추며 불쾌함을 표시해도 계속 쳐다봤으며 내가 이것이 좆같았음을 질문으로써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가 무슨 변명을 하건 그는 나에게 그런 질문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어른이니 내 질문을 기억에서 흘려버리면 그만이지만, 계속 나를 쳐다보는 아빠의 얼굴을 불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던 그의 딸은 기억에서 흘릴 수 있을까? '아빠가 저 여자를 쳐다본 게 아니었을 거야. 뒤에 있는 다른 걸 봤겠지.'라고 애써 추측하고 짐작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그의 딸이, 저 질문을 들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결론적으로 나는 그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쳐다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가 절대 아니었다. (눈을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 그가 나를 쳐다보는 내내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딸의 얼굴이 내 입을 막았다.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어 보였는데, 이때의 여자아이들은 쉽게 두려워하고 그래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한다. 감수성 많고 예민한, 그런 만큼 불안하여 흘러들어오는 정보를 어떻게 판별해야 될지도 모르는 그 시기에 나는 굳이 에피소드를 더 만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잘못이지만, 그 에피소드는 초등학생 여자아이한테는 가혹할 것 같았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번뇌하는 게 인간일지 언데 그때는 그냥 그 초등학생의 마음의 안녕을 지켜주고 싶었다.
구원은 셀프라는 말이 여기에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의 행동이 그의 딸에게 번뇌를 선사하는 행동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당장에 그를 꽉 안고 불안하게 얼굴을 올려다보던 시선에서도 느껴졌다. 그가 어디 나한테만 그런 사람이었겠는가. 내가 그 질문을 했든 안 했든 이미 그 초등학생의 번뇌에 그 장면은 추가되었을 것이다. 아이는 계속 떠올리며 물어보고 싶은 여러 질문들을 혼자 속으로 삼키며 불안해할 것이다. 때로는 그에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답을 들어도 그 대답이 초등학생이 직접 봤던 순간을 상쇄시키고 불안을 진정시켜 주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진정될 것이다. 언젠가는 그 번뇌를 끝내러 중학생이 된, 고등학생이 된, 대학생이 된, 30대, 40대, 50대의 초등학생이 올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셀프로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