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이라는 쉬운 이름의 함정
나는 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이런 내가 영어교육 대학원에 진학했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공부하기가 수월하겠다 싶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 스스로도 사회에 나와서는 제대로 써먹어보지 못한 내 전공을 살리고, 대학원에서 그걸 업그레이드 해 새로운 진로를 도모하자는 생각으로 이 학교를 선택하기도 했다. 학부에서 영어학 관련 수업도 적잖이 들어놓은 편이니, 그래도 몇몇 수업은 일단 '먹고 들어가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래서 기초도 다시 다지고 조금 쉽게 시작하기도 할 겸 해서 영어학개론 같은 수업을 첫 학기에 수강했다.
그리고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어설프게 아는 것은 아예 모르는 것만 못하다는 걸 한 학기 내내 체감하게 됐던 거다.
내가 수강한 수업은 영어학의 기초를 폭넓게 다루는 것이라 학부에서는 음성학, 음운론, 화용론 등으로 여러 수업에 나누어 배우던 것들을 한 학기에 몰아서 가르쳤다. 그렇다고 내가 그 개별 과목들을 학부에서 전부 수강했던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공부해야 할 양은 많았고, 마침 담당 교수님도 학교에서 손에 꼽게 열정적인 분이셨다. 강의만 듣기에도 벅찬데 매주 쉽지 않은 과제가 주어졌고, 가끔 주말 온라인 특강이 진행되었는데 출석은 자율이었으나 시험에 특강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렇다 보니 공부에 투입해야 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양도 어마어마했고, 세상사와 알코올에 절여진 마흔의 뇌는 스무 살 때의 그것과 달랐기에 신경을 바짝 써야 강의 내용을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점 역시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건, 머릿속에 어설프게 남아있는 지식의 조각들이 새로운 정보의 입력과 저장을 방해한다는 점이었다.
조음기관의 이름과 위치, 거기서 나오는 소리의 명칭
형태소의 종류와 특징
문장 구조의 수형도 분석
등등등
다 어디서 보고 들었던 내용들이 자꾸 나왔다(어디긴 어디야, 학부 강의실에서 보고 들었지).
아예 처음 접하는 내용이면 '저런 게 있구나',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들을 자꾸 '이거 들어본 건데?', '아 이거 뭐였지? 알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하면서 듣게 되니, 가뜩이나 혼미하던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쏘아 올려지곤 했다. 심지어 학부에서 들었던 내용이라는 걸 기억해 내도, '그래서 어쩌라고?'의 단편적인 상태로 끝나는 경우가 99.9%였다. 왜냐면, 난 학부에서 제대로 전공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공.
사전을 찾아보면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함',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항목'이라는 정의가 나온다.
하지만 내가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이미 대학은 상아탑의 기능을 상실하고 취업학원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나 역시 취업이라는 막연하고 불안한 목표만을 크게 인식한 채 학교에 다녔다. 그저 좋은 학점을 받고 싶어 수강신청 때마다 '학점 따기 좋다'고 소문난 과목에 광클을 하는 '반도의 흔한 대학생 1'이 바로 나였다.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기는커녕 '취업에는 이중전공이 좋을까 연계전공이 좋을까' 따위의 생각으로 방황하며 남의 전공 강의실을 전전했다. 그렇게 어어어... 하다 보니 그 어디에도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채, 어느새 졸업이었다. 이런 내가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그걸 좀 살려보겠다고 대학원에 용감무쌍하게 들어왔다는 사실이, 다시 만난 영어학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얼마나 스스로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사실 영어영문학 전공이라는 타이틀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사회에 나와서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나를 포장해주는 힘이 있었다. 아주 희소한 전공 학문도 아니고, 역사도 깊은 학문이고, 국내 인문학 쪽에서는 나름 세력이 큰 편이라 해야 할까, 그래서 영어영문학과 졸업생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기도 하고. 뭐 그런 이유로 그동안 '영어영문학 전공자'라는 말은 가장 수월한 자기소개 중 하나였다. 그런데 다시 공부를 시작하며, 그동안 내 정체성을 이뤘던 그 큰 기둥 하나를 스스로 의심하게 된 셈.
나는 대학교에 왜 진학했으며, 거기서 무엇을 얻기를 원했는가?
내 지적 능력이 한참 왕성하던 시기, 나는 대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공부했는가?
대학교 전공이라는 것의 의미는 내게 무엇이었나?
사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고민했으면 좋았을, 하다못해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라도 고민했으면 좋았을 이것들을, 나는 이제야 돌아보았다. '영어영문학 전공입니다'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와 의미를, 그 말을 하면서 가져야 하는 인생에 대한 책임감과 고민을, 스물 무렵의 내가 알았더라면 그동안의 내 삶은 조금 달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