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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lar Oct 24. 2021

가라는 가라

얼렁뚱땅 대충대충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공부가 하도 오랜만이라 힘들더라, 하고 엄살을 떨어놓기는 했지만 지난 15년 가량 사회생활을 하면서 뭔가를 배울 시도를 아예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강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강의는 신입사원 연수 과정 등을 통해 의무로 들어야 했지만, 엑셀이며 워드같은 OS 기초부터 회계, 마케팅, 전략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울러 내가 약 7년간의 정규직 생활에서 자발적으로 수강한 온라인 강의는 무려 삼십 개에 달한다. 문제는 '수강'은 많이 했으나 실제 배운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다고?


3년 전,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에서 내 직업훈련 이력을 보며  나는 얼이 빠져 있었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삼십 개의 수강이력 목록.

뜻대로 되지 않는 프리랜서의 돈벌이에 지쳤던 당시의 나는, 정부 지원 프로그램을 이용해 자격증이라도 따볼까 하는 생각으로 고용노동부의 직업훈련 관련 프로그램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나 싶어 열어본 나의 직업훈련 이력에 온갖 온라인 강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던 것. 이게 다 뭔가 싶어 찾아보니, 과거 회사에서 직원 복지 차원으로 제공했던 온라인 강의에 고용노동부의 지원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 수강 이력이 모두 DB화 되어 남아있던 거였다.


무려 세 페이지에 걸친 내 과거 수강 목록을 보면서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어렴풋이 당시의 내가 하던 짓들이 기억이 났는데, 내가 뭘 공부했는지 그 내용은 티끌만큼도 기억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들어야 해서 들었던 강의든, 듣고 싶어서 신청했던 강의든,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들었던 강의는 한 개도 없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당시 온라인 강의라는 게 다 고만고만하게 상태가 안 좋았다. 내레이터가 십년 전쯤 유행했을 것 같은 정장 차림으로 화면에 등장해 앵무새처럼 강의 내용을 읽어 준다든지, 그 이름부터 오그라드는 '김만능 대리'나 '왕순진 사원' 같은 만화 캐릭터가 나와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상황극을 하곤 했으니까.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보석같은 지식을 캐내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겠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음소거해놓은 사무실 노트북에 강의 영상을 돌려만 놓은 상태로 다른 볼일을 봤고, 중간중간 '다음' 버튼을 눌러 진도만 겨우 100%로 채웠다. '신입사원이 알아야 할 우리 회사 핵심가치!' 뭐 이런 의무 수강과목들을 수료하며 터득한 '가라(가짜)로 진도 찍기' 스킬이었다. 그렇게 아무 의미없이 채운 수강 목록이니, 시간이 흐르면서 내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진 게 당연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무슨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거의 매달, 그렇게 '가라'로 진도를 채워가며 수강 완료 목록을 쌓던 나는 그 때 그 '가짜 성취'를 즐겼던 것 같다. 그래, 내가 이 빡센 회사생활 와중에 그래도 나 자신을 위해 뭔가는 하고 있어! 하는 그런 느낌만을 말이다. 영업현장에서는 '가라'로 실적을 찍는 게 암암리에 성행했고 스태프 부서에서는 '가라'로 만들어진 그 숫자를 그럴듯하게 가공해서 임원들에게 딸랑딸랑, 보고하던 시절이었다. 나 자신을 속이는 게 가장 큰일임에도 불구하고 '가라'로 돌아가는 세상에 익숙해져버린 나는, 소중한 시간을 온라인 강의에 의미없이 흘려 보내는 내 자신에게 아무런 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놈의 '가라'로 대충 막는 못된 버릇은 15년이 지난 후, 다시 살아났다.

사이버 대학원에서는 정해진 기간동안 강의 영상을 다 시청하지 않으면 지각이나 결석으로 처리, 출석점수를 깎는다. 물론 어려운 결심으로 시작한 학교생활이기에, 난 학기 초반만 해도 모든 강의에 진심으로 임했고 강의 하나하나 노트를 해 가며 진도를 채워나갔다. 그러나 시작부터 너무 오버페이스한 탓일까, 나는 금세 나가 떨어졌다.


일단 진도만 찍어놓고, 다음에 다시 각잡고 앉아서 듣지 뭐.


그리고 당연히(?) 내가 기다리던 그 '다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중간고사가 다가왔을 뿐.

늘 그렇다. 어딘가 켕기는 마음이 들며 도모한 '다음'은 웬만해서는, 혹은 절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한 주간 강의 진도를 '가라'로 나가놓고 잠시 안도감에 젖어 있자면 어느 새 그 다음 주 강의가 업로드 돼 있었다. 앞 주간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새로 올라온 강의는 듣는다 해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일단 가라로 진도만 찍고 보는' 강의 목록이 추가되는 식으로 시간이 흘러갔다. 결국 시험을 코앞에 두고 하나하나 짚어보니 7주에 달하는 수강 목록의 진도표는 100%로 꽉 채워져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건 10%도 채 되지 않았다.


결국 중간고사 직전, 모든 강의를 1.2배속에서 2배속으로 다시-사실상 처음- 들으며 나는 몇 번이고 멘탈이 가출해버린 머리를 책상에 쿵쿵 찧어댔다. 천천히 들어도 소화하기 어려운 강의 내용을, 모자란 시간 때문에 속사포 랩으로 만들어 듣고 있자니 문득, 발레하는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격언이 떠올랐다.

하루를 쉬면 내가 알고, 이틀을 쉬면 선생님이 알고, 사흘을 쉬면 관객이 안다는 그 말.

공부는 결국 내가 시작해서 내가 끝을 봐야 하는 일. 더욱이 마흔의 만학도에게는 딱 붙어 가르치는 선생님도 없고, 지켜봐주는 관객도 없다. 하루를 대충해도, 이틀을 얼렁뚱땅 해도, 사흘을 가라로 찍어도 결국 피보는 건 나 혼자다. 아무도 감시하지 않는 틈을 타(?) 신나게 가짜 출석을 해 댄 방만한 신입생은 결국,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초췌한 몰골로 중간고사 기간을 맞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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